[손인주의 퍼스펙티브] “한국인은 생각보다 강하다”…새로운 국가 비전 모색해야

2024. 9. 3. 0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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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인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나는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강하다.” 프로야구 롯데 자이언츠 소속 ‘배달의 마황’ 황성빈(①) 선수의 좌우명이다. 그는 어려운 성장 과정을 거쳤다. 프로야구팀의 주전으로 기용되기까지 하루하루가 치열했다. 틈만 보이면 1루에서도 헤드 슬라이딩을 주저하지 않는다. 유니폼은 늘 흙투성이다. 오랜 무명의 시간을 보낸 그는 매 순간이 선수 인생의 위기였다고 한다.

김우진이 8월 4일(현지시각) 프랑스 파리 레쟁발리드에서 열린 2024 파리 올림픽 양궁 남자 개인전 결승 경기에서 활을 쏘고 있다. 뉴시스

투지와 열정으로 똘똘 뭉친 모습은 2024 파리올림픽에 참가한 한국 선수들에게서도 발견된다. 대표적인 인물이 한국 양궁의 새로운 전설을 쓴 김우진(②) 선수다. 활 잘 쏘는 시골 출신 청년이 국가 대표로 선발됐다. 그는 지난 세 차례 올림픽 개인전의 실패를 극복한 뒤 마침내 파리 올림픽에서 양궁 3관왕에 올랐다.

「 파리올림픽 정상 지킨 한국 양궁, ‘혁신의 시스템’ 체계화한 결과
강인하고 진취적인 한국인의 강점, 자기 인정에 인색하지 말아야
한국을 글로벌 중심축 삼자고 제안하는 ‘다중 바큇살 생산기지론’
초일류 개방적 네트워크 강대국 향해 담대한 도전과 여정 나서야

김우진 선수를 포함한 한국 양궁 대표팀이 오랫동안 계속 발전하고 강자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혁신의 시스템이 제대로 갖춰졌기 때문이다. 우수 선수 육성 시스템을 체계화했고, 최강 양궁 선수들의 실력에 첨단 혁신 기술까지 적용했다. 현대자동차그룹은 현대차·기아 연구개발센터를 중심으로 양궁협회와 협력했다. 미국 실리콘밸리의 최첨단 기술을 도입하는 것에도 망설이지 않았다.

세대별로 다양한 세계관 공존
스포츠뿐만 아니라 무역·금융·과학기술·문화예술·국제협력 등 각 분야에서 맹활약하는 한국인들에 대해 한 외국인 학자가 필자에게 말했다. “한국인은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강하다.” 국내뿐만 아니라 전 세계를 넘나들며 활동하는 한국인들은 강인하고 진취적이다. 하지만 한국인은 대체로 자신의 강점을 당당히 인정하는 데에 인색한 편이다. 인정하기 싫어도 인정해야 할 때가 있다. 그것이 다음 단계로 도약할 수 있는 새로운 기운과 용기를 주기도 하기 때문이다.

한국인들이 개항 이후 지난 150년 동안 이룬 성과는 세계사적으로 희유(稀有)하다. 고투와 열정의 결과이자 행운이다. 근대 국가 건설과 산업화·민주화라는 성취를 이룩한 한국은 이제 새로운 역사적 분수령을 맞고 있다. 한국은 안으로는 심각한 정치와 이념의 갈등, 인구 감소, 성장률 저하, 밖으로는 미국과 중국의 대립, 공급망 위험이라는 리스크를 직면하고 있다.

선진국 반열에서 탈락할 것인가, 아니면 세계 평화와 번영을 선도하는 국가로 한 발 더 도약할 것인가. 최근 서울대 국가미래전략원 소속 ‘글로벌 한국’ 연구진은 이런 절박한 문제의식 아래에서 ‘경제 번영을 위한 강대국 전략: 산업·문화·안보의 융합’이란 정책 보고서를 발간했다. 연구진은 우리 국민의 삶을 향상하며 경제·문화적 번영의 기회를 확대하기 위한 국가전략을 모색했다.

이 보고서 집필에 참여했던 과학기술정책연구원의 송치웅 박사는 다양한 세계관의 공존을 주목한다. 한국에서 대체로 70대 이상은 개발도상국, 50~60대는 중진국, 30~40대는 상위권 중진국, 10~20대는 모태 선진국의 세계관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다. 압축 고속 성장의 산물이기도 하다. 이 간극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복잡한 과거의 기억보다 건전한 미래 담론이 더 중요할 수 있다. 과거사보다 미래상이 국민의 힘과 뜻을 모으는데 용이하다. 인간 본성의 일면에는 공동체의 비전과 목표가 영감을 줄 경우 개인의 능력과 열정을 불태울 수 있는 자유 의지가 있기 때문이다.

폐쇄적 민족주의 모델은 안 돼
우리는 어떤 공동체를 만들어 다음 세대에게 물려주고 싶은가. 지금은 대한민국의 미래 비전에 대한 토론이 절실히 필요한 때다. 서울대 국가미래전략원 보고서는 폐쇄적 민족주의 국가모델이 아니라 ‘개방적 네트워크 국가’의 정체성을 지향하자고 제안한다. 또한 초강대국 미국과 중국의 시각에서 그 주변에 위치한 한국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지구적 네트워크의 중심에 자리 잡은 한국의 입장에서 국가전략을 모색할 것을 주장한다. 정부 주도가 아니라 민간 주도의 제조·물류·투자·연구·문화 생태계 건설을 강조한다. 즉 개방적인 환경과 제도를 통해 개인의 잠재력이 혁신과 창의성으로 발현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전략을 수립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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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체적으로 보고서는 미·중 간 첨단기술 경쟁과 공급망 리스크를 극복하기 위해 ‘다중 바큇살(Multiple Hub&Spoke)’ 생산기지론을 제시한다. 이를 통해 세계적인 기술 기업들이 한국에서 혁신적 산업을 개발하고, 글로벌 생산기지를 통해 안정적인 공급망을 구축하자는 것이다. 세계 각국의 혁신 기업들이 자유롭게 진입하고 창업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야 한다.

첨단 기술 인력의 유목민화, 세계적인 연구·개발(R&D) 연구소 설립, 지방정부 주도의 지역 혁신 거점화, 혁신 기술 기업에 대한 투자 자본(민간 재단) 확대 등의 정책도 필요하다. 한국을 기획·R&D·디자인·마케팅 혁신지대로 발전시켜 수레바퀴의 중심축으로 삼아 동남아·서남아·라틴아메리카·동아프리카·동유럽 등 7개 지역의 생산 허브(생산 거점)들과 미국·중국·러시아·일본의 4개 지역을 물류망을 통해 바큇살처럼 연결하자는 ‘7 허브 플러스 4’ 구상이다. 다중 바큇살 생산기지론은 한국이 기존 자유무역협정(FTA)을 넘어 글로벌 경제 혁신의 중심지로 자리매김하기 위한 전략이다. 이를 위해 한국 정부는 주요 글로벌 허브 국가들과 포괄적 동반자 협정을 체결하고 바큇살 형태의 방사형 생산지대를 공동 개발하며 경제적 번영을 공유하자는 것이다.

문화산업 장르·지역적 경계 넘어야
이와 더불어 ‘제조업+알파’ 전략의 일환으로 한국 주도의 대중문화 플랫폼 사업을 성장시켜 한국의 문화산업을 더욱 개방적으로 세계와 연결할 것을 제안한다. 핵심은 한국 및 한국인에 국한된 ‘K’ 문화가 아니라, 글로벌 각국 인재들을 활용해 장르·지역적 경계를 뛰어넘어야 한다는 점이다. 세계 문화에 대한 자유로운 수용과 개방성을 바탕으로 문화적 창조력을 발전시켜야 한다.

개방적 네트워크 대중문화 플랫폼을 통해 한국은 세계문화를 선도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국내 가요 차트와 드라마 대상 등에 동남아·동유럽·라틴아메리카 지역의 음악과 드라마 등을 포함하는 것을 고려해 볼 수 있다. 이를 통해 미국 빌보드 차트와 에미상 등과 유사한 한국 주도의 글로벌 차트와 시상식 행사도 구상할 수 있다.

그룹 뉴진스의 하니(왼쪽)와 다니엘이 7월 21일 열린 '2024 SBS 가요대전 서머 블루카펫'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하니는 호주-베트남 복수국적, 다니엘은 호주-한국 복수국적인 다국적 멤버이다. 뉴시스


또한 글로벌 혁신·생산 네트워크와 온·오프라인 대중문화 생태계를 한국 중심으로 구축하기 위해서는 안보적 위험을 최소화하는 전략이 필요하다. 안보적 위협으로 인해 한국의 해상 물류가 차질을 빚을 경우 한국의 손실은 막대할 것으로 예상한다. 보고서의 공동 집필자인 한국국방연구원의 이재준 박사는 양자적 차원에서는 한미 동맹의 역할 확대를, 다자적 차원에서는 한국 주도 해양 안보 협력체 설립을 강조한다. 이는 한국의 재정적 부담을 최소화하면서도, 해상교통로의 안전을 확보할 수 있는 방안이기 때문이다.

보고서는 인도·태평양 해양 안보 질서의 현상 유지를 위해 미국 해군 전력의 접근을 지원할 수 있는 정찰·호위·네트워크 등 방어적 군사 지원 체계를 마련하고, 한국의 조선 산업 역량을 활용한 함정 건조 및 정박·수리 지원 정책을 추진할 것을 제안했다. 또한 해양 교통로의 주요 길목에 위치한 국가들과 합동 해상 훈련을 주기적으로 실시함으로써 잠재적 위협 국가의 해상 통제 시도를 억지할 필요도 있다.

한국은 통상 국가로서 자유주의적 세계질서의 혜택을 누려왔다. 이제 한국은 공정하고 자유로운 세계질서라는 공공의 이익과 자국의 이익을 균형 있게 조화시킬 국가 전략을 모색해야 할 때이다. 한국은 보다 포괄적이고 계몽적인 국가 이익을 새롭게 정의해야 한다. 이러한 접근은 국제사회의 존중과 지지를 받을 수 있는 책임감 있는 강대국의 자세라고 할 수 있다.

미래의 한국은 강인한 힘과 포용적 사고를 겸비한 초일류 개방적 네트워크 강대국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러한 담대한 도전과 여정을 위해서는 글로벌 차원의 국가 대전략이 필요하다. 우리는 세계질서라는 큰 판을 읽고 새로운 판을 제시하는 지혜와 용기를 가져야 한다. “한국인은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강하다”는 말을 되새겨 본다.

손인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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