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민의 의약 포커스] 상표만 알고 약 성분은 몰라…처방전·약봉투에 잘 보이게 표기해야
코로나19 백신 접종이 한창이던 2021년 전국에서 타이레놀 품귀 현상이 일어났다. 당시 국내에 아세트아미노펜 단일성분 일반의약품이 타이레놀을 포함 70개나 있었다. 그러나 많은 국민은 코로나19 백신 접종 후 복용하는 해열진통제가 특정 회사 아세트아미노펜 약물의 상표인 타이레놀이라고 알고 있었다.
아세트아미노펜 약물이 필요한 국민이 타이레놀을 찾으러 약국을 전전하고 약을 구하지 못해서 백신 부작용을 그대로 감수해야 했다. 타이레놀이 없는 약국에 동일한 아세트아미노펜 약물이 있었는데도 말이다. 비유컨대 특정 생수 상표만 있다고 잘못 알고 있는 목마른 사람이 그 상표의 생수를 찾느라 다른 생수들이 있는 편의점에서 물을 구하지 못하는 것과 같았다.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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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같은 약’ 있는데 타이레놀 대란
성분 몰라 과다 복용·혼동 우려
WHO도 국제일반명 표기 권고
약품명, 성분 중심으로 붙여야
」
국민 상당수가 평생 복용하게 되는 고혈압약을 예로 들어 보자. 과연 약물이 ‘무엇’인지 아는 국민이 얼마나 될까. 고혈압 약물인 ‘암로디핀(amlodipine)’ 성분 약물을 식약처 사이트에서 검색하여 제품명을 보니 노바스크, 크라노스, 아모텐션, 스카드비 등 제약사가 작명한 다양한 상표가 대부분이다.
환자가 받는 처방전이나 약 봉투, 제품 포장에는 주로 상표가 눈에 잘 띄게 표시되어 있다. 환자는 약물의 실체인 암로디핀을 알지 못하고 상표가 다르면 다른 약물이라고 이해하게 된다. 타이레놀과 같은 아세트아미노펜 약물들을 눈앞에 두고 타이레놀을 찾으러 다닌 것과 같다. 환자가 자신의 약물 성분을 모르면 약물과 치료의 주체가 되기 어렵다.
이것은 환자 안전을 해할 수 있는 위험 요소이기도 하다. 관상동맥질환 치료제인 이소소르비드 성분 약물 중에 엘로톤이란 약이 있는데, 진해거담제인 에르도스테인 성분 약물로 옐로톤과 이름이 비슷한 엘로틴이 있다. 아르틴(고지혈증 약물)과 아모틴(위궤양 약물), 바스티난(협심증 약물)과 바스타틴(고지혈증 약물) 등 상표는 비슷하지만 성분은 완전히 다른 약이 많다.
성분 표시되면 약 구분 쉬워
우리나라와 같이 약물을 상표 중심으로 표시하면 처방, 조제, 투약 시 혼동과 오류가 발생할 위험이 커진다. 유해 물질이 발견돼 특정 성분 약물을 급히 회수해야 할 때도 대상 약물을 확인하기 어렵다. 의사나 약사도 수천 개의 상표를 다 알 수는 없고 바쁘게 많은 약물을 다루다 보면 유사한 이름에 혼동하여 처방이나 조제 시 실수할 위험이 있다. 환자가 남은 약물을 보관하고 있다가 자신이나 가족이 복용하는 경우가 있는데 유사한 이름의 약물로 착각하여 잘못 복용할 위험도 있다. 코로나19 백신을 접종하고 이미 아세트아미노펜 약물을 처방받았는데 별도로 구입한 타이레놀을 또 복용하여 과다 복용하는 경우도 생길 수 있다. 약물의 실체인 성분을 의사, 약사, 환자가 알기 쉽게 표시해야 하는 이유이다.
문제는 또 있다. 여러 질환이 있는 환자가 여러 의료기관에서 처방받다 보면 동일 성분 약물을 중복하여 처방받을 수 있다. 조제 시 약사가 복약 지도를 하지만, 약물의 성분을 알지 못하면 과다 복용할 위험이 있다. 또 복용하지 않은 약물은 아무 효용 없이 버려진다. 환자 주머니는 물론이고 국민이 함께 부담하는 건강보험 재정에서도 불필요한 지출이 발생한다. 약물 폐기 시 발생하는 비용이나 환경오염도 무시할 수 없다.
1953년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약물의 실체인 성분을 중심으로 표기하는 국제일반명(INN, International Nonproprietary Name)이 도입됐다. 흔히 새로 개발되는 약물을 오리지널약이라고 한다. 특허 만료 후 다른 제약사가 동일 성분으로 제조할 수 있는데 복제약이라 한다. 미국 등은 오리지널약은 상표를 쓰지만 복제약은 성분을 표시하는 국제일반명을 쓰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미국에서는 복제약을 일반명으로 표시하는 약물(generic named drug), 제네릭이라고 부른다. 1993년 세계보건기구(WHO)도 제네릭 의약품의 제품명에 국제일반명을 쓰도록 권고했다. 혼동을 야기할 수 있는 상표 대신 약물 성분을 알 수 있는 국제일반명이 눈에 잘 띄게 표시하도록 제도를 정비할 것을 권고했다. 미국·일본·영국·프랑스·스웨덴 등에서는 권고대로 국제일반명 중심의 표시가 이루어지고 있다.
미국·일본 등에선 국제일반명 사용
미국 식품의약국(FDA) 검색 사이트에 들어가서 암로디핀(amlodipine)으로 검색을 해보았다. 한국 식약처 사이트 검색 결과와 상반되게 거의 대부분 제품명이 amlodipine으로 시작한다.
우리나라는 의료기관(처방전)이나 약국(약 봉투), 제약회사(제품 포장)에서 제각기 표시하는데 많은 경우 상표를 가장 눈에 띄는 곳에 표시한다. 성분 이름을 표시하기도 하지만 표시 방법이나 기준이 서로 달라 실효성이 떨어진다. 이제 한국도 WHO 권고에 부합하게 처방전 약물 표시 제일 앞에 국제일반명을 표시해야 한다. 처방전이나 약 봉투, 제품 포장 등의 가장 눈에 띄는 자리에 암로디핀이나 아세트아미노펜과 같은 국제일반명을 넣어야 한다.
식약처는 2019년 의약품 국제일반명(INN) 도입을 위한 연구 진행을 공고했다. 하지만 의료계에서 국제일반명은 성분명 처방으로 가기 위한 포석이라며 반발했다. 성분명 처방은 의사가 지금처럼 특정 상표가 아닌 성분으로 처방하는 것이다. 의료계와 갈등이 커질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는지 식약처는 연구를 취소했다. 국제일반명 중심의 약물 이름 표시는 의사와 약사 집단이 대립하고 있는 성분명 처방과는 다른 문제이다. 국제일반명은 환자의 알 권리를 보장하여 약물과 치료의 주체가 되도록 돕고, 약물 처방·조제·투약 시 혼동과 오류 위험을 낮추고, 해롭거나 불필요한 약물 중복과 과소비를 감소시키기 위한 것이다.
박성민 변호사·서울대 약대, 의약품 정책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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