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향기] 희망의 푸른 천으로 짜여진 천성의 깃발
팔월 내내 찜통더위가 이어지는 동안 나는 자주 가까운 산을 찾아 들었다. 들판엔 논배미마다 벼 이삭이 패기 시작해 곁을 지나가면 벼 익는 냄새가 솔솔 나고 한가위도 머지않았지만, 폭염과 무더위는 도무지 꺾일 기미가 없었다. 산에 들어 계곡물에 발 담그고 앉아 있으면 잠시나마 더위를 잊을 수 있었다.
집에서는 책 읽는 것도 힘들어 산에 오를 때마다 배낭에 책을 넣어 갔다. 오늘 가져간 책은 월트 휘트먼의 『풀잎』이란 시집. 평소 애독하는 초록으로 가득한 시집인데, 읽고 있으면 내 마음도 계류의 싱그런 물소리처럼 찰랑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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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풀은 소중한 지구 생명의 원천
풀과 사람의 천성 다를 바 없어
약동하는 생명 품은 동질적 존재
」
서늘한 계곡의 바위에 자리를 잡고 앉아 시집을 열었더니, ‘풀’을 두고 시인이 어린아이와 정담을 나누는 시가 나온다. 한 아이가 두 손에 가득 풀을 들고 와 시인에게 “풀은 무엇인가요?”하고 묻는다. 시인은 아이의 느닷없는 질문에 풀이 무엇인지 알 수 없어 대답할 수 없었다고 고백한다. 그렇지만 시인은 이내 “그것은 필연 희망의 푸른 천으로 짜여진 나의 천성의 깃발일 것이라고 추측한다”고 노래한다. 이어서 “아니면, 그것은 신의 손수건이거나, 신이 일부러 떨어뜨린 향기 나는 기념 선물일 것”(‘나 자신의 노래 6’)이라고.
시를 낭송하고 나니 감동이 밀려와 무릎을 쳤다. 그래, 풀은 ‘희망의 푸른 천으로 짜여진 나의 천성의 깃발’이고 말고! 특히 ‘나의 천성의 깃발’이란 시구가 뭉클 가슴에 와 닿았다. 시인은 풀의 천성과 자신의 천성을 동일시하고 있다. 선천적으로 타고난 자신의 천성이 풀의 천성과 다르지 않다는 것. 모두가 하찮게 여기는 풀이 아닌가. 마구 베고 마구 짓밟고 제초제 같은 것을 뿌려 말려 죽이기도 하는 풀. 하지만 시인은 한 포기 풀조차 하늘이 선사한 거룩한 천성을 갈무리하고 있으며, 사람조차 그 풀과 다름없는 천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 소위 만물 평등의 사상이 스며 있는 정말 아름다운 시구가 아닌가.
“또한 나는 추측한다. 풀은 그 자체가 어린아이, 식물에서 나온 어린아이일 것이라고.” 풀 그 자체가 어린아이라는 건 무슨 말일까, 어린아이는 천진무구하고 생명이 약동하는 존재가 아닌가. 아무튼 시인이 풀을 어린아이에 비유한 건 풀과 인간은 약동하는 생명을 품은 동질적 존재라는 창조의 신비스러움을 표현하고자 한 것처럼 보인다.
나는 시집을 덮고 문득 주위를 둘러보았다. 계곡의 그늘에서 핀 풀과 꽃들 또한 나를 바라보고 있는 듯싶었다. 물봉선, 여뀌, 고마리, 억새풀, 싸리나무 등 폭염 중에도 시들지 않고 씩씩하게 살아 있는 풀들. 강렬한 색과 빛과 향기를 주위에 선사하고, 동물과 사람에게 먹거리로 자신을 내어주는 풀들. 흐르는 물속에 발목을 파묻고 우쑥담쑥 자라며 물을 맑게 하는 풀들.
이런 풀들의 말 없는 공덕을 모르는 이는 곧 가을이 와 사위어가는 풀들을 보며 죽었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조금만 깊이 생각해보면 풀들은 한 번도 죽은 적이 없다. 풀은 그 자체가 어린아이와 같아 잠시 사위었다가 봄이 되면 어린아이처럼 까불까불 명랑한 모습으로 살아나지 않던가. 시인 정현종 님은 이런 풀들을 두고 “우주란 무엇인가/풀을 들여다보는 일이여/열반이란 무엇인가/풀을 들여다보는 일이여/구원이란 무엇인가/풀을 들여다보는 일이여/…눈길 맑은 데 열리는 충일이여”(‘풀을 들여다보는 일이여’)라고 노래했다.
나는 산을 내려오며 계곡에 돋아난 고마리 군락을 보았다. 푸른 잎들 사이에 곱게 핀 담홍색 꽃무리. 난 걸음을 멈추고 고마리 꽃들을 한참 들여다보았다. 어린잎을 뜯어다 된장국을 끓여놓으면 쫄깃거리는 맛이 일품이고, 피부 미용에도 좋아 옆 지기가 좋아하는 풀. 나는 잎과 꽃을 몇 줌 뜯어 배낭에 담았다. 사람들은 거들떠보지도 않지만, 개울을 정화하는 일을 도맡아 하고 있으니 정말 고마운 풀이 아닐 수 없다.
이런 풀들을 보며 나는 휘트먼의 시가 더 깊이 스며들었다. 풀들이야말로 너와 나, 지구별을 살리는 희망의 푸른 천으로 짜여진 나의 천성의 깃발이라는 것. 전 지구적인 기후 재앙, 대규모 홍수와 산불, 식량 위기 같은 말들이 무섭게 범람하는 시절. 하지만 나는 믿는다. 물가에 자라는 저 흔하디흔한 풀과 나무들은 우리를 살리려는 만물의 어머니 지구 여신(Gaia)의 자비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라고. 그리고 우리가 아끼고 또 아껴야 할 소중한 지구 생명의 원천이라고.
고진하 시인·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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