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아이] 정치의 말들, 말들의 정치
문학이 말의 예술이라면, 정치는 말의 기술이다. 말을 다듬는 재주보다 말을 부리는 솜씨가 정치인의 성패를 가른다. 지난달 19일부터 나흘간 미국 시카고에서 열린 민주당 전당대회를 취재했다. 전대 현장은 정치 언어 기술자, ‘연설 천재’들로 반짝였다. 특히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 부부의 ‘정치 언어’는 청중들과 스미고 짜이면서 ‘문학 언어’의 경계마저 넘나들었다.
이를테면 국내 언론에 타이틀로 뽑힌 오바마 전 대통령의 “예스, 쉬 캔(Yes, she can)”은 실은 원고엔 없는 대목이었다. 맨 앞줄에 있던 청중이 먼저 오바마의 16년 전 구호 “예스, 위 캔(Yes, we can)”을 뒤틀어 “예스, 쉬 캔”이라고 외쳤고, 오바마가 그걸 받아주면서 대회장에 울려 퍼졌다. 미셸 오바마 여사의 “두 섬씽(Do something·뭐라도 하세요)!” 역시 청중과 같은 말을 반복해서 주고받는 리듬 속에서 그 의미가 더 깊숙이 각인됐다.
민주당 ‘스타 연사’들의 강렬한 정치 언어는 그 자체로 정치 행위로 읽히기도 했다. 정치의 말들이 세심하게 정교해지면 그 말들이 정치를 주도하기도 한다는 것. 미국 정당의 축제 현장에서 그런 생각을 떠올리고 있자니 어쩐지 착잡해졌다. 우선 저급한 우리 정치 언어가 떠올라서였기도 했지만, 더 중요하게는 그날 그곳에서 끝내 말해지지 않은 말들 때문이었다.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이 대선 후보 수락 연설을 하면서 언급한 ‘독재자 김정은’ 이름 한 토막을 제외하면, 나흘간 한반도 문제가 연사들의 입에 오른 건 없다. 민주당은 전당대회 기간에 아예 ‘북한 비핵화’ 목표를 삭제한 정강을 추인했다. 민주당 내부에서 한반도 문제가 후순위로 밀리고 있단 인상을 지우기 힘들다.
하지만 끝내 말해지지 않은 말들에 대한 우리 외교 당국의 대응은 너무 느슨해 보인다. 외교부나 주미 대사관 측은 민주당 정강에서 비핵화 목표가 삭제된 배경이나 이유를 명쾌하게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다만 “한미 양국의 북한 비핵화 의지는 확고하다”는 원칙만 재확인할 뿐이다.
정치 언어에선 말해지지 않는 것 또한 강력한 메시지다. 미국 유력 정당에서 한반도 문제가 후순위로 밀리고 있는 신호가 감지되고 있다면, 즉각 대응에 나서야 하지 않을까. 차라리 ‘연설 천재’ 미셸 여사의 이 간명한 명령문을 우리 외교 당국을 향한 다급한 메시지로 읽고 싶다. “뭐라도 하세요(Do something)!”
정강현 워싱턴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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