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의료가 숫자 때문에 망가지고 있다

안기종 2024. 9. 2. 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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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장] 책임지지 않은 대통령·전공의·국회, 환자와 가족들 울분... '필수의료 공백 방지법' 필요

[안기종 기자]

 의정 갈등 장기화로 응급실 파행 우려가 커지고 있는 30일 오후 서울 시내 한 대형병원 응급실 앞에서 의료관계자 및 환자가 이동하고 있다. 2024.8.30
ⓒ 연합뉴스
'2000'과 '0'이라는 숫자 2개 때문에 전공의 약 1만 명이 집단사직을 하고, 의료현장을 떠난 지 반년이 넘었다. 떠난 전공의 공백은 간호사와 의대교수·전문의가 메우고 있다. 당연히 업무 과중으로 사직하는 의료인이 늘어나고 있고, 그럴수록 의료 공백은 더 커지고 있다. 응급 환자가 치료받을 응급실을 찾지 못해 구급차 안에서 고통을 겪거나 사망하는 '응급실 뺑뺑이'는 다반사라 이젠 놀랍지도 않다.

책임지지 않은 대통령·전공의·국회

전공의 사직으로 항암치료나 수술 일정이 연기되었다가 제때 치료받지 못해 중증질환이 악화하거나 재발한 환자들의 울분은 하늘을 찌를 정도다. 이렇게 피해를 본 환자와 유족이 형사고소나 민사소송을 하고 싶어도 떠난 전공의가 아닌 병원에 남아 환자 곁을 지키며 치료해 준 의대교수·전문의와 간호사가 책임을 져야 하는 모순된 상황 때문에 울분만 삼키고 있다. 이것이 반년을 넘긴 의료공백 사태를 겪고 있는 대한민국 의료의 현주소다.

의료공백으로 발생한 환자의 불안과 피해에 대해 대통령·전공의·국회 그 누구도 책임을 지지 않고 있다. 여당인 국민의힘에서 전공의와 의사협회의 강력한 요구인 박민수 보건복지부 차관 교체를 대통령에게 건의할지 논의하고 있다는 언론 보도도 나오고 있다. 의료공백의 책임을 대통령도, 보건복지부 장관도 아니고, 차관에게 떠넘기는 행태는 억지스럽고 비겁하다. 국민의 눈에는 의대정원 2천 명 증원 정책을 잘못 추진한 대통령을 야당도 아닌 여당에서 공개적으로 면박하는 모습으로 보일 뿐이다.

최우선 입법과제 '필수의료 공백 방지법'

2020년 문재인 정부가 의대정원 증원과 공공의대 신설 정책을 추진했을 때도 전공의들이 집단행동을 했고 당시 의료공백으로 응급환자가 사망하는 사건도 발생했었다. 이때 환자단체는 국회에 응급실·중환자실·분만실 등과 같은 필수유지 의료행위는 정당한 사유가 없으면 공백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의료법 개정안(일명 '필수의료 공백 방지법') 발의를 요청했었다. 다행히 더불어민주당 최혜영 의원이 환자단체의 목소리를 반영한 의료법 개정안을 대표발의했다. 그러나 의료계의 반대로 21대 국회 임기만료로 결국 폐기되었다.
▲ 21대 국회에서 발의된 필수의료 공백 방지법  더불어민주당 최혜영 의원이 2020년 11월 13일 대표발의한 응급실·중환자실·분만실 등 필수유지 의료행위 공백 방지를 위한 의료법 개정안은 의료계의 반대로 21대 국회 임기만료로 폐기되었다.
ⓒ 국회 의안정보시스템
올해 2월에 시작된 전공의 집단사직으로 인한 의료공백은 21대 국회가 끝난 5월까지도 계속되었다. 180석이라는 절대다수 의석을 갖고 있던 더불어민주당이 21대 국회 마지막 임시국회에서 의료공백 사태의 심각성을 제대로 인식하고 '필수의료 공백 방지법'을 통과해야 했다. 그러나 더불어민주당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아픈 환자들이 6월 13일 국회 정문에 100여 명이 모여 기자들에게, 6월 18일 국회 본청에서 환자단체 대표들이 보건복지위원회 위원들에게, 7월 4일 보신각에 400여 명이 모여 국민에게, 국회가 신속히 '필수의료 공백 방지법'을 만들어 달라고 간곡히 요청했다. 그러나 22대 국회 임기가 시작한 지 3개월이 지났지만, 아직 어떤 국회의원도 '필수의료 공백 방지법'를 발의하지 않았다.
▲ 환자단체의 필수의료 공백 방지법 입법 목소리 환자와 환자단체는 국회 정문 앞 기자회견, 국회 보건복지위원 간담회, 보신각 집회를 통해 응급실·중환자실·분만실 등 필수유지 의료행위 공백 방지를 위한 의료법 개정을 국회에 강력히 요청했지만, 아직 국회에서는 응답이 없다.
ⓒ 한국환자단체연합회
만일 더불어민주당이 2020년 '필수의료 공백 방지법'을 통과시켰다면 2024년 전공의 집단사직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고, 지금과 같이 반년 넘게 환자가 불안과 피해를 겪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필수의료, 지역의료, 의료전달체계, 전공의 수련, 간병서비스를 개선하는 법률도 좋고, 간호법도 좋다. 그런데 환자들이 가장 시급히 원하는 법률은 의료인의 집단행동으로 중증질환자·희귀질환자와 응급환자가 제때 제대로 치료받지 못하는 불안과 피해에서 벗어나도록 하는 법률이고, 그것이 '필수의료 공백 방지법'이다.

필수의료·응급의료 공백, 해외는 다르다

현재 세계의사회 의장은 한국인이다. 올해 세계의사회 정기이사회도 전공의 집단사직으로 환자 피해가 극심했던 지난 4월 서울에서 개최되었다. 이사회에 참석했던 세계의사회 소속 해외 의사들은 당시 우리나라 정부의 일방적이고 강압적인 의대정원 2천 명 증원 정책 추진을 비난하는 목소리를 쏟아냈다. 그러나 전공의 집단사직으로 응급실·중환자실·분만실 치료가 필요한 환자가 제때 치료받지 못해 피해를 보거나 심지어 죽어가는 상황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는지 일절 언급이 없었다.

대한의사협회도 가입하고 있는 세계의사회는 2012년 총회에서 "집단행동을 하더라도 의사협회는 국민의 피해를 최소화하고, 필수의료나 응급의료 서비스와 치료가 지속해서 제공될 수 있도록 조치해야 한다"는 내용의 '의사 집단행동의 윤리적 의미에 대한 성명'을 채택했다.

해외의 어떤 의사들도 자신들의 파업이나 집단행동으로 응급실·중환자실·분만실 환자들이 제때 치료받지 못해 죽어가는 상황을 만들지는 않는다. 의사가 집단행동을 하더라도 의료공백으로 환자가 죽는 일은 절대 발생하면 안 된다고 말하는 의료계 원로는 거의 없고, "정부는 의사를 이기지 못한다"는 전 대한의사협회 회장의 말만 회자하는 상황이 대한민국 의료의 현실이다.

모든 환자와 국민은 의료공백의 책임자들을 지켜보고 있다

대한민국 의료가 숫자 때문에 미쳐가고 있다. 의대정원 증원 숫자 '2000'와 '0' 때문에 살기 위해 힘들게 투병하는 환자들을 낭떠러지 벼랑 끝에 세워놓고, 간신히 버티는 모습과 견디지 못하고 아래로 떨어져 죽는 모습을 생생하게 보면서도, 누가 먼저 백기를 들지 눈치만 살피는 윤석열 정부와 의료현장을 떠난 전공의들은 분명 이러한 의료공백 살인의 가해자이고, 입법으로 이러한 상황을 막을 수 있는데도 하지 않은 국회는 의료공백 살인의 방조자다.

이 모든 상황을 환자와 국민이 어금니 꽉 깨물고 지켜보고 있다. 미래에 누군가는 분명히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안기종 기자는 한국환자단체연합회 대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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