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선 장판에도 감물 염색…‘신통방통’ 8월 풋감 섬 환경엔 ‘딱’ [제주라이프]
“이거 한 번 해두면 얼마나 오래 쓰는지 몰라. 이 모자 20년 된 거잖아요.”
이종옥(71)씨는 잔디밭에 방금 막 염색한 옷가지들을 잘 펼쳐 널면서 말했다. 오래 전 제주에 놀러 왔다가 사간 모자인데 몇 번 세탁하니 금세 물이 빠져 아쉬워했었다고. 그러다 15년 전 제주에 이주한 뒤로는 몇 년에 한 번 모자에 물을 들여 지금까지 쓰고 있단다.
“감물 염색만 하면 색이 안 이쁘고, 쪽만 하면 천에 힘이 없거든. 그래서 난 둘 다 해서 써요. 지금 감물 들였으니까 이제 집에 가면 쪽물을 들여야지. 그러고 보니 제주에서 산모자 제주에서 염색하면서 쓰고 있네. 나 원 참(웃음).”
지난 25일 돌담이 둘러쳐진 애월읍의 한 밭에선 감물 염색이 한창이었다. 제주대학교에서 40명의 체험단이 참여해 천연 염색에 대한 교육을 받고, 2인 1조로 실습에 들어갔다. 이종옥 씨는 이날 아들과 함께 모자와 티셔츠, 바지 석 장을 들고 왔다. 감물을 들이면 옷감에 힘이 생기고 언제 입었냐는 듯 새 옷이 되기 때문에 손이 자주 가는 옷들은 여름철마다 직접 염색해 입는다.
함께 온 사람들도 고무 대야에 감물과 천을 넣고 열심히 주물러 댔다. 치대기 작업이다. 손바닥으로 힘껏 눌러야 감즙이 면이나 삼베 조직에 잘 스며든다. 감즙을 머금은 옷에서 하얀 거품이 올라오면 적당히 짜서 널면 된다. 햇볕에 말려지기 전까지 색의 변화가 적기 때문에 처음 염색하는 사람은 물이 잘 든 건지 의아해한다. 이날도 몇몇 참여객들은 불안한 눈으로 옆 대야를 살피기에 바빴다.
분주한 작업이 얼추 마무리됐다. 잔디밭에 널린 옷들은 대부분 오래 사용해 온 것들이었다. 얼룩진 티, 색이 바랜 앞치마, 낡은 작업복이 많았다. 천 마스크와 손가방도 있었다. 색이 진한 인견 이불은 이미 여러 번 감물을 들인 것이다. 사람들은 옷감의 일부를 묶거나, 구겨지게 널어 자기만의 개성을 표현했다. 이제 기다리는 일만 남았다. 이곳에서 1차로 말려진 옷은 각자 집으로 가져가 3~5일 정도 더 말리는 과정을 거친다. 햇빛에 말리는 시간이 길수록 색은 더 진해진다.
볕이 강해지는 초여름에 접어들면 제주에선 감물 천이 널린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가정에서도 그렇지만, 봄 축제장마다 부대행사로 염색 체험이 빠지지 않고 진행된다. 읍면지역에선 농업인을 대상으로 한 염색 기술교육이 정기적으로 이뤄진다.
서귀포농업기술센터는 매년 천연염색을 단일 테마로 한 축제를 열고 있다. 지난 3~4일 열린 올해 축제에는 800명이 현장 염색을 신청했다. 2만2000원만 내면 인견 이불을 감물 염색해 집에 가져갈 수 있으니 사람이 몰리지 않을 수 없다. 물건만 더 살 수 없냐는 문의도 잇따른다.
특히 올해는 제주에 연속 열대야 일수가 기상 관측 이후 최장기간 이어지는 등 맹더위가 나타나면서 여름나기를 위해 감물 천을 찾는 사람이 더 많아졌다.
과거 제주 사람들은 여름 장마가 끝나면 설익은 감을 따 으깬 뒤 그 즙으로 옷을 염색해 입었다. 감물을 들인 옷은 바람이 잘 통하고, 소취 기능이 있어 냄새가 잘 나지 않았다. 떫은맛을 내는 타닌(Tannin) 성분은 섬유와 결합하면 풀을 먹인 것처럼 옷을 질기고 빳빳하게 해준다. 덥고 습한 제주엔 제격이었다.
풋감은 8월에 딴다. 음력 7월 7일에 맞춰 땄다는 얘기도 있지만, 염색의 주성분인 타닌은 8월이 한창 깊어져야 많아진다. 제주에서 30년 이상 천연염색을 해 온 김순복 크로바전통한복 대표는 2일 “떫은 맛이 가장 강할 때가 8월 중하순이다. 올해는 하순에 감을 수확했다”고 말했다.
감물 염색은 많은 지역에서 이뤄졌다. 여러 문헌과 복식 출토품을 보면 중세에 이미 한국 일본 중국에 널리 퍼져 있었음이 확인된다. 일본의 경우 떫은 감즙을 뜻하는 ‘시삽(枾澁)’이 가옥의 외벽이나 판자, 천막, 우산 등에까지 방수와 방부제용으로 사용되는 등 중세 이후 서민 생활의 필수품으로 이용됐다. 그럼에도 오늘날 갈옷이 제주의 대표 문화로 상징되는 것은 여러 환경적 요인으로 제주도에 감물 염색 전통이 오래 지속됐기 때문이다.
가장 큰 이유는 흙이었다. 육지부의 흙(사질토)이 살살 털면 떨어지는 것과 달리, 제주의 흙은 화산 점질토로 한 번 옷에 묻으면 잘 지워지지 않았다. 밭에서 일을 해야 하는 제주 사람들에게는 여간 불편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감물을 들인 옷에는 흙이 잘 붙지 않고, 흙이 묻어도 티가 나지 않았다. 습한 여름에도 몸에 달라지 붙지 않으니 일을 할 때 매우 편했다.
척박한 환경도 지속 요인이 됐다. 조선시대 제주인들은 공물로 바치기 위한 말 생산과 감귤 재배, 해산물 채취로 의복 재료를 자급자족할 여력이 없었다.
제주 생활사 연구가 고광민씨에 따르면 당시 제주에서 목화가 재배된 곳은 서귀포시 예래동을 포함해 5곳밖에 되지 않았다. 1629년 출륙금지령이 내려지면서 200년간 옷감의 유통도 원활하지 못했다. 반면 감나무는 집집마다 있다고 할 정도로 많았다. 흔한 감으로 귀한 옷을 오래 입을 수 있었다.
제주 사람들은 조선시대와 일제강점기를 거쳐 1950년대까지도 갈옷을 즐겨 입었다. 당시엔 노동복으로 이용했다.
일본인 이즈미 세이치는 1930년대 제주를 기록한 ‘제주도’에서 갈옷을 갈적삼, 갈중이, 갈굴중이로 나눠 소개했다. 갈적삼은 감물을 들인 적삼이고, 갈중이는 감물을 들인 바지다. 갈굴중이는 여자 하의를 따로 부르던 이름이다. 양쪽 가랑이 사이에 천을 덧붙여 활용이 편리하게 만들었다. 굴중이는 표준어로는 단속곳, 속바지 위에 입는 중간 속옷을 나타낸다.
굴중이만 입고 다니면 가랑이가 벌어지는 것이 보였기 때문에 1920년대만 해도 제주 여성들은 굴중이 위에 겉치마를 입었다. 그런데 치마는 밭일할 때 매우 불편했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눈이 없을 때에만 굴중이만 입고 일을 했다.
이후 굴중이만 입고 일하는 경우가 많아지자 사람들은 굴중이에 감물염색을 하게 되었고, 색이 바뀌면서 점차 외출용 바지가 되었다. 제주 여성이 겉옷으로 착용한 최초의 바지인 셈이다. 굴중이는 이후 일제 강점기에 ‘몸뻬’라는 노동복이 나오면서 점차 밀려나게 된다.
감물은 갈옷 외에도 생활에서 폭넓게 이용됐다. 제주 사람들은 낚싯줄, 그물, 장판지, 돗자리, 창호지, 바구니(차롱)에도 감물을 들였다.
사람들은 그물이나 낚싯줄에 감물 염색을 하면 질겨질 뿐만 아니라, 색깔이 어두워 물고기들이 경계심을 늦출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담배를 넣는 담배쌈지에도 감물 염색을 했다. 장판에 감물을 들일 때에는 옷 염색과 달리 먼저 종이를 바닥에 깐 다음에 감물을 바르는 방법으로 사용했다. 구덕이나 차롱, 푸는 체 등에 감물을 사용할 때에는 주로 손상이 잘 되는 테두리 부분에 많이 했다. 헌 갈옷 천을 테두리에 붙이거나, 기존에 붙어 있는 천이나 종이 위에 감물을 들여서 보완했다.
가장 흔하게 썼던 곳은 옷감이다. 갈옷은 효용 가치가 탁월했다. 질기고 편해 실용적이고, 위생적이었다. 갈옷이 낡으면 아이 포대기, 기저귀 등으로 재활용하고, 걸레나 아궁이 불쏘시개로 마지막까지 허투루 버리는 법이 없었다.
최근에는 친환경성이 주목을 끌고 있다. 헌 옷을 재생해 사용함으로써 자원 낭비를 줄이고, 매염제와 염색조제를 전혀 쓰지 않기 때문에 염색 폐수가 발생하지 않기 때문이다. 청바지 한 벌을 생산하기 위해 면화 생산, 원사 염색, 워싱 등에 3000t이 넘는 물이 소비된다고 알려진 것과 비교하면 감물 염색이 얼마나 친환경적인지 짐작할 수 있다.
폭염이 증가하면서 잠옷이나 실내복, 이불, 베개, 방석 커버 등 피부에 닿는 천을 감물 염색해 사용하는 가정도 늘고 있다.
무엇보다 감물 염색이 지금도 활발히 일상에서 이용되는 건 간편성 덕분이다. 매염제가 필요없기 때문에 원액만 있으면 집에서도 간단히 할 수 있다. 시장에선 감즙 원액을 2리터에 2만원 정도에 구입할 수 있다.
색 조절도 어렵지 않다. 붉은색을 내는 감즙에 쑥이나 칡, 먹물 등 다른 천연 재료를 더하면 더 고운 색감을 낼 수 있다. 원액에 물을 많이 섞거나, 효소를 넣어 발효시킨 감물을 사용하면 연한 갈빛을 얻는다. 남은 원액은 냉동실에 얼려두었다가 쓰면 된다. 낡은 가방부터 지갑, 텀블러 백, 머리띠까지 감물 염색의 활용처는 그 효용만큼이나 무궁무진하다.
※이 기사는 제주특별자치도와 공동으로 기획했습니다.
제주=문정임 기자 moon1125@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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