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릴러 퀸 정유정의 첫 SF, "착한 소설은 앞으로도 안 쓸 것"
작가 정유정(58)은 2007년 데뷔부터 17년이 지난 지금까지 한 권의 산문집을 제외하고는 오로지 소설, 그것도 장편만을 써왔다. 영상·음악·소설 할 것 없이 모든 콘텐트가 짧아지는 시대에도 500쪽 넘는 무거운 장편을 꾸준히 냈고, 그 장편을 200만부 이상 팔았다.
그에게는 '페이지 터너'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예측 불허의 인물들이 힘 겨루기하는 가운데, 사건에 사건이 거듭되고 이야기는 폭주하는 기관차처럼 결말을 향해 달린다.
신작 장편 『영원한 천국』(은행나무)은 정유정의 전매특허 스릴러에 SF를 섞었다. 인간이 자신의 뇌를 통째로 가상 공간에 업로드할 수 있는 시대, 육신이 죽어도 정신은 영생을 누리는 시대를 그렸다.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가상 극장 '드림시어터'를 설계하는 해상이 노숙인 보호시설 삼애원의 보안요원으로 일하는 경주로부터 기이한 의뢰를 받으며 이야기가 시작된다.
"첫 SF를 쓰기 위해 1년간 글을 쓰지 않고 과학책만 읽었다"는 정유정을 지난달 27일 서울 마포구 은행나무 사옥에서 만났다. 다음은 일문일답.
Q : SF는 처음이다. 어쩌다 관심을 갖게 됐나.
A : 유발 하라리의 『호모데우스』에서 영향을 받았다. 하라리는 이 책에서 데이터가 곧 종교가 될 것이라고 예측한다. 인간조차도 무수한 데이터 중 하나로 전락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의식을 통째로 온라인에 업로드해 육체 없이도 영생을 누리는 세상에 '영원한 천국'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그 속에서 일어나는 일을 소설로 쓰기로 했다.
Q : 기존 장르와 달라 힘들지 않았나.
A : 공부하는 데만 꼬박 1년을 썼다. 준비 기간을 이렇게 오래 가진 것은 처음이다. 유발 하라리와 신경과학자 안토니오 다마지오의 책을 많이 읽었다.
Q : 이번 소설도 산 넘어 산이다. 주인공 경주는 뭐 하나 쉽게 풀리는 일이 없다.
A : 쉽게 풀리면 재미가 없지 않나. 내 자신도 잔잔한 얘기를 싫어한다. 타고난 기질인 것 같다. 음악도 헤비메탈을 좋아하는 걸 보면.
Q : 책을 읽으면서 '정유정 소설인데 왜 여태껏 변사체가 안 나오지' 의아했다.
A : 그 때쯤 딱 변사체가 나오지 않나. 기승전결이 뚜렷한 이야기를 좋아한다. 적재적소에 갈등과 고난이 있고, 그걸 이겨내고 성장하는 주인공이 있는 이야기. 스티븐 킹처럼 쓰고 싶다.
Q : 요즘 사람들이 좋아하는 '힐링 독서'와는 다소 동떨어진 방향 아닌가.
A : 그런 글을 쓰는 재주는 없다. (웃음) 힘이 없다는 걸 전라도 사투리로 '히마리 없다'고 하는데, 나는 '히마리 없는' 캐릭터를 안 좋아한다. 답답해서다. 죽더라도 화끈하게 죽어야지. 어떤 작가들은 글에 자기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고 하는데, 나는 반대다. '생긴 대로 쓴다'고 할까. 앞으로도 착한 소설은 안 쓸 거다.
Q : '악의 삼부작'도 작가 자신과 닮아있나. (『7년의 밤』,『28』,『종의 기원』은 '악의 삼부작'이라 불린다. 전염병이 돌고 살인 사건이 벌어지는 가운데 인간 내면의 악을 들여다보는 다소 어두운 이야기다.)
A : 일부는 그렇다. 내 책의 중요한 캐릭터는 전부 내 속에서 끄집어냈다. 악인 캐릭터도 하늘에서 떨어진 게 아니다. 누구나 악한 면과 착한 면이 있는데 그중 전자를 끄집어내서 '악의 삼부작'을 썼다.
Q : 이번 소설은 그에 비하면 '힐링'이다.
A : 평생 '악의 삼부작'만 쓸 수는 없으니까. (웃음) 너무 피폐해진다. 다른 소설도 마찬가지지만, 이번에도 경주가 끝내 살아가는 이야기다. 어떤 의미에서는 성장 소설이라고도 볼 수 있다.
Q : 주인공 경주는 어떤 사람인가.
A : 시니컬하고 찌질한 사람. 그렇지만 느닷없이 들이닥친 불행을 기어코 이겨내려는 욕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이런 캐릭터여야 성장의 전후 차가 크다. 작가들이 좋아할 수밖에 없는 캐릭터다.
Q : 경주가 성장하는 모습은 숭고하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그럼에도 살아가는 것이 성장이구나 하는 생각도 들고.
A : 어떤 직업을 갖는 것, 부를 쌓는 것만이 성장은 아니니까. 견디고 맞서는 인간의 모습을 그리고 싶었다. 인간이 그런 야수성을 간직하는 건 미덕이다.
Q : 취재 여행은 언제 다녀왔나.
A : 초고를 쓰고 캐릭터를 구체화해야 하는데, 경주가 일하는 노숙인 보호시설 삼애원이 머릿속에 잘 그려지지 않았다. 유빙에 둘러싸인 천애고원을 보고 싶어 일본 홋카이도에 다녀왔다. 구체적인 그림이 있어야 캐릭터가 살아날 것 같아서.
Q : 경주의 삶을 상징하는 것이 유빙인가.
A : 맞다. 경주하면 동토, 빙원 그런 곳들이 떠올랐다. 내면이 얼어붙어 있고 다른 사람에게 정을 안 주니까. 오로지 생존에만 매달렸던 사람이기 때문에 인생이 꽃핀 적이 없다. 그래서 삼애원을 유빙에 둘러싸인 곳으로 그렸다.
Q : 등단 17년 차다. 앞으로 어떤 소설을 쓰고 싶나.
A : 온갖 감정적 격랑에 휘말리면서 밤을 새웠다가 터질 것 같은 가슴으로 새벽을 맞이하게 하는 이야기. 그런 이야기를 쓰면 원이 없겠다. 나한테는 소설『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1962, 켄 키시)가 그런 이야기였다.
Q : 글이 막힐 때는.
A : 글은 원래 막히는 거다. (웃음) 마른 빨래를 쥐어 짜듯 겨우 겨우 쓴다. 일필휘지하는 재능은 없다. 시간 싸움이고 버티는 싸움이라고 생각한다. 버티려고 운동도 한다.
Q : 운동은 얼마나 하나.
A : 근력 운동은 20년 됐다. 체육관에서 가장 힘 세다는 소리도 듣는다. 일주일에 여섯 번 뛰는데 그중 두 번 정도는 집앞 천변을 따라 10㎞를 뛴다. 풀 마라톤과 트레일러닝에 도전하고 싶다.
홍지유 기자 hong.jiy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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