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화분에 물을 줘라" 유언 남긴 학자

이재우 2024. 9. 2. 1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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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선비의 유언 시리즈 2화] 이름도, 벼슬도 적지 말라고 했던 퇴계 이황

조선 선비들의 유언을 통해 삶의 지혜와 통찰을 배워보고자 한다. 의로운, 이상적인, 유유자적한, 때론 청빈한 선비들의 유언은 유언에 그치지 않고, 후대 사람들에게는 세상을 살아가는 지침과 삶의 방향을 잡아주는 나침반이 되기도 한다. <기자말>

[이재우 기자]

 경북 안동시 도산면 건지산 기슭의 퇴계 이황 묘소. 언뜻 봐도 소박한 느낌을 준다. (올해 3월 2일 방문 때 촬영)
ⓒ 이재우
"나라에서 내리는 예장(禮葬)을 사양하여라. 그리고 비석을 세우지 마라. 다만, 조그마한 돌을 쓰되, 앞면에 '퇴도만은 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라고만 쓰도록 하여라."

조선 최고의 도학자 퇴계 이황(1501~1570)은 생을 마감하기 나흘 전인 1570년 12월 8일, 조카에게 이런 유계(遺戒)를 받아 쓰도록 했다. 예장을 사양하라고 한 건 장례식을 호화롭게 하지 말라는 경계의 당부였다. 그렇다고 비석까지 세우지 말라는 건 선뜻 이해하기 어렵다.

그런 퇴계의 묘소(경북 안동시 도산면 건지산 기슭)에 처음 갔을 때 적잖이 놀랐다. 최근인 올해 3월 2일 방문했을 때도 그런 느낌은 여전했다. 묘비엔 죽은 사람의 이름도, 벼슬도 없었다. 퇴계의 말대로, 도산으로 물러나 만년을 보낸 진성이씨의 묘라는 뜻의 '퇴도만은 진성이공지묘'만 적혀 있다.
 퇴계의 무덤 빗돌엔 도산으로 물러나 만년을 보낸 진성이씨의 묘라는 뜻의 ‘퇴도만은 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만 적혀 있다. (올해 3월 2일 방문 때 촬영)
ⓒ 이재우
사후 영의정으로 추증되었지만, 무덤은 소박하기 그지없다. 퇴계는 스스로도 "비석을 크게 세우면 세상의 웃음거리를 살 것"이라고 우려했다. 퇴계학연구원은 <퇴계, 그는 누구인가>(펴낸 곳 글읽는들)라는 책에서 이황의 묘소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제자인 고봉 기대승 등 후인들은 대형의 석재를 구하여 생전에 받은 관작(官爵)과 직위를 호화찬란하게 써놓을 것이 분명하다. 퇴계는 그런 속된 현상을 피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래서 '인간 아무개 여기에 묻혔다'는 식의 표시만으로 만족한다는 뜻을 유계로 남겼다고 보인다.

'퇴도만은(退陶晩隱)', 이 네 글자는 자연에 살고 싶었던 퇴계의 삶을 함축한다고 볼 수 있다. 퇴계 묘소를 둘러보면서 놀란 건 이뿐 아니다. 묘소 가까이에 며느리 봉화 금씨(퇴계 맏아들 이준의 아내)의 묘가 있어서다. 이 산엔 퇴계와 며느리 묘만 있을 뿐이다. 아들도 아닌 며느리 묘가 왜 여기 있을까?
 퇴계 묘소 올라가는 길. 가까운 거리에 며느리 봉화 금씨 묘가 있다. (올해 3월 2일 방문 때 촬영)
ⓒ 이재우
퇴계는 생전에 며느리 봉화 금씨를 무척 아꼈고, 병이 났을 때도 세심하게 신경을 썼다고 한다. 그런 고마움에 며느리는 "내가 죽으면 시아버지의 묘 곁에 꼭 묻어달라"고 유언했다고 전해진다.

퇴계 집안 여성들의 대단함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퇴계의 손자며느리인 권씨 부인 역시 남달랐다(권씨 부인은 퇴계의 맏손자 이안도의 아내다). 퇴계가 맏손자 이안도에게 보낸 편지를 묶은 <안도에게 보낸다>(정석태 옮김, 펴낸 곳 들녘)라는 책에 이런 대목이 있다.

권씨 부인은 임진왜란 중에 퇴계가 남긴 글과 전적(典籍), 그리고 퇴계의 유품 등을 청량산 축육봉 아래에 잘 갈무리해서 후세에 전할 수 있게 되었다. 후일 퇴계의 자손들은 그 장소를 '생이골(生李洞)', 곧 '이씨를 살린 골짜기'라고 이름 지었다.
 안동 퇴계 고택의 솟을대문에 퇴계의 손자며느리 권씨 부인을 기리는 정려패(旌閭牌: 대문 위쪽)가 보인다. (올해 3월 2일 방문 때 촬영)
ⓒ 이재우
권씨 부인이 아니었다면 아마도 퇴계의 많은 흔적들이 전쟁을 겪으면서 사라졌을지 모르는 일이다. 필자는 2021년 4월 18일 경북 봉화 청량산 산행을 갔었는데, 청량사 찻집에 앉아 권씨 부인을 떠올려 보았던 기억이 있다.

퇴계 종가가 계속 이어지게 된 것도 권씨 부인 덕이라고 한다. 맏손자 이안도에겐 대를 이어 아들이 태어났지만, 권씨 부인의 젖이 부족해 죽고 말았다. 그런 권씨 부인은 남편의 동생인 이영도의 아들로 하여금 대를 잇게 했다.

안타까운 사연도 있다. "권씨 부인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다 마쳤다고 판단하고 자결했다. 사후 나라에서는 정려문을 내려 권씨 부인을 표창했다"는 것이다. (같은 책 인용) 퇴계 종택에서 그 정려문을 볼 때마다 마음이 숙연해지곤 했다.
 주희(주자학 집대성자)의 글에서 따온 도산서원의 완락재(玩樂齋) 모습. (2021년 4월 18일 방문 때 촬영)
ⓒ 이재우
봉화 청량산에서 15킬로미터 가량 떨어진 안동 도산서원은 여러 차례 갔었는데, 필자는 완락재(玩樂齋)를 빠지지 않고 들렀다. 완락재는 퇴계의 마음가짐을 가장 잘 대변한 장소의 이름이 아닐까 싶다.

퇴계는 "즐기고 완미하면 죽을 때까지 싫증 나지 않을 것(樂而玩之 固足以終吾身而不厭)"이라는 주희(주자학 집대성자)의 말에서 완락재라는 이름을 따왔다. 완락재의 의미에서 알 수 있듯이, 퇴계의 삶과 철학은 모두 '즐거움'에서 비롯됐다.

누구보다 학문을 즐겼고, 반상을 가리지 않고 제자 가르치기를 즐겼으며(공식적인 제자만 368명에, 대장장이 제자까지 있었다), '우리 집안의 산(吾家山)'이라던 청량산을 즐겨 찾았고, 그리고 특히 매화를 무척 즐겼던 퇴계였다.

퇴계의 매화 사랑은 유별났다. 젊은 시절부터 노년기까지, 심지어 임종 순간에도 매화를 아끼고 즐겼다. 퇴계는 '매치(梅癡) 중의 매치'였다. 조선의 선비들은 매화에 빠진 스스로를 매치(梅癡: 매화에 미친 사람)라고 불렀다. 그도 그럴 것이 퇴계가 평생 남긴 매화시는 72제(題) 107수에 이른다. 그중에서 62제 91수를 뽑아 묶은 것이 <매화시첩(梅花詩帖)>이다.

매화시만 따로 떼어내 문집을 만들었으니 매화 사랑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그런 퇴계는 매화를 높여서 매선(梅仙), 매형(梅兄)이라 표현했다. 퇴계는 중국 북송 시대의 사람 임포(林逋)를 흠모했다.
 퇴계 이황을 기리기 위해 선조 7년인 1574년 지어진 도산서원. 서원의 본당을 둘러보는 관람객들. (2021년 4월 18일 방문 때 촬영)
ⓒ 이재우
매화시의 절창(絶唱)으로 평가받는 산원소매(山園小梅)를 지은 임포는 벼슬을 마다하고 평생 독신으로 살았는데 매화를 아내로, 학을 자식으로 삼았다고 한다. 매처학자(梅妻鶴子)라는 말이 생긴 이유다.

퇴계의 매화시에도 임포가 자주 등장한다. 예를 들면 '나는 포옹이 환골탈태한 신선(我是逋翁換骨仙)'이라는 구절이 있다. 포옹(逋翁)은 임포를 말한다. 퇴계는 임포와 자신을 동일시했던 것이다. 퇴계의 매화시 절창으로는 6수로 구성된 '도산의 달밤에 매화를 읊다(陶山月夜詠梅)'라는 시가 압권인데, 그중에 세 번째가 필자에게 가장 와닿는다.

마당을 거닐으니 달이 사람을 좇아오고(步屧中庭月趁人)
매화 곁을 돌고 돌아 몇 번이나 돌았던가(梅邊行遶幾回巡)
밤이 깊도록 오래앉아 일어날 줄 모르니(夜深坐久渾忘起)
향기는 옷깃에 가득하고 꽃 그림자는 몸에 가득하네(香滿衣巾影滿身)
<퇴계 매화시첩 (기태완 역주, 펴낸 곳 보고사) 참고>

퇴계의 매화시는 유독 감정이입이 깊어 보인다. 퇴계는 겨울 추위에 매화가 손상되자 그 안타까움을 시로 적었는데 '겨울 신은 어찌하여 내 매화에 재앙을 입혔는가(冥頊胡爲我梅厄)'라는 구절이 나온다. 하늘을 원망하며 재앙(厄)이라는 단어까지 동원했다.

한가로운 노인의 일상을 보여주는 재미난 표현도 있다. '수염을 꼬며 종일 외롭게 읊조리며 감상하네(撚鬚終日孤吟賞)'라는 구절이다. 수염을 꼬면서 매화와 노니는 퇴계의 모습을 한번 상상해 보시라.

퇴계는 서울의 임시 거처에 있을 때 분매(盆梅: 화분에 심어 기르는 매화)와 서로 대화하는 형식의 문답을 주고받기도 했다. 퇴계가 '고향으로 돌아갈 때 그대와 함께 가지 못함이 한스러운데(東行恨未携君去)/ 서울의 먼지 속에 고움을 간직해다오(京洛塵中好艶藏)'라고 말하자, 매화는 '공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천향을 피우리라(待公歸去發天香)'고 화답했다.

퇴계가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인 안동으로 내려가면서 분매를 가지고 가지 못하는 아쉬움을 대화로 풀어나간 것이다. 마치 가까운 벗과 이야기를 나누는 모양새 같지 않은가? 그랬다. 퇴계에게 매화는 단순한 감상의 대상이 아닌 벗이자 연인에 가까웠다.
 경북 봉화 청량산 자락의 청량사 찻집. 퇴계는 평생 동안 청량산을 즐겨 찾았는데, 필자는 이 찻집에서 가끔 퇴계의 삶을 그려 보곤 했다. (2021년 4월 18일 방문 때 촬영)
ⓒ 이재우
그런 애정의 대상을 두고 죽음을 맞는 퇴계의 심정은 어땠을까? 1570년 12월 8일 세상을 떠나면서 퇴계는 제자에게 "매화분에 물을 줘라"는 말을 남겼다. 앞서 임종 닷새 전인 12월 3일 퇴계는 이질로 설사를 했다고 한다. 분매가 옆에 있었는데, 다른 곳으로 옮기게 했다. "매형(梅兄)에게 불결하면 내 마음이 편안하지 못하다"는 이유였다고 한다.

깔끔하고 고고한 퇴계의 품성으로 볼 때, 자신의 추한 모습을 매화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던 심정을 이해하고도 남는다. 퇴계의 임종을 지킨 제자 이덕홍은 <계산기선록(溪山記善錄)>에서 스승의 임종 그날을 이렇게 적고 있다.

12월 8일 아침에 매화분에 물을 주라고 하셨다. 이날 날씨는 맑았다. 그런데 오후 5시가 되자 갑자기 흰 구름이 지붕 위로 모여들고 눈이 내렸다. 잠시 뒤에 선생은 누운 자리에서 부축을 받고 일어나 앉아서 돌아가셨다. 그러자 구름은 흩어지고 눈은 그쳤다.

'물을 주라'고 한 매화 화분은 퇴계가 서울에 두고 왔던 그 매화였다. 서울에 갔던 제자가 말년의 퇴계에게 보내주었는데 퇴계의 마지막 가는 길을 그 매화가 배웅한 것이다.

퇴계가 만약 매화가 피지 않는 계절에 생을 마감했다면? 아마도 퇴계의 마지막은 몹시 삭막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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