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서 돼지 키우는 주민까지…생존을 위한 시장화 [곽인옥 교수의 평양 시장경제 리포트]

곽인옥 2024. 9. 2. 1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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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1994년 김일성 사망 이후 고난의 행군 시기에 수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는 처참한 상황에 처했다. 죽음의 공포에 휩싸인 주민들은 국가 주도의 계획 경제에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목숨을 이어갈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했다. 그렇게 북한에 자생적인 시장 경제가 싹트기 시작했다. 장마당과 상점, 고급 식당이 우후죽순 생겨나고, 돈을 굴리는 돈주(錢主)는 부를 축적하고, 새로운 형태의 뇌물 구조가 뿌리내렸다. 국제사회의 엄격한 경제제재를 받는 북한 경제를 움직이는 것은 사회주의 사상도 계획 경제도 아니고, 자생적인 시장경제다. 그러나 대다수 북한 주민은 여전히 살벌한 독재 체제의 굴레와 속박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힘겨운 생활을 하고 있다. 필자는 북한의 심장으로 불리는 평양의 경제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10년간 조사를 해왔다. 탈북자 100여명을 상대로 장기간 심층면접을 하고, 각종 자료 수집을 통해 평양의 시장경제 작동 시스템을 분석했다. 폐쇄적인 북한 내부를 자세히 연구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북한의 통계자료와 탈북자들의 증언 역시 어느 정도 신뢰성이 있는지 의문이다. 이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조사한 북한 사회와 경제의 현실을 공유함으로써 북한 주민들이 처한 현실과 고통을 함께 느끼고 새롭게 다가올 한반도의 미래를 고민해 보자는 취지에서 연재를 시작한다.

북한 경제는 오랫동안 계획경제 체제를 유지해 왔지만, 199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자발적 시장화는 주민들의 생존을 위한 필수 변화로 자리 잡았다. 시장화는 국경 지역에서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시장화의 시작, 국경 지역에서 전국으로

량강도 혜산시에 살았던 J씨는 1980년대 말 중국 장춘시에 있는 친척 집을 방문하고 계획경제 하에서 골목길 주택에서 창을 내고 물건을 팔다가, 단속이 나오면 일제히 문을 닫는 모습을 목격했다. 그 후 1990년대 초에 다시 한번 중국 친척 집을 방문하고 깜짝 놀랐다고 한다. 

2~3년이 지난 상황에서 중국은 개혁개방을 통해 시장경제를 받아들이면서 각양각색의 좋은 상품들이 시장에 넘쳐났다. 도로가 포장되고, 가로등이 생기면서 상전벽해(桑田碧海)가 따로 없는 상황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때부터 예쁜 아기 옷을 가져다가 북한에 장사를 했다고 한다.

시장경제를 경험한 중국 조선족들은 사사(私事) 여행자로 북·중 국경 지역에 있는 혜산시, 무산시, 온성시에 들어와 장사를 했다. 특히 함경북도 회령시에는 상품이 화려하고, 상품들이 넘쳐나는 ‘홍콩시장’이라고 불리는 시장이 유명했다.

북한에서 고난의 행군시기(1995~1999)에 국가 배급시스템이 마비되면서 노동자, 하급 관료, 교수, 교사 등, 고지식한 사람들은 새로운 삶의 방식에 적응하지 못하고 굶어 죽었다. 배고픔을 견디지 못한 사람들 고향을 버리고 탈북했다. 하지만 국가를 의지하지 않고 주민들 스스로 삶을 개척하여 새로운 삶의 방식을 찾게 됐는데, 바로 생존을 위한 자발적 시장화이다. 이런 시장화는 국경 지역에서 시작해 내륙까지 전역으로 확대됐다.

이 시기에 함경북도 회령시는 시 전체가 하나의 큰 시장이 됐다. 회령시의 모든 골목과 사람이 모이는 장소는 다 시장이 됐으며, 장사 밑천이 없는 사람은 집에 있는 물건을 팔아 장사를 시작했다. 농촌 사람들은 옥수수나 감자를 가져다가 텔레비전을 구입했다. 여기에 신발이나 옷, 이불, 가구를 내다 팔고 식량을 구입하는 사람들과 저녁 늦게까지 불을 밝히고 음식과 술을 파는 사람들, 손수레로 물건을 나르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회령시 강변 공터에서는 자연스럽게 장마당이 생겼다.

중국과 국경 지역에 있는 신의주, 혜산시, 회령시에서는 모자라는 식량(쌀, 밀가루)과 생활필수품을 대량으로 수입하여 북한내륙으로 중계하는 도매상인들이 몰려들었다. 이 시기에는 국경 지역에 위치한 도시들이 물류 유통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철도교통의 중심지로서 평성은 평양시로 들어가는 관문으로 수도의 보조역할을 하면서 전국적인 도매지로 형성됐다. 이곳에서 밀가루로 튀겨낸 가공품 ‘벽돌과자’가 유명해지면서 의류, 신발, 봉학 소주, 맥주, 껌 등을 만드는 가내수공업이 활발하게 발달했다.


평양 지역도 예외가 될 수는 없었다. 농민 시장이 있던 칠골, 락랑, 봉학, 동대원, 력포, 룡흥, 하당 농민 시장이 폭발적으로 커졌다. 새벽에는 농촌지역의 농산물과 도시지역의 공산품이 교환되는 대규모 새벽 도매시장이 탄생했다. 평양 시민들이 직장 출·퇴근 시 이용한 버스 정류장이나 삼거리에는 메뚜기 시장이 자리 잡았다. 평양시 각 구역의 동마다 두 개의 골목시장이 생겨났다. 전국의 무질서한 시장을 정리하기 위해서 김정일의 명령으로 1998년 시장을 국가 차원에서 건설했다. 이후 2002년 7월1조치와 2003년 종합시장제도를 계획경제 안에서 받아들이게 됐다.

북한 주민들의 생존을 위한 다양한 전략

시장이라는 공간은 북한 주민들에게 식량 및 생활필수품이 집결되고 소비자에게 제공되는 역할을 하고 있다. 북한 주민들은 생존을 위해 시장과 결부된 다양한 경제 활동을 시작했다.


첫째, 가내수공업이 활성화됐다. 개인 주택은 주거 공간을 뛰어넘어 생산 활동의 공간으로 변모됐다. 북한 시장화의 근원지인 장마당을 중심으로 인근 주택지의 토지이용과 용도가 변화됐다. 개인 주택은 주민들에게 주거 생활의 공간이자 가족의 공간으로 사적공간이었지만, 시장화가 왕성해지기 시작하면서 생산 활동공간으로 변화되고 있다. 신발이나 의류 공장 기업소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이 개인 주택에서 가내수공업을 시작하게 됐다. 

신발, 의류, 가구, 음식 등 다양한 제품들이 가내수공업을 통해 생산됐다. 특히 평성에서는 의류와 신발이 전문적으로 만들어져 유통됐다. 평성시 은정구역에 있는 이과대학 및 과학원 과학자들의 도움을 받아 컴퓨터를 사용하여 고급 의류를 생산하기도 하는데 이는 남한의 드라마나 영화를 보고 직접 디자인하여 신상품으로 판매하여 유행을 선도하기도 한다.


둘째, 소토지와 텃밭 경작이 일반화됐다. 회령시에서 20km 떨어진 곳에서 산에다 불을 지르고 화전 농업으로 소토지를 개간했다. 대개 한 가구에서 300평 정도 경작을 하였는데 국가에서는 배급을 공급해 주지 못한 상황에서 암묵적으로 소토지 경작을 인정하면서 일반화됐다.

소토지에서는 옥수수, 조, 콩, 수수, 고구마, 감자 등 북한 주민들에게 꼭 필요 식량 공급원이 됐다. 또한 농촌 주택에서는 20~30평의 텃밭을 경작하는데 좁은 면적이지만 협동농장과 비교해 볼 때 수십 배의 소출이 더 난다고 한다. 평양시 락랑구역 두루섬에서는 텃밭에 비닐하우스를 씌어 고추, 오이, 토마토, 참외, 수박, 상추, 쑥갓 등 채소를 좀 더 일찍 수확할 수 있어서 농가 소득을 올리고 있다고 한다.


셋째, 돼지와 닭을 기르는 가축 사육도 중요한 생존 전략이다. 술이나 두부를 가내수공업을 하는 집에서는 제품을 만든 후 남은 부산물로 돼지를 기르는 사람들이 많다. 북한에서는 인민군대 지원을 위해서 돼지를 공급한다든지 시장에 돼지고기를 팔아서 목돈을 챙길 수가 있기 때문에 대부분 사람은 돼지를 기른다. 심지어 평양시 주변부 아파트에서는 세면장을 활용해 돼지를 기르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또 북한에서는 계란이 매우 비싼 식품 중 하나다. 그래서 농촌뿐만 아니라 평양시 아파트 베란다를 이용하여 닭을 키워서 계란을 생산하고 있다. 인민반장의 보호 아래 아파트에서 한 방을 활용해 대량으로 닭을 사육해 계란을 얻는다.

넷째, 중국산 공업품과 식료품의 유통이 활발하다. 중국 상품은 주로 조선족 및 화교 그리고 외화벌이 회사를 통하여 중국으로부터 식량 및 생활필수품이 유통된다. 유통 루트는 단둥-신의주 루트가 80%이고, 훈춘-나진선봉 루트가 20%, 나머지는 밀수다. 이러한 물품들이 도매소매를 거치면서 소비자에게 전달된다. 북한에서는 이런 말이 있다. ‘도매 한 사람이 북한 사람 10명을 먹여 살린다.’

마지막으로, 가내 서비스업이 등장했다. 개인 주택이나 아파트 창고를 개조하여 매대(구멍가게)나 선술집을 만들어 서비스업을 하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한국의 24시 편의점이나 구멍가게와 같은 역할을 한다. 

평양역 뒤쪽의 평천구역이나 평성시의 역전동에서는 숙박(여관)을 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전국 도매 지역인 평성시로 도매 장사를 하려고 오는 상인들이 숙소로 사용하거나 평양시로 업무를 보러 오는 공무원들이 주로 사용하고 있다. 숙박업은 비공식적으로 운영되며, 때로는 모텔이나 매춘의 역할을 담당한다. 아래 그림은 회령시 성천동과 오산덕동에서 개인 집을 개조하여 매대(구멍가게)을 만들어 기본적인 생활필수품을 판매하는 곳을 보여주고 있다. 


변화의 의미

북한의 자발적 시장화는 단순한 경제적 변화가 아니다. 주민들이 생존을 위해 스스로 경제적 자립을 추구한 결과이며, 국가의 통제에서 벗어나 자율적인 경제 활동을 통해 새로운 삶의 방식을 개척한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북한 사회의 구조적 변화를 예고하며, 앞으로의 경제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다.


곽인옥 교수 inokkwak@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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