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출신 논란 '우씨왕후', 간과한 게 또 있다

김종성 2024. 9. 2. 1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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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성의 사극으로 역사읽기] 티빙 <우씨왕후>

[김종성 기자]

티빙 사극 <우씨왕후>는 고구려 고국천태왕(고국천왕)을 후대의 임금인 광개토태왕(광개토왕)처럼 바꿔놓았다. 고국천태왕의 핵심 업적이 영토확장인 듯한 오해를 일으킬 만한 드라마다.

지난 8월 29일 선보인 <우씨왕후> 제1회는 고국천태왕(지창욱 분)이 전쟁터에 직접 나가 혁혁한 성과를 거두는 장면을 비중 있게 묘사한다. 제1회 서두의 자막은 고국천태왕 고남무를 전쟁군주나 정복군주처럼 서술한다.

"고구려의 왕위에 오른 고남무는 선왕 시절 한나라에 빼앗긴 영토 수복을 위해 긴 전쟁을 시작한다. 왕이 전쟁터로 떠나면 왕궁을 지키는 건 왕후와 국상 을파소였다."
 티빙 <우씨왕후> 관련 이미지.
ⓒ 티빙
그런 뒤 그 같은 장기간의 전쟁으로 왕권에 대한 위협이 가중됐다는 자막이 나온다. "전쟁으로 왕의 공백이 길어지자 서부의 대가 해대부는 국정을 핑계로 왕권을 넘보기 시작하고 그 틈을 타 북부 왕비족의 대가인 명림어루는 왕의 후사가 없다는 이유로 왕후를 압박"했다는 내용이다.

고국천태왕이 전쟁터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음을 강조하는 장면이 제1회 초반에 또다시 나온다. 그가 전투가 끝난 뒤 현장의 흙을 만지며 "무골, 우리가 여기서 싸운 지 얼마나 되었는가?"라고 묻자, 직속부대장인 무골(박지환 분)이 먼 데를 응시하며 "겨울을 두 번 보내고도 세 달째이옵니다"라고 답하는 장면이다.

드라마 속의 고국천태왕은 이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고 개선한다. 태왕이 없는 사이에 귀족들은 재상 을파소의 개혁정책인 진대법을 폐지하려고 시도했었다. 하지만 이 승리로 인해 그런 목소리들은 잠잠해진다. 그런데 귀환한 직후에 태왕은 세상을 떠나고, 과부가 된 우씨왕후(전종서 분)가 다음 임금의 왕후가 되고자 비밀 작전에 나선다는 유명한 이야기가 시작된다.

민중 복지에 힘쓴 고국천태왕

<삼국사기> 저자 김부식은 고구려·백제·신라 군주의 명칭을 일률적으로 '왕'으로 통일했다. 그래서 고구려 군주의 정식 한자 칭호인 태왕이 후대 사람들에게 낯설게 됐다. 고국천태왕의 업적을 살펴보면, 태왕이라는 칭호가 결코 과하지 않는 훌륭한 군주였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외척 귀족세력을 견제하고 민중의 복지에 신경을 썼다. 그의 시대에 재상 을파소가 진대법을 실시해 백성들에게 정부 곡식을 대여한 일은 두고두고 모범이 되었다. 이는 지주나 귀족에 대한 백성들의 의존도를 낮추고 이들의 경제적 독립성을 어느 정도 제고시켰다.
 티빙 <우씨왕후> 관련 이미지.
ⓒ 티빙
을파소는 고려 말의 신돈처럼 정치적 기반이 전무한 상태에서 전격 등용됐다. 이런 인물이 소신껏 개혁을 추진할 수 있었던 것은 군주의 전폭적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고국천태왕과 을파소의 '케미'는 성격이 까다롭고 칭찬을 가급적 아끼는 역사학자 신채호의 푸짐한 호평에서도 역설적으로 증명된다.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이렇게 극찬했다.

"뜻이 맞는 임금을 만난 것에 감격한 을파소는 지극정성으로 국정을 수행했다. 상벌을 신중히 처리하고 법령을 엄격히 하니 나라가 잘 다스려졌다. 그래서 고구려 9백년 역사에서 최고의 재상으로 불리게 됐다."

하지만 드라마 <우씨왕후>의 전투신은 고국천-을파소 조합의 역사적 의미를 이해하는 데 방해가 된다. <우씨왕후>에 묘사된 것처럼 고국천태왕이 죽기 얼마 전까지 전쟁터에서 살았다면, 아무런 기반이 없는 을파소가 홀로 도성에 남아 개혁의 성과를 지키기는 쉽지 않았다.

을파소는 개혁 의지와 비전은 있었지만 그것을 실현시킬 정치적 자원은 전혀 없었다. 신채호가 강조한 것처럼 "뜻이 맞는 임금"이 곁에 있었기에 그의 개혁은 성사될 수 있었다. 을파소의 최대 후원자가 전쟁터에 몇 년씩 나가 있었다면, 을파소는 개혁은커녕 정치적 생존도 도모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우씨왕후>에서 강조된 것처럼 태왕이 전쟁터에 직접 나가 성과를 거둔 것은 사실이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고국천왕 편은 태왕이 재위 6년인 184년에 한나라의 침공에 맞서 직접 참전했으며 "목을 벤 것이 산처럼 쌓였다"고 할 정도로 대승을 거뒀음을 알려준다.

하지만, 왕권의 위협이 생길 정도로 태왕이 수년간 도성을 비웠다는 이야기는 찾을 수 없다. 아무리 픽션이라고 할지라도 실존인물을 소재로 한 사극에서 너무 과장된 스토리를 전개하면 역사왜곡 논란을 자초할 수밖에 없다.

고대 전쟁에서는 영토 확장보다 노동력 확보가 더 중시될 때가 많았다. 영토에 비해 노동력이 부족하고 이것이 세수 증대에 지장을 줄 경우에는, 상대방 영토를 빼앗은 뒤 그곳 백성들만 끌고 귀환하는 경우도 많았다.

고국천태왕은 국가재정의 확충으로 연결되는 이 같은 외국 노동력 확보에서도 큰 성과를 거뒀다. 유비와 조조 등의 활약으로 중국이 혼란스러울 때인 197년에 대륙의 혼란을 피해 고구려로 망명하는 중국인들이 많았다고 <삼국사기>는 말한다.

이때 태왕은 전쟁이 아닌 평화적 방법으로 이들을 수용했다. 영토 확장 못지않은 성과를 거둔 것이다. <우씨왕후>는 고국천태왕을 광개토태왕이나 장수태왕처럼 묘사했지만, 이 태왕은 전쟁이 아닌 방법으로도 전쟁 만큼의 성과를 거뒀다.

역사적 맥락을 엉망으로 만들다
 티빙 <우씨왕후> 관련 이미지.
ⓒ 티빙
역사를 공부하는 목적 중 하나는 역사적 사실 간의 인과관계를 이해하는 데 있다. 고국천태왕의 전쟁과 을파소의 개혁을 다루는 <우씨왕후>의 설명 방식은 이 시대의 역사적 맥락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았다.

179년에 즉위한 고국천태왕은 처음에는 힘이 없었다. 그런 그가 귀족들이 추천하는 인물이 아닌 무명의 을파소를 191년에 전격 기용해 진대법 개혁을 194년에 단행했다. 그가 을파소를 내세워 귀족들에게 불리한 개혁을 성사시킬 수 있었던 것은 184년의 전쟁에서 대승을 거둔 것과 관련이 있다.

이 전쟁이 고국천태왕의 리더십을 배가시켜준 뒤에 그는 귀족 반란인 좌가려·어비류의 반란을 191년에 진압했다. 이로 인해 힘이 막강해진 상태에서 귀족들의 동향을 무시하고 을파소를 기용해 개혁을 추진했다. 이는 184년의 전쟁이 을파소 개혁의 원동력 중 하나가 됐음을 보여준다. 그런 일이 있은 뒤인 197년에 고국천태왕은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우씨왕후>는 태왕이 진대법을 시행한 뒤 대규모 전쟁에 나가 대승을 거두고 귀환한 다음에 죽었다는 식으로 스토리를 전개했다. 184년의 전승이 194년의 진대법을 추동하는 원동력이 된 역사적 맥락을 간과한 스토리 전개다.

노출신 등으로 이슈가 된 <우씨왕후>는 역사적인 을파소 개혁이 있었던 고국천태왕의 시대를 배경으로 하지만, 당시의 시대적 배경도 정확히 묘사하지 못했다. 흥미를 끄는 데 치중해 전투신부터 보여준 것은 역사적 이미지의 정확한 전달을 방해하는 요인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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