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원할 때가 되었다는 신호
'언어재활사의 말 이야기'는 15년 넘게 언어재활사로 일하며 경험한 이야기들로, 언어치료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가닿길 바라는 마음으로 쓰는 글입니다. <기자말>
[황명화 기자]
부스스한 머리, 퉁퉁 부은 눈. 첫인상이 강렬하다. 예사롭지 않은 기운이 느껴진다.
말을 안 하는 건지 못하는 건지 말이 없다고 환자와 같이 온 보호자는 애가 탄다. 왜 젊은 게 말을 안 하냐고... '음... 안타깝지만 그건 못 하는 겁니다'라는 말을 꿀꺽 삼키고 좀 더 환자를 살펴본다.
내가 관상가는 아니지만 오랜 시간 같은 일을 해오다 보면 굳이 보려 하지 않아도 보이는 것들이 있다. 잘... 잘해야겠구나. 잘하면 효과가 날 수 있겠구나. 하지만 쉬운 상황은 아닐 수 있겠다. 전실어증(Global aphasia)인 이 사람, 너무 젊다. 나보다 어리다. 누군가는 '어쩌다가...'라고 할 수 있겠지만, 아니다. 이 병은 언제 누구에게 올지 모르는 것일 뿐이다.
이어 언어평가를 하는데, 환자가 난데없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jargon speech)로 뭐라 뭐라 하여, "환자분 다시 말씀해 주세요" 했더니 "좋은 게 좋은 거지~"라고 똑똑히 알아들을 수 있게 말한다. "말하네!!" 하고 보호자가 말씀하신다. 그렇다. 이게 '말' 이기는 하다. 하지만 의사소통에 있어서 '말'이라고 하기엔 뭔가 부족하다. 왜냐면 상황에 맞지 않는 말이고, 주고 받지도 못하니까.
그렇게 우리의 기싸움은 시작되었다. 말을 하게 하려는 자와 말하기 싫은 자의 싸움. 두둥. 과연 누가 이길 것인가. 환자와의 초창기 기싸움은 매우 중요하다. 치료에서 주도성을 누가 갖는지가 달렸기 때문이다. 물론 주도성이란 게 치료사가 시키는 대로 환자가 다 해야 한다 이런 의미는 아니다. 뭐랄까... 환자가 치료가 하기 싫더라도 할 수 있도록 같이 갈 수 있게 붙잡아주는 힘이라고 보면 될 것 같다.
오늘 환자분은 앞 시간 다른 치료실에서 떼 쓰는 아이처럼 울고불고 소리 지르며 치료사와 크게 기싸움을 했다고 한다. 그랬구나. 이어지는 치료인 언어치료실에도 안 들어오겠다며 팔로 문 난간을 잡는다. 지금 필요한 건.... 그렇다. 다독임이다. "앞에 시간에 힘들었군요. 우리는 가볍게 얘기만 좀 하고 가요. 힘든 거 절대로 안 할거예요. 일단 왔으니 한번 들어와 봐요~."
말이 안 되는 사람과 말을 하는 게 나의 일이다. 말로 표현하지 못한다고 생각까지 없는 게 아니라는 걸 반드시 명심하고 있어야 한다. 울고불고 짜증 내던 환자는 조금 진정이 되었고 나는 세상 가장 수다쟁이가 되어서 얘기한다. 일부러 너스레도 떨고, 정말 쉬운 치료만 골라 긍정 경험을 더 많이 느낄 수 있게 배치한다. 이럴 때 필요한 건 치료사의 빠른 상황 판단력이랄까?
이런저런 치료 중재 중에 환자가 무언가를 말하려다 더 말하지 못하고 "어훅" 하더니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린다. "괜찮아요. 지금 이래도 계속 열심히 치료받다 보면 분명 다시 하고 싶은 말을 잘할 수 있을 거예요" 마음을 토닥여 본다.
▲ 퇴원할 때 된 거 맞네. 인사도 하시는 거 보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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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날은 실랑이만 하다 치료가 끝나기도 하고, 기분 변화 때문에 다독임을 많이 해야 하기도 한다. 오냐 오냐만 해서도 안 되고, 무조건 강압적으로 "해야 됩니다!" 해서도 안 된다. 한 회기에 모든 것을 완성하겠다고 욕심 내서도 안 된다. 짧은 만남 기간일지라도 조금 더 거시적인 시선으로 보고, 하루하루를 채워가야 한다.
완벽하게, 완성된 상태를 생각하고 치료를 하면 치료를 하는 나도, 치료를 받는 환자도 힘들 수밖에 없다. 과제 중 하나를 맞고 틀리고에 연연하기 보다 이런 반응이 나왔고, 이 반응은 어제의 환자와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치료사가 알고, 치료사가 생각한 목표점으로 데려가야 한다.
드디어 그녀의 퇴원 날이 되었다. 마지막 치료를 마치는데 그녀가 내게 "고맙습니다"라고 인사를 한다. 아, 이 말 한 마디에 사르르 그간의 힘들었던 마음과 긴장이 녹는다. 됐네. 퇴원할 때 된 거 맞네. 인사도 하시는 거 보니... 나도 가벼운 마음으로 보내드릴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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