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 없는 스포츠 영화, 이렇게 민망할 수가
[김성호 기자]
자유의 비극은 마땅한 이에게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일까. 누구는 독재와 맞서 제 삶의 평안을 내던지지만, 지구 반대편의 어느 누구는 민주주의가 방종으로 흐르는 걸 그저 방관하고만 있다. 한 곳에선 더없이 귀한 것이 다른 곳에선 아무렇게나 차이는 세상, 이를 그저 인간사의 법칙이라 이해해야 하는 걸까.
뜯어보면 한 걸음, 한 걸음이 온갖 도전과 역경을 넘어 이뤄진 오늘이다. 그러나 어느 나라, 어느 세대는 일말의 기여 없이 당연한 양 전리품을 나눠가지고 있다. 피 위에 세워진 세상 가운데 고통을 기억하는 이가 채 한 줌이 되지 못한다. 억눌린 자에게 그만한 잘못이 없듯이, 누리는 자 또한 그만한 자격은 없는 것일지 모른다.
▲ 축구 소녀 모나 스틸컷 |
ⓒ 서울국제여성영화제 |
이 영화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를 두고 오래 고민했다. 그건 이 영화가 야심찬 포부와 달리 수없는 실패와 실수를 거듭하기 때문이고, 그중 몇은 반드시 언급해야 할 만큼 주요한 잘못인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 영화는 격려해 마땅한 의도와 취지를 가진 작품이므로, 나는 이 영화에 대하여 그저 설익고 못난 실패작이라고는 도저히 적을 수 없었던 것이다. 오랜 고민 끝에 나는 이 영화가 가진 장단을, 대부분은 단점이라 하겠으나, 너무 깊지 않게 지적하기로 하였다. 무지성적 옹호와 취지에의 존중이 도리어 실패를 깊게 한다는 사실을 이와 같은 작품 스스로가 도리어 반증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는 제목에서 표방하듯 스포츠 영화다. 영화의 주된 얼개가 시리아에서 독일로 건너온 모나가 공립학교 실내축구팀에 가입해 베를린 대회에서 우승하기까지의 이야기를 그린단 점에서 그러하다. 스포츠 중에서도 독일에서 위상이 높고, 특히 문화권을 넘어 전 세계에서 폭넓은 인기를 자랑하는 축구를 선택했다. 또한 근 몇 년 수많은 페미니즘 영화가 제작돼 여성스포츠며 여성축구영화라는 장르로 모아도 될 것이란 평가까지 나오는 가운데, 여성축구를 택했단 점이 다분히 인상적이다.
또 한 편으로 영화는 정치적 올바름을 추구하는 드라마이기도 하다. 영화 속 여러 설정, 이를테면 모나가 속한 축구팀의 구성원부터가 인종적 배분 아래 설정됐다 해도 무방하다. 모나는 시리아 난민인데, 팀원 가운데는 독일의 전형적인 아리안계 백인, 한국인 배우가 연기한 아시아계 독일인, 아프리카계와 서아시아계, 아예 히잡을 쓴 아이까지 골고루 자리하고 있다. 독일이 다양한 민족이 함께 살아가는 다민족국가라고는 해도 한 팀, 여섯 명의 주전선수가 이토록 골고루 배분되기란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이는 영화 속 다른 여러 팀 다수 멤버가 전형적인 독일인으로 구성됐단 걸 감안하면 손쉽게 알아챌 수 있다.
▲ 축구 소녀 모나 스틸컷 |
ⓒ 서울국제여성영화제 |
영화는 또한 시리아 독재자 아사드 정권과 독일과 같은 자유민주주의의 차이를 수차례에 걸쳐 확인한다. 수업에서 민주주의의 가치를 치켜세우는 건 물론, 선생님들이 반항하는 학생들에게 어떤 처분을 내릴지를 두고 민주적 절차를 거치는 과정을 비중 있게 표현한다. 모나가 엉망진창으로 떠들며 교사를 조롱하는 급우들을 따르지 않고 일어나 존중을 표하는 모습을 두고는 여기는 독재정권이 아닌 민주주의라며 일어서지 말라 주의를 주기까지 한다.
문화적 다양성과 그 과도기적 폐해에 대한 언급 또한 구체적으로 등장한다. 통제되지 않는 대혼란의 학급 가운데 교사는 아리안계 학생과 이민자 학생들을 달리 대한다. 성적을 공개할 때 모나와 같은 이민자는 낮은 등급을 받았음에도 그 성적을 감추고 격려하는 반면, 아리안계 학생들은 우수한 성적에도 자극하고 질타하는 식이다. 이 같은 다른 태도에 학생들은 도리어 격분하고 조롱하며 교사를 인종차별주의자라고까지 격렬히 공격하기까지 한다. 인종차별이란 공격 앞에 교사는 아무런 대처도 하지 못한 채 움츠들 뿐이다. 이밖에도 모나와 해리가 재미삼아 한 절도가 적발돼 경찰에 연행된 상황에서 경찰들이 모나가 해리를 꼬드겼으리라 지레짐작하고 수사하는 상황의 부조리함도 굳이 언급된다.
페미니즘적 시선 또한 빼놓을 수 없다. 근 몇 년 간 페미니즘적 영화 소재로써 유행한 여자축구를 주된 설정으로 삼은 작품 답게 여성들의 주체성을 두드러지게 표현하는 대목이 적잖다. 학내 남학생 축구팀과 여학생 축구팀이 서로 적대적으로 대립하는 모습을 극적으로 비추고, '여자축구를 누가 보느냐'거나 '여자는 축구를 잘 못한다'는 대사까지 적극적으로 꺼내기도 한다. 모나는 헬린 이모가 저를 향해 말하던 그대로 거울을 보고 스스로가 사자라고 되뇌는데, 앞서 언급한 해리와 같은 이가 이를 암사자라고 바로잡는 장면까지 수차례 반복된다.
▲ 축구 소녀 모나 스틸컷 |
ⓒ 서울국제여성영화제 |
영화는 한편으로 주와 부, 본질과 가욋일의 차이를 알도록 한다. <축구 소녀 모나>의 주된 얼개는 어디까지나 베를린 여자 실내축구 대회다. 모나를 포함한 여덟 명의 선수단이 대회를 치르며 성장하는 이야기다. 바로 이 지점에서 영화의 문제가 두드러진다. 그저 이 영화만의 한계가 아닌, 페미니즘 내세운 여성 스포츠 영화 가운데 적잖은 수가 노정하는 실패다.
영화엔 연습만도 수차례, 정식 경기도 대여섯 차례가 등장한다. 그러나 감독은 그 대부분을 제대로 그려내지 못한다. 이유는 명백하다. 기본적인 실력이 없어서다. 선수들은 영화에서 묘사되는 것과 달리 기본적인 킥과 트래핑조차 버거워한다. 겉으론 쉬워보이지만 한두 달의 연습으로는 흉내 낼 수 없는 것이다.
그에 대한 영화의 대응은 이것이다. 전반부 훈련과 연습경기는 같은 학교 남자축구부원이 사실상 해설에 나선다. 여성 축구팀을 해체하기 위한 목적으로 몰래 경기를 지켜보는 이들이 직접 입으로 이들의 경기며 실력, 상황을 평가한다. '새로 전학 온 애는 대단한데?' '지금 건 좀 엄청났는데?' '저 패스는 뭐야?' 하는 식이다.
그동안 카메라는 이들 남학생의 대화를 잡을 뿐 패스하는 선수들을 잡지 않는다. 마지못해 몇 차례 잡아낸, 그마저도 고르고 골랐을 장면은 민망한 수준이다. 어째서 감독이 연습과 경기 대신 주변인의 대화로써 그를 간접적으로 해설하길 택했는지 짐작할 만하다.
▲ 서울국제여성영화제 포스터 |
ⓒ 서울국제여성영화제 |
어째서일까. 첫 번째는 캐스팅한 배우의 실력적 한계일 테다. 여성축구를 하지 않는 이들이 촬영기간 손발을 맞추고 교습을 받는대도 극적으로 실력이 향상되진 않는다. 더구나 연기력을 갖춘 배우들이 축구까지 잘 하길 기대하긴 어렵다. 심지어 이 영화는 의식적으로 인종적 다양성까지 팀 안에 배분하여 캐스팅상 제약까지 더해놓았다. 그 결과가 공차기에 영 자질이 없는 구성원으로 팀이 꾸려진 것이다.
심지어 주인공 모나는 몇 차례 보여지는 것만 보아도 운동신경이 영 꽝이다. 그리하여 영화는 어느 순간 뛰어난 자질을 가졌다던 그녀의 포지션을 골키퍼로 옮겨놓는다. 그리고 결정적인 선방이란 장면들을 죄다 몸 가운데를 향해 찬 뒤 맞다시피 튕겨내는 것으로써 연출한다. 축구를 아는 이라면 민망할 밖에 없는 일이다. 그리하여 영화 속에서 주인공은 거의 경기에서 역할을 하지 못한다. 오로지 주변인의 대사로서만 대단한 역할을 했다고 추켜세워질 뿐.
반면, 타 팀 선수들은 훨씬 더 잘 뛰고 잘 막으며 몸을 던진다. 이런 상황에서 경기 장면이 제대로 연출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영화가 축구를 포기하지 못하는 건 왜일까. 어째서 연출상 어려움이 적은 육상 등 다른 스포츠를 택하지 않는가. 간단한 트래핑도 안 되는 선수들을 두고 왜 훌륭한 경기를 하고 있다는 해설을 붙여 보는 관객까지 민망하게 하는가.
지난 몇 년 간 마주한 비슷한 여성 스포츠 영화가 벌써 여럿이다. 눈 가리고 아웅하며 그에 담긴 의미 만을 캐어내 평가하는 것을 더는 좋은 비평이라 할 수가 없다. 애정을 갖고 서울여성영화제를 찾은 평론가로서 나는 고심 끝에 이를 비판하기에 이른 것이다. 적어도 스포츠 영화라면 기본적인 단련이 이뤄진 뒤 촬영에 이르러야 한다. 남성 스포츠 영화에선 찾기 어려운 수준의 민망한 실력에도 주조연 배우가 선수로 등장하는 일이 어째서 반복되는가. 어째서 이를 비평하는 말이 진지한 자리에선 언급되지 않는가. 그것이 과연 여성과 여성배우, 여성스포츠를 대하는 올바른 태도인가.
또 하나 영화의 치명적 단점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교내 남성팀이 3위에 그친 뒤 모나가 속한 여성팀에겐 다시금 기회가 온다. 4강전에서 다른 두 팀이 패싸움을 벌여 스포츠맨십 위반으로 동반 탈락했다는 것. 그리하여 모나의 팀에게 결승진출의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그로부터 이야기는 극적인 우승, 나아가 모든 갈등의 해소로 이어진다. 자못 진지하게 온갖 세상의 문제들을 뒤적거리던 영화과 결국 운에 따른 우승으로 모든 위기를 극복한다는 결말로 매조지되는 것이다.
승리가 모든 부조리를 해소한다는, 그마저도 운에 의존한 승리로써 온갖 갈등을 극복한다는 구성은 이 영화가 다루는 여러 지점들에 비추어보아도 민망하기까지 하다. 영화 속 축구팀이, 또 이 학교가, 모나와 친구들이 저마다의 역경을 이겨낸다면, 그것은 저와 저들의 관계 속에서 이뤄져야 마땅하다. 승리를 통해서만 주어지는 영광, 해소되는 갈등이라면 그걸 어떻게 진짜배기 스포츠 영화의 멋이라 하겠는가.
덧붙이는 글 |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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