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가 손자에게 남긴 '유산' 검은 봉다리 속엔
[안치용 기자]
영화 <장손>의 제사 장면이 익숙한 세대와 낯선 세대가 있겠다. 익숙한 세대의 일원인 나는 영화를 보며 어릴 적 겪은 제사 풍경을 떠올렸다. 제사, 장례 등 <장손>은 켜켜이 쌓인 우리 시대의 모습을 단층애(斷層崖) 보여주듯 멀찍이 보여주다가 거기서 한 켜를 꺼내 그것을 관객의 눈앞으로 들이민다.
영화는 주인공인 성진(강승호)의 할머니(손숙) 장례식을 포함해 대략 1년에 못 미치는 시간을 담았다. <장손>처럼 내 부모의 집에서도 제사 드리는 시간이 한밤중에서 어느 날 초저녁으로 당겨진 게 기억이 난다.
내친김에 <장손>이 담지 않은 현실의 얘기를 조금 들려주면, 극중 성진의 어머니(안민영)처럼 종갓집에 맏며느리로 시집온 내 어머니는 평생 제사를 달고 살다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는 윗대 조상들 제사를 줄였다. 당신이 죽거든, 자신의 제사를 포함해 후손은 아예 제사를 드리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한국의 가족을 주제로 한 <장손>의 엔딩 장면을 보며 여러 생각이 떠올랐지만, 제사와 관련해서는 노모의 모습이, 엔딩에서 멀어지는 뒷모습에 자막처럼 떠올랐다.
가난한 집 제사 돌아오듯
▲ '장손' |
ⓒ 인디스토리 |
경상남도 합천의 실제 한옥에서 촬영된 이 영화는, 배우들의 실감 나는 사투리 연기를 통해 한국 미시사의 횡단면에서 거시사를 종단한다. 기본값은 가부장제이다. 영화가 담아낸 제사와 장례는 실제 생활을 그린 것이지만, 영화가 그린 것과 같은 그런 장례와 제사를 보기는 점점 힘들어진다. 영화가 잡아낸 성진 할머니의 장례식은 합천의 풍광과 어울려 아름다운 영상을 관객에게 선사할 것이다. 나만 해도 조부모 장례는 영화와 같은 의례였지만, 부친의 장례는 대학병원 영안실에서 현대화한 의례로 치렀다. <장손>은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비망록이다.
영화 <장손>의 저변에 자리한 가부장제는 남아선호사상으로 이어지며, 현재에서는 젠더갈등을 유발한다. 성진과 성진의 누나(김시은) 사이에, 또 성진의 아버지(오만석)와 성진의 고모들 사이에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좋을 만큼, 그래서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로 남녀차별이 깊이 자리한다. 그러나 카메라는 갈등을 보여주되 정색하지 않는다. 유머로 처리한 까닭은 적어도 그 문제에 관한 한 우리 사회에 옳고 그름에 관해 가르마를 탔기 때문일 것이다.
가족 내에서 여성운동을 벌일 수는 없는 노릇이다. 가족은 운동의 단위가 아니다. 가족의 시간은 빙하처럼 느리게 아래로 밀려갈 뿐이어서 어떤 사안엔 시간 외엔 답이 없는 것이 있다. <장손>에서 성진의 할머니 말녀가 한여름에도 에어컨을 안 틀고 버티다가, 장손 성진이 오자 기온을 높여 말하며 에어컨을 틀어주는 장면은, 바꿀 수는 없지만 나름대로 눈치를 보는 구세대의 남아선호 사상의 현상이다.
▲ '장손' |
ⓒ 인디스토리 |
성진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이념상으로 대척점에 선다. 이념의 시대가 끝난 세대에 속하는 MZ 성진은 할아버지와 아버지 각각의 이념을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아마 감독의 연출의도 또한 그러하지 싶다.
베트남조차 '빨갱이' 나라로 보는 할아버지의 반공사상엔 그 나름의 연원이 있다. 할아버지의 부모가 '빨갱이'에게 죽임을 당하고 자신만 간신히 살아남은 것으로 설정됐기에 할아버지의 '빨갱이' 증오는 불가피해 보인다. 현대사에서는 '빨갱이'이란 이유로 또는 '빨갱이'로 몰려 학살을 당한 사람도 많기에 '불가피'가 정당하다는 뜻은 아니다. 그냥 불가피하다는 뜻이다. 성진의 아버지를 학생운동권으로 그렸기에 캐릭터 설정상 불가피하기도 했을 터이다.
남한이라는 한계에서 할아버지의 반공과 아버지의 운동은 시대를 대표하는 캐릭터의 특성이다. 다음 세대에 속하는 감독이 극중 성진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이렇게 둔 것이 불가피하고 나름 정당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장손>은 현대사의 현상을 차곡차곡 쌓아 정돈한 다음, 시장에서 과일 몇 개를 사면 상인이 담아주는 검은 비닐봉다리인 양 편안하고 일상적인 모습으로 보여준다. 영화 말미에 성진이 할아버지로부터 받은 검은 비닐봉다리는 옛 세대가 새 세대에게 남기는 유산이다. 극중에서는 말 그대로 남몰래 전하는 유산이고, 연출과 각본을 맡은 오정민 감독에겐 영화적 상징이다. 성진은 오 감독의 영화적 분신이다. 오 감독은 연출의도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급변하는 근현대사를 겪으며 살아온 우리 '윗세대'는 역사의 격류에 정신없이 휩쓸려온 사람들이 아닌가 생각한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누군가는 사라지고, 유산을 받아 든 또 다른 누군가는 자기 방식대로 가족과 함께 살아갈 것이다. 물론 가족과 완벽한 화해는 불가능하다. 하지만 <장손>을 통해 관객들이 울고 웃으면서 자신과 가족의 삶을 되돌아볼 수만 있다면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일 것이다"
가족의 특성은 화해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순간 화해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게 가족의 특성이다. 화해를 선언하든 아니든, 종국엔 화해하는 게 가족이기도 하다. 물론 "병든 날 세지 않고 죽은 날 센다"는 속담처럼 때로 그 화해라는 것이 뒤늦게 이루어진다. 어쨌든 죽고 나면 유전자의 질긴 인연으로 회귀하는 것이 가족이다. 그러니 죽기 전에 모종의 화해를 찾으면 좋겠지만, 영화에서 그리듯 그게 쉽지 않은 게 가족의 특성이다.
▲ '장손' |
ⓒ 인디스토리 |
영화사의 소개 글은 심혈을 기울여 쓰기 마련이어서 해당 영화를 이해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된다. 특히 <장손>처럼 인디영화를 표방할 땐 더 그렇다.
"여름, 가을, 겨울 세 계절의 유려한 흐름 속에서 오롯하게 목도할 수 있다. <장손>은 3대의 역사에 얽힌 넓고 깊은 서사를 세심한 시선으로 포착하며, 격동의 근현대사를 거쳐온 윗세대와 새로운 가치와 신념으로 무장한 아래 세대가 한데 모인 가장 한국적인 가족의 초상을 그려낸다."
이 글에서 말하였듯 영화에서 다루는 계절은 세 계절이다. 보통 일 년 사계절을 보여주기 마련인데 왜 세 계절이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 법하다. 세대수와 관련이 있다. <장손>이 다루는 갈등과 애환은 3대에 걸쳐지지만, 애환 및 갈등과 무관한 새 세대가 성진 누나 미화의 갓난아이이다. 그 아이의 이름이 '늘봄'이다. 아이의 이름으로 사계절이 완성되며, 세대 또한 4대로 늘어난다. 아이와 아이의 이름을 통해 미래의 희망을 이야기했다고 받아들이면 되겠다. 여름부터 겨울까지가 자연의 계절이고, 봄은 사람의 계절로 설정한 것도 시사적이다.
봄은 생동의 계절이자, 새로운 시작의 계절이다. 결국 사람이 미래이고 희망이라는 보편적인 이야기를 은근슬쩍 오 감독이 전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별 탈 없어 보이는 보통의 대가족에게 드리운 고요하고도 스펙터클한 붕괴의 시간"은 롱 테이크로 구성한 엔딩과 연결지어 설명한 듯하다. 틀린 얘기가 아니지만, '늘봄'을 포함하여 많은 장면에서 이 영화는 붕괴 자체를 논하지 않는다. 가족의 의미를 살펴보며 그 유산을 상속하는 가족의 재탄생을 말한다. 손자에게 검은봉다리를 넘겨주고 의미심장하고 아름답게 퇴장하는 할아버지의 모습에서, 그 동선에서 관객이 여러 소회를 갖지 싶다.
미국의 역사학자 찰스 조이너는 "작은 공간에서 큰 질문을 던진다(large questions in small places)"는 말을 남겼다. 영화 장손이 하려고 한 것이지 싶다.
안치용 영화평론가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르몽드디플로마티크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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