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기엔 한땀 한땀 기록한 사실의 존엄함이 있다 [내 인생의 오브제]

2024. 9. 2. 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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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외교관 조희용의 메모지
수많은 메모지가 쌓여 있는 조희용 외교관의 작업실.
나에게 신문기자가 한 인터뷰 중 최고봉이 뭐냐고 물으면 2004년 세밑 소설가 김훈과 한국일보 문화부 기자들의 선술집 대화를 꼽는 데 주저함이 없다.

한국일보 선배인 김훈에게 후배들이 이런 질문을 던진다. “기자와 소설가 중에 어느 쪽이 좋은지?”

즉답이 돌아온다. “기자로 못한 원한을 지금 풀고 있는 거야. 기자 할 때는 육하원칙에 맞게 써야 하는데 소설을 쓰니까 너무 편해. 근데 나는 사실 육하원칙이 위대한, 최고의 문장이라고 생각해. 사실과 그것을 확인하는 것의 존엄함을 알아야 해.”

한 자 한 자 기록해가며 사실에 접근하려는 그의 작가정신이 답변에 배어난다. 그게 내가 업(業)으로 삼은 기자의 세계다. 김훈의 말마따나 사실과 의견을 섞으면 읽기가 괴롭다. 세상이 시끄러워진다. 시끄럽다는 뜻의 한자어가 화(譁)다. 말씀 언(言)변에 화려할 화(華). 김훈의 글은 화(譁)를 경계한다. 그러려면 화장은 피하고 사실만 말하고자 해야 한다. 기록에 충실해야 하는 이유다. 기자를 뜻하는 저널리스트의 저널(journal)은 다름 아닌 일기(diary)다. 매일매일의 기록.

그런데 나는 이 기록의 세계에서 기자가 최고인 줄만 알았는데 그렇지 않은 부류의 분을 접했다. 외교관이다. 외교관 역시 기록이 생명이다. 모두 다는 아닐지라도 기록에 관한 한 이런 외교관이 있나 싶을 정도의 인물이 있는데 그가 조희용이었다.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1979년 외교부에 들어와 대변인을 지냈고 스웨덴, 캐나다 대사를 지내고 지금은 은퇴하신 분이다.

그가 2년 반 전에 549쪽짜리 벽돌책 한 권을 냈는데 제목이 ‘중화민국 리포트 1990-1993’이었다. 부제는 대만단교 회고. 한국의 독립투쟁과 건국을 지원했던 나라, 지금은 대만이라고 불리는 그 나라와 외교 관계를 단절할 때의 기록물이다. 우리가 중국과 수교한 날이 1992년 8월 24일. 그날은 우리와 중화민국의 단교일이기도 하다. 30년 전 현장에 있었던 그가 굳이 책을 쓰겠다고 작심한 것은 아니었다. 단교 30주년을 맞이하기 1년 전 당시 첸푸 중화민국 외교부 부장이 회고록 3권을 출간했다. 그걸 보고 결심한다. 조 전 대사는 창고에 30년이나 보관해뒀던 먼지 냄새 풀풀 나는 업무일지와 자료를 끄집어냈다. 본부에 보낸 보고서와 메모를 하나도 빠짐없이 모아뒀던 그였다. 대만 회고는 그렇게 나온 책이다. 책을 들춰보면 숱한 비사와 일화가 있다. 외교관과 유학생이 테러를 당했던 사건 등. 책을 많이 팔자면 이런 스토리를 각색해 본인의 느낌과 버무려 쓸 만도 한데 그의 책은 시종일관 덤덤하다. 그냥 기록들이다. 이름 알리기 위해, 인세 받자고 내놓은 게 아니기 때문이다.

이 책으로 끝났다면 그러려니 했을 것이다. 1년 뒤 한 권의 책을 세상에 다시 내놓았는데 제목이 ‘해적 협상 노트 2006: 동원호 피랍 사건 전모’다. 소말리아 해적과의 117일간의 협상 기록이다. 리포트에서 노트로 바뀌었을 뿐 같은 스타일이다. 밋밋하기 그지없는 그냥 사실의 기록. 1년 후 세 번째 내놓은 책은 스웨덴 대사 시절의 이야기다. 제목은 스웨덴 리포트2008-2011. 도저히 팔릴 것 같지 않게 만든 기록물이다.

그는 얼마 전 매일경제와의 인터뷰에서 “외교관은 매일 읽고, 듣고, 말하고, 쓰는 직업으로 기록은 교섭의 기초”라고 말했다. 그렇게 한 땀 한 땀 작은 노트에 써 내려간 메모들을 차곡차곡 모으고 그렇게 축적된 사실들을 맥락으로 연결해온 조희용 전 대사. 자료들과 책, 그리고 과거 신문뭉치들이 발 디딜 틈 없이 쌓인 그의 작업실이 그의 36년 외교관 인생을 말해준다. 장담컨대 언젠가는 캐나다 대사 시절의 기록물도 나올 것이다. 읽는 재미는 없을 테지만.

[손현덕 기자]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275호 (2024.09.03~2024.09.10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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