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면초가 임종룡號]②연줄만 작동하는 ‘작은 사회’…‘주인없는 기업’의 20년사
상업·한일 계파 갈등도 여전…줄대기·충성문화 심화
편집자주
우리금융그룹이 손태승 전 회장 친인척에 대한 부당대출로 또 이슈의 중심에 섰다. 다른 은행들에 비해 수백억대 횡령, 자금유용, 배임 등 각종 역대급 금융사고가 빈발하는 이유는 뭘까. 다른 은행들은 시스템 밖에서 벌어지는 개인의 일탈 문제가 크지만, 우리금융은 오랫동안 누적된 조직문화가 핵심 원인이라는 게 아시아경제의 판단이다. 우리금융의 잘못된 조직문화를 집중 조명하고, 기사로 노출시킴으로써 우리금융이 환골탈태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번 시리즈를 시작한다. 아시아경제는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우리금융의 조직문화 문제를 기사로 다룰 계획이다.
우리금융지주·은행에서 고위직을 지낸 A씨는 최근 서울 여의도의 한 호텔을 지나다 옛 회사 직원 십수 명이 분주하게 의전(儀典)을 준비하는 모습을 목격했다. 으레 그렇듯 ‘회장이나 행장이 오는 행사인가 보다’라고 생각하며 무심코 가까이 다가갔지만 오산이었다. 정작 호텔에 당도해 의전을 받은 관용차는 본부장·부행장들에게 주어지는 차량이었다. A씨는 “모(某) 은행에선 회장조차도 결혼식에 단신으로 간다던데…”라며 “퇴직한 지가 벌써 몇 년째인데 저런 줄대기 구태가 반복되는지 모르겠다”며 쓴웃음을 지었다.
우리금융·은행에서 벌어진 손태승 전 회장 친인척 부당 대출 사고로 금융권이 들썩이고 있다. 대체적인 시각은 ‘이해하기 어려운 사건’ 이란 평가다. 우리은행 설명대로라면 세간의 이목이 쏠려 있는 최고경영자(CEO)의 친인척에게 아무런 지시와 압박 없이도 수백억원의 대출이, 그것도 매우 부실한 심사과정을 거쳐 집행된 까닭이다.
하지만 우리금융·은행 내부에선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란 평가도 나온다. 직접적인 지시·압박이 없었더라도 눈치껏 행동하는, 소위 ‘손타쿠(忖度·다른 사람의 암묵적인 욕망에 따라 행동하는 것을 일컫는 일본문화)’였을 것이란 해석이다. 금융권에선 우리금융·은행이 1997년 외환위기 이후 20여년간 ‘주인 없는 기업’으로 자리하면서 내부만의 논리가 작동하는 ‘작은 사회’가 만들어진 것이 아니냔 해석도 내놓는다.
‘주인 없는 기업’서 주인 행세만…맹목적 충성문화 자리 잡아
우리금융·은행의 정체성은 ‘주인 없는 기업’으로 집약된다. 정부는 1997년 외환위기 과정에서 5대 시중은행이던 이른바 ‘조흥·상업·제일·한일·서울은행(조상제한서)’가 모두 부실화되자 인수·합병을 통한 구조조정에 나섰고, 그 과정에서 3조2000억원가량의 공적자금을 투입해 상업은행과 한일은행의 통합을 성사시켰다. 사상 첫 글로벌 100대 은행에 들었다던 ‘한빛은행(현 우리은행)’의 탄생이다. 한빛은행은 추후 평화은행을 합병해 오늘날의 우리은행으로 거듭났다.
비교적 건실한 은행이 다른 은행을 흡수한 사례(신한-조흥, 하나-서울), 해외 금융회사에 매각된 사례(제일-SC)와 달리 양 은행은 부실화된 은행 간 합병이었다는 차이가 있다. 대주주는 주인이라 할 만한 주체가 없는 금융공기업 예금보험공사였다. 실질적인 대주주 역할은 예금보험공사를 감독하는 정부와 정부를 감시·견제하는 국회가 담당하게 된 것이다. 2010년부터 이어진 세 차례 민영화 시도도 좌초되며 주인 없는 기업 체제는 2016년까지 20년 가까이 지속됐다. 우리금융·은행이 완전 민영화에 성공한 것은 창립 24주년 만인 올해 5월 예금보험공사가 들고 있던 잔여 지분을 인수하면서다.
금융권에선 주인 없는 기업 체제가 사내 정치를 강화하는 역할을 했다고 봤다. 옛 우리금융지주 산하 자회사였던 금융회사 관계자는 “공적자금이 투입돼 관리받았던 금융회사는 일순간 주인 없는 회사가 되면서 경영진과 임직원, 노동조합 등이 관가, 정치권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이익집단화되는 경향이 있다”면서 “경영진은 자리보전, 임직원과 노조는 고용유지라는 데 이해관계가 일치하면서 이런 움직임이 굳어지는 분위기”라고 했다.
사실상 주인이었던 예금보험공사도 정부의 대리인인 만큼 관치의 입김이 강하고 CEO의 주인의식이 결여되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평가도 있다. 금융당국 관계자는 “우리금융·은행의 경우 대리인인 CEO를 감독해야 하는 예금보험공사도 정부의 대리인이었단 점에서 ‘이중대리’의 한계가 있었다”면서 “이를테면 손 전 회장도 주인이 아니었지만 그를 감시해야 할 정부와 예금보험공사도 주인이 아니었다는 데서 발생한 문제로도 볼 수 있다”고 했다.
초기부터 주인이 없었던 우리금융·은행은 외부의 영향에 매우 취약했다. 실제 역대 행장들을 보면 1~4대 행장(한빛은행 포함)까진 외부출신 인사들이 주로 포진했다. 옛 우리금융지주 CEO들의 면면을 봐도 재정경제부 1차관을 지낸 박병원 전 회장, 이헌재 사단으로 분류되는 황영기 전 회장, 이명박 정부 시절 ‘금융권 4대 천왕’으로 불리던 이팔성 전 회장 등 정부·정치권과 연이 깊은 인사들이 주로 포진했다.
CEO 인사부터 외부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하다 보니 외부 연줄과 내부의 맹목적인 충성이 하나의 조직문화로 자리 잡았다는 게 우리금융·은행 안팎의 분석이다. 우리은행 한 관계자는 “애초 공적자금을 받아 출발했고, 승진이 외부 연줄에 따라 결정되는 문화가 20년 넘게 뿌리박혔다”면서 “일을 잘해서 승진하는 게 아니다 보니 외부에 줄을 댄다거나, 힘 있는 윗사람에게 맹목적인 충성을 바쳐 후일을 도모하게 되는 것”이라고 진단했다.
이 관계자는 “그런 측면에선 손 전 회장 친인척에게 대출을 취급한 본부장이 지시나 압박 없이도 허술하게 대출해줬다는 주장이 이해되는 측면이 있다”면서 “해당 차주가 회장 친인척인 것을 알았다면 하지 말라고 해도 하지 않았을까 싶다. 이런 문화를 보고 자랐고 실제로도 본인이 일정 부분은 득을 봤을 것”이라고 전했다.
상업-한일 아직도 ‘갈등’...고변·투서 등 음모만
이런 구조하에서 상업은행-한일은행 간 화학적 결합이 이뤄지지 않은 것도 ‘작은 사회’를 더욱 가속하는 기제로 작용했다는 평가다. 상업은행과 한일은행은 합병 당시(1999년)를 기준으로 각기 100년, 67년의 역사를 자랑하던 전통의 은행들이었다. 예컨대 상업은행의 경우 초기 행장 중에 조선의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1897~1970)도 있을 정도다.
무게감이 있는 두 은행이 ‘대등 합병’의 형식을 취하다 보니 계보 간 경쟁이 치열해질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동일하게 대등 합병 형태를 취한 KB국민은행도 예전엔 소위 ‘1채널(옛 국민은행)’, ‘2채널(옛 주택은행)’ 간의 경쟁 구도가 있었다. 앞서 주요 외환위기 전 5대 은행과 통합한 신한(조흥), 하나(서울) 은행의 경우 인수자와 피인수자가 명확히 구분되는 데다 인수 주체가 1970~1980년대 설립돼 비교적 조직문화가 유연했던 있던 점이 이들과 다른 점으로 꼽힌다.
그런 만큼 우리금융은 비교적 초기부터 상업·한일은행 출신들이 교차하며 요직을 수행해 왔다. 이를테면 한 은행 출신이 지점장으로 임명되면 다른 은행 출신이 부지점장으로 임명되는 식이다. 실제 역대 행장들을 보면 1~4대 행장까진 외부출신 인사들이 영입됐으나 내부 출신 인사들이 자리하고 난 2011년부터는 5대 이종휘(한일), 6대 이순우(상업), 7대 이광구(상업), 8대 손태승(한일), 9대 권광석(상업), 10대 이원덕(한일), 11대 조병규(상업) 등 대체로 징검다리 형식으로 양대 계파가 행장 자리를 주고받았다.
하지만 주인 없는 기업에서 CEO의 입김이 거세지면서 이런 계파구도는 요직을 차지하기 위한 연줄 문화, 맹목적인 충성문화를 더욱 가속했다. 우리금융 안팎, 금융당국과 정치권, 언론계까지 각종 고변·투서 등 음모로 얼룩지게 된 것도 이런 배경이다.
우리은행 사정에 정통한 한 관계자는 “가장 큰 특징이라면 행내에 사적 인연에 기반한 인포멀 그룹(Informal Group)이 너무 많다는 것”이라며 “이를테면 출신 은행(상업-한일)부터 시작해 지연, 혈연, 학연은 물론 특정 시기에 특정 중간보스(boss) 아래서 근무한 사람들끼리 모임을 형성하는 등 여러 인포멀 그룹이 종횡으로 얽혀있는 구조로, 승진과 출세를 위해 여러 모임에 참가하는 게 상례가 돼 있다”고 꼬집었다.
이 관계자는 또 “흔히들 상업·한일 갈등을 가장 큰 문제로 꼽지만 그건 큰 틀에서의 갈등일 뿐이고, 실제론 승진을 위해 힘을 발휘해 줄 외부세력이나 내부 권력자에 여러 경로로 줄을 대고 맹목적 충성을 바치는 문화가 핵심”이라며 “어제까지 다른 은행 출신이라고 경쟁하고 따돌리다가도, 권력의 흐름이 바뀌면 어제까지 배척하던 다른 은행 출신인데도 바로 웃는 낯으로 대응하는 게 문제의 근원”이라고 꼬집었다.
과점주주 체제로 민영화가 이뤄지고 나서도 이런 문화는 바뀌지 않고 있다. 당장 7대 이광구 행장이 물러나게 된 채용 비리 역시 당국, 각 의원실을 향한 투서에서 촉발됐고, 이번 손 전 회장 친인척 부적정 대출사건에 대한 금융감독원 검사도 제보로 출발했다. 과점 주주들이 4% 안팎의 비슷한 지분율로 지배구조를 형성하다 보니 실질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정치권·금융감독당국을 향한 줄대기, 현임 CEO를 향한 줄대기가 계파를 기반해 버젓이 벌어지고 있는 셈이다. 지난 회장 후보 추천 당시에도 십수 명에 달하는 후보들이 자천타천으로 후보군에 오른 것도 이를 방증한다.
그렇다면 완전 민영화가 정착되고, 상업·한일은행의 구분을 넘어 한빛·우리은행 세대가 성장하면 조직문화는 자연스럽게 변화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해서도 회의적인 반응이 적지 않다. 금융권 한 관계자는 “새로운 세대가 등장한다고 해도 20년 이상 이런 성장 경로를 체득하고 배워온 만큼 즉각적으로 그런 문화가 하루아침에 사라지진 않을 것”이라고 했다.
유제훈 기자 kalamal@asiae.co.kr
오규민 기자 moh011@asiae.co.kr
임철영 기자 cylim@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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