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현철의 시시각각] 나는 기꺼이 지고 싶다
서울의 폭염 특보가 38일 만에 해제됐다. 올여름 평균기온은 25.6도로 지금까지 가장 더웠던 2018년(25.3도)을 가볍게 제쳤다. 전국의 열대야 일수는 20.2일, 서울에서는 39일이나 나타나 역시 1등이 됐다. 이제 시작이라는 점이 더 두렵다. 올해가 앞으로 겪을 여름 중 가장 시원할 것이란 불길한 예측이 나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이런 현상을 기상 이변이라고 불렀다. 이변은 예상치 못했던 현상이며, 일회성이라는 의미를 내포한다. 하지만 지금은 기후 위기의 한 단면이라고 규정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위기를 초래한 것은 인간 활동의 결과물인 온실가스다. 위기는 그냥 두면 높은 확률로 파국을 향해 치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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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헌재 “미래세대 환경권 보호 대상”
2030년 이후 감축 계획 명시해야
기후 위기 대응, 늦출수록 비싸져
」
다 같이 느끼면서도 먼저 나서는 데에는 주저하게 된다. 근저엔 몇 가지 심리가 작용한다. 다른 나라 탓도 큰데 굳이 우리가 먼저 나서서 손해볼 필요가 있을까(공유지의 비극). 그렇게 노력하면 기후 위기는 정말 멈출까(회의론). 어쩌면 막판에 획기적인 기술이 개발돼 ‘뿅’ 하고 온실가스를 제거하지 않을까(기술지상주의). 지난달 29일 헌법재판소가 내린 결정은 이런 태도와 인식에 경종을 울렸다. 기후 소송이라 불리는 법적 대응은 지금까지 전 세계에서 2340여 건 제기됐고, “각국 정부의 온실가스 감축 노력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시민 주장이 받아들여진 사례도 속속 나오고 있다. 그런데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IPCC)에서 선진국 의무가 면제된 한국에서도 소송이 받아들여진 것이다. 아시아에서는 첫 사례다.
탄소중립기본법과 시행령, 이행 계획 등이 위헌이라며 제기된 4건의 헌법소원의 요지는 세 가지 정도로 요약된다. 2030년까지의 구체적 감축 목표가 너무 적다는 것, 목표를 이뤄가는 실행 계획이 후반부에 몰렸다는 점, 2031년 이후의 구체적 계획은 아예 없다는 문제다. 이는 선거로 의사를 표현하지 못하지만 피해는 더 오래, 더 많이 보는 미래 세대의 기본권을 심각하게 침해한다는 것이다. 만약 받아들여지면 2022년 어렵게 마련된 국가감축계획(NDC)을 수정해야 한다. 기존 감축 계획도 버겁다는 목소리가 큰데, 더한 목표를 세워야 한다니 사회적 갈등이 불가피하다.
헌재는 타협을 택했다. 미래세대의 환경권도 똑같이 보호받아야 할 헌법적 권리임을 명시했다. ‘당장 먹고살기 힘든데 무슨 미래냐’는 태도는 ‘나 힘들다고 남을 해치는 일’과 똑같다는 선언이다. 2030년까지의 감축 목표나 과정은 정부 재량으로 인정해 줬다. 하지만 2031년부터 세부 계획이 아예 없는 것은 정부가 감축 노력을 최대한 뒤로 미룰 빌미를 줄 것이라고 봤다. 우리의 최종 계획은 2050년에 탄소중립(순배출량 0)을 이루는 것이다. 정부는 산업계와의 갈등은 피하고 싶고, 경제성장 같은 다른 업적도 필요하다. 그래서 목표는 남기고 행동은 뒤로 미루려는 욕구가 생기기 마련이다. 이런 걸 못하게 법으로 대강의 방향과 계획은 세우라는 게 헌재의 취지다.
헌재는 당장 위헌이라고 선언하면 혼란이 클 테니 내년 말까지 정하라며 시한을 줬다. 그래도 1년4개월 안에 장기 감축 규모와 연도별(5년 단위) 계획을 짜려면 분주해질 수밖에 없다. 더 내놓아야 하는 분야도 있고, 더욱 박차를 가해야 하는 부문도 있을 것이다. 가급적 미적거리다 넘기고 싶은 마음에 쐐기가 박혔다.
대단했던 더위의 위세도 달이 바뀌며 한풀 꺾이는 기미다. 시간이 지나면 다시 추위가 오고, 폭염의 기억은 점점 희미해질 것이다. 그러나 계절 순환이 한 바퀴 완성될 때마다 더 심한 더위를 마주해야 한다. 어쩌면 빙하가 녹으며 갑자기 해안 도시가 잠길 수도 있다. 기후위기 대응은 늦어질수록 어렵고, 돈도 많이 든다. 헌재는 결정문에 “지금 더 적극적으로 임하는 것이 미래세대 기본권을 지켜주는 것”이라고 명시했다. 기후 위기 대응을 둘러싼 세대 간 다툼은 이미 시작됐다. 더 사랑하는 쪽이 진다는 말이 있다. 사랑스러운 아이들을 위해 이 싸움에서 기꺼이 지고 싶다.
최현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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