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현옥의 시선] 시장도 없고, 자유도 사라진 대출
금융 당국의 시곗바늘이 거꾸로 돌기 시작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아 이번 정부 들어 폐지했던 대출총량제를 3년 만에 부활시켰다. 금융감독원은 지난달 27일 가계대출 증가액이 연초 계획 대비 과도하게 늘어난 은행을 별도 규제하겠다고 밝혔다. 내년도 시행하는 은행별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 목표치를 낮추겠다는 것이다. 은행별로 대출 총량을 제한하는, 사실상의 총량 규제다.
부동산 가격 급등을 잡기 위해 문재인 정부 시절인 2021년 도입한 대출총량제의 경우 은행권의 가계대출 증가율을 5~6%로 제한했다. 한도가 찬 은행들이 대출 창구를 닫으며 ‘대출 한파’와 ‘대출 절벽’에 이은 ‘대출 경색’으로 시장은 일대 혼란을 겪었다. 은행에 돈이 없는 것도, 돈을 빌리려는 이가 담보나 신용이 없는 것도 아니었지만 대출이 막히며 ‘대출 난민’의 선착순 게임이 벌어졌다. 한도 내에서 돈을 빌려주다 보니 은행이 대출자를 임의로 대출자를 고르는 신용할당도 빚어졌다. 대출자들 모두 어려움을 겪었지만, 신용도가 떨어지는 중저소득층의 고통은 더 컸다.
이처럼 부작용이 상당한 대출총량제를 되살리겠다는 건 가계부채 급증과 부동산 가격 상승을 막기 위한 정부의 고육지책이다. 과도하게 늘어나는 가계부채를 관리해 금융 안정성을 꾀하겠다는 명분도 앞세웠다. 문제는 더 짙어지는 관치의 그림자다. 대출총량제는 당국이 은행에 주는 일종의 페널티다. 은행별로 여신 한도를 정해 줬던 과거 신용할당의 기억까지 어른댄다.
관치 논란이 커지는 건 금융당국이 대출총량제라는 강력한 카드를 꺼내 든 일련의 분위기 탓도 있다. 이복현 금감원장은 지난달 25일 KBS의 한 프로그램에 출연해 최근 은행권의 대출 금리 인상을 비판하며 강력한 개입 의사를 드러냈다. 이 원장은 “은행이 물량 관리나 적절한 미시 관리를 하는 대신 금액(금리)을 올리는 건 잘못된 것”이라며 “우리가 바란 건 (쉬운 금리 인상이 아닌) 포트폴리오의 관리”라고 강조했다. 은행 잘못이란 이야기다. 최상목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도 “은행이 손쉽게 금리 올리는 것을 선택했다고 들었다”며 이 원장을 옹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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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계 빚 급증에 대출총량제 부활
좁아진 은행 문에 풍선효과 우려
대출 오픈런에 ‘대출 난민’ 양산
」
하지만 경제와 금융 당국 수장의 ‘은행 탓’에도 최근의 가계대출 증가와 대출금리 상승은 정책 실패와 관치로 인한 시장 왜곡임을 부인할 수 없다. 올해 들어 가계대출을 급증을 주도한 건 디딤돌(매입)·버팀목(전세) 대출과 신생아 특례 대출 등 정책 대출이다. 1~7월 늘어난 주택담보대출의 70%가량을 차지한다. 여기에 자영업자 부담 등을 내세운 스트레스 DSR 2단계 도입 연기는 대출 막차 수요를 부추겼다.
은행의 조달금리인 시장금리 하락에도 은행이 최근 두 달간 대출금리를 20차례 이상 올린 건 금감원이 지난 7월 시중은행 부행장들을 불러 대출 확대를 경고하고, DSR 규제 이행 여부를 확인하기 위한 현장점검에 나선 이후다. 대출 가수요를 줄이려 당국의 눈치를 살피며 은행들이 가산금리 등을 올려 대출 문턱을 높인 것이다. 관치가 부른 대출금리 역주행이다.
그뿐만 아니다. 금융당국이 은행 간 금리 경쟁을 유도하려 올해 초 은행들이 내놓은 대환대출은 더 낮은 금리로의 대출 갈아타기를 부추겼다. DSR로 대출 한도가 줄어든 저소득층이나 청년층의 대출액을 늘릴 수 있게 당국의 주도로 도입했던 50년 만기 주택담보대출 상품도 대출 시장을 왜곡했다는 비판 속에 축소 운영됐다. 오락가락 정책 와중에 시장의 기능은 사라졌다.
금리를 올리지 않으면서 가계대출 증가를 막겠다는 금융 당국의 기세가 서슬 퍼렇지만, 대출총량제가 가져올 부작용은 작지 않다. 당장 내년도 대출 목표치 감소라는 규제를 피하기 위한 은행의 선택은 자명하다. 대출 문을 더 좁히고 문턱을 높일 수밖에 없다. 자율을 가장한 채 은행이 몸을 낮추면 당국의 뜻대로 대출은 줄어들 것이다.
그 틈바구니에서 3년 전처럼 금융당국 발 대출 절벽과 대출 경색에 맞서야 하는 대출 수요자에게 고난의 행군은 예정된 수순이다. 줄어드는 대출 한도와 높아지는 은행 문턱을 넘기 위한 대출 수요자의 종횡무진은 은행별·업권별 풍선효과로 이어지며 시장은 몸살을 앓게 될 것이다. 이미 일부 지방은행과 인터넷은행 등에서는 ‘대출 오픈런’이 벌어지고 있고, 은행 대출 금리 상승과 대출 제한으로 보험사 등 다른 업권으로 대출 수요도 늘고 있다.
부동산이 꿈틀하면 틀어막고 잠잠해지면 늘리다 보니, 이제 대출의 세계에는 시장도 없어지고 돈을 빌릴 자유도 사라졌다. 보이는 것은 ‘대출 난민’과 힘센 당국뿐이다.
하현옥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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