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현의 과학 산책] 맞다는 느낌
학창시절, 내겐 비밀스러운 취미가 있었다. 특기이기도 한데, 남은 수업 시간을 정확하게 맞추는 것이다. 지루한 수업의 중반쯤, 37분 정도 남지 않았을까 하고 시계를 보면 정확히 맞아 떨어졌다. 방법은 간단했다. 38분이라 생각하면 긴 듯하고, 36분이라면 짧은 듯했다. 미세하지만, 어느 쪽으로도 기울지 않는 느낌이 있었다. 수학에서 무언가를 이해하는 것도 크게 다르지 않다. 매번 자세한 과정을 기계처럼 따지는 수학자는 없다. 그보다는, 큼직큼직한 생각의 줄기를 따라가며 ‘맞다는 느낌’이 들 때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것이다. 맞고 틀림 사이를 갈라내는 이 느낌은, 모든 연구자가 연마해가는 생각의 칼날이다.
이 칼날의 예리함은 얼마나 믿을 수 있을까? 연극 ‘프루프’는 정신병으로 명철(明哲)을 잃어가는 노(老) 수학자의 이야기이다. 은퇴 후 혁명적인 결과를 발견하여, 딸에게 그 증명을 몰래 보여준다. 대가의 마지막 업적을 학계는 궁금해하지만, 딸은 끝까지 비밀을 지킨다. 알고 보니 그의 노트는 의미 없는 문장의 반복이었다. 맞다는 느낌, 생각의 칼날이 사라진 아버지의 허언이었다. 실존 수학자에게서도 이러한 에피소드는 드물지 않다. 찬란한 발견을 이루었던 수학자가 노년에 실수를 하기도 한다. 수백 년의 난제를 풀었다고 주장했지만, 허황한 오류인 경우도 있었다.
반면, 연세가 들면서 연구가 더 풍성해지는 분들도 많다. 오히려 생산성이 최고조로 향하기도 한다. 차이는 무엇일까. 이런 분들은 열린 마음으로 대화하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혼자서만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발견을 함께 이야기하며 공유한다. 대가라는 이름을 내려놓고, 의심이나 비판을 감사한 마음으로 곱씹어 본다. 나 역시 언젠가 맞다는 느낌이 무뎌지더라도, 끝까지 잊지 않으려 하는 점이다. 지식은 살아있다. 사람의 마음과 마음, 그사이에 깃들어 있다. 불완전하고 예측 불허이지만, 아름답게 늙어간다. 살아있는 모든 것처럼.
김상현 고등과학원 수학부 교수
Copyright © 중앙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요즘 송파는 ‘찐강남’ 아니다…계란 배달이 가른 운명 | 중앙일보
- '젊은 대장암' 한국 MZ가 세계 1위…이 음식은 드시지 마세요 | 중앙일보
- "사람 얼굴부터 보이나요?" 당신은 잡생각이 많군요 | 중앙일보
- 文은 뇌물, 김정숙은 타지마할...文부부 초유의 동시 수사 | 중앙일보
- 아내 찌른 남편 47층서 투신 사망…집안엔 어린 자녀 있었다 | 중앙일보
- [단독] '기밀유출' 정보사, 7년간 외부감사 ‘0’…文때 바꾼 훈령 때문 | 중앙일보
- "회사선 참다가 집에서 폭발" 번아웃보다 위험한 '토스트아웃' | 중앙일보
- 컵라면 물 가득 부어 끼니 때워…박근혜 어깨 본 의사는 “참혹” | 중앙일보
- 밤새 긁다가 피 뚝뚝…늘어나는 '중증 아토피' 치료법 찾는다 | 중앙일보
- 尹 ‘경제낙관론’이 놓친 3가지…성장 착시ㆍ가계빚ㆍ내수부진 [view] | 중앙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