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2035] 흰머리 위기
사실 요즘 위기감을 느끼고 있다. 석 달마다 돌아오던 염색주기가 점점 짧아진다. 올여름엔 두 달 만에 정수리가 눈 내린 듯 하얘졌다. 작은 키 때문에 주변에 우울한 정수리 사정을 너무 빨리 전파하고 있다. 엘리베이터에서 느껴지는 “너도 나이를 먹는구나”란 애잔한 눈빛.
“흰머리 아니고 새치”라고 버텨봤자 소용이 없다. 1년 차엔 녹취록처럼 선명하던 전날 밤 술자리 기억이 벌써 인파 속 블루투스처럼 툭툭 끊기고, 테니스 코트에선 두 시간만 뛰어도 관절이 시큰거린다. 어느 연구에선 26세부터 노화가 시작되고 34세에 가장 급격히 진행된다던데. 100세 시대, 적어도 마흔까지는 성장기여야 하는 것 아닌가. 대비 없이 온 노화가 왠지 억울하다.
위기감까지 느낀 건 노화를 바라보는 사회적 시선 탓이 크다. 흰머리는 미용실에서, 주름은 피부과에서 숨기는 게 미덕인 세상. 외모뿐인가. 50대에도 ‘20대 같은 체력’이, 60대에도 ‘30대 같은 열정’이 요구된다. 50대 같은 진중함, 60대 같은 멋진 주름이 어디 칭찬인 적 있던가.
젊음이 찬란한 건 본능이라지만 최근 노화는 그 자체로 악의 지경에 이르렀다. 의료대란을 다룬 기사에 “병원 못 가서 노인 인구나 줄면 좋겠다”는 댓글이, 자동차 사고 운전자가 고령이란 기사엔 “쓸모없는 노인이 쓸모있는 젊은이 죽이지 말고 면허 반납하세요”란 댓글이 달렸는데 ‘좋아요’가 엄청 찍혔다. 지하철 타는 노인? 무임승차 손가락질에 고개 못 들 죄인이다. 일부 논리는 일리는 있는데, 결론이 늘 우악스럽다. 노인을 사회 밖으로 밀어내는 거다.
다른 성별, 다른 국적 등 ‘이질감’을 향하는 게 혐오인데, 노인혐오는 보편·필연적 미래에 대한 혐오란 점이 특이하다. 고령화가 촉발한 노후 공포 탓이 크다. 고갈을 앞둔 국민연금, 이상 기후, 과밀·고가 주거 사정으로 눈앞의 노인보다 더 초라한 노년을 맞이할 두려움이다. ‘노후 불안’을 조사한 지난해 2월 한국갤럽 조사에선 전 연령대에서 30대(61%)가 가장 노후를 불안해했다. “미래세대를 위해 노인이 양보하라”는 식의 정치권 세대 갈라치기에 쪼그라드는 건 노년만이 아니다.
지금 노인을 사회 밖으로 밀어내도 흰 머리 들듯 또 한 세대가 금방 노인이 된다. 정부의 대책도 중요하지만, 순리대로 ‘나이 듦’을 존중하는 사회의 근육을 키우는 건 간단하게 나도 할 수 있는 일이다. 얼마 전 운전대를 잡는 대신 대중교통을 택한 80대 노인이 버스에서 하차하다 급출발한 버스 뒷바퀴에 깔려 사망했다. 기사 댓글 하나에 ‘좋아요’가 조용히 1000개 넘게 찍혔는데, 단순하게 옮겨 응원하고 싶다. ‘고령은 운전도 하지 말라면서 대중교통도 최소한의 배려가 없으면 어쩌란 건지. 모든 사람은 예외 없이 노인이 되며, 그 시간은 생각보다 짧습니다.’
성지원 정치부 기자
Copyright © 중앙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요즘 송파는 ‘찐강남’ 아니다…계란 배달이 가른 운명 | 중앙일보
- '젊은 대장암' 한국 MZ가 세계 1위…이 음식은 드시지 마세요 | 중앙일보
- "사람 얼굴부터 보이나요?" 당신은 잡생각이 많군요 | 중앙일보
- 文은 뇌물, 김정숙은 타지마할...文부부 초유의 동시 수사 | 중앙일보
- 아내 찌른 남편 47층서 투신 사망…집안엔 어린 자녀 있었다 | 중앙일보
- [단독] '기밀유출' 정보사, 7년간 외부감사 ‘0’…文때 바꾼 훈령 때문 | 중앙일보
- "회사선 참다가 집에서 폭발" 번아웃보다 위험한 '토스트아웃' | 중앙일보
- 컵라면 물 가득 부어 끼니 때워…박근혜 어깨 본 의사는 “참혹” | 중앙일보
- 밤새 긁다가 피 뚝뚝…늘어나는 '중증 아토피' 치료법 찾는다 | 중앙일보
- 尹 ‘경제낙관론’이 놓친 3가지…성장 착시ㆍ가계빚ㆍ내수부진 [view] | 중앙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