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리스 돌풍 이끈 ‘블랙 조이’...트럼프는 ‘이대남 분노’에 기대[특파원 리포트]
정치는 종종 마음의 일이다. 특히 선거철이 되면 이성적 판단이 아닌 감정이 정치를 추동한다. 지난달 19일(현지시간)부터 나흘간 미국 시카고에서 열린 민주당 전당대회는 온갖 감정이 들끓는 정치 현장이었다. 조 바이든 대통령의 TV토론 패배부터 시작해 전격적인 후보 사퇴,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의 후보직 승계까지 민주당원들은 불과 한 달 새 이어진 반전 드라마에 온갖 감정이 요동치는 걸 감내해야 했다.
민주당 전당대회 장악한 'Joy'
그리고 마침내 미 전역의 대의원들을 포함해 약 5만명이 운집한 시카고 전당대회에서 그들의 복잡했던 마음은 하나의 감정으로 수렴하기 시작했다. "기쁨의 대통령, 해리스(빌 클린턴 전 대통령)", "해리스, 기쁨을 안겨줘서 고맙습니다"(팀 월즈 부통령 후보), "기쁨을 선택합시다"(방송인 오프라 윈프리)
그렇게 '기쁨(Joy)'은 전대를 관통하는 핵심 키워드가 됐고, 중앙 연단은 물론이고 행사장 곳곳에서도 ‘기쁨’이란 감정 언어를 꺼내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전당대회장에서 만난 30대 여성 에블린 존슨은 “한 달 전만 해도 투표할 의지조차 없었다”면서 “해리스가 대선 후보로 등장하면서 순식간에 모든 게 달라졌고 승리에 대한 기대감으로 하루하루가 기쁠 따름”이라고 말했다.
‘기쁨’의 행렬은 공화당을 앞지르는 성과도 냈다. 시청률 조사기관 닐슨에 따르면 시카고 전당대회를 지켜본 시청자는 4일간 평균 2180만명. 지난 7월 말 열린 공화당 전당대회보다 약 300만명 더 많았다.
"백인이 훔칠 수 없는 기쁨" 흑인 주도 '블랙 조이'
특히 미국 역사 최초의 흑인 여성 대선 후보를 선출한 민주당은 흑인들이 주도하는 기쁨, 이른바 ‘블랙 조이(Black Joy)’ 흐름 속에서 선거전을 끌고 가고 있다. 흑인 여성 작가 트레시 미쳴 루이스-기게츠는 저서 ‘블랙 조이’에서 ”블랙 조이는 백인이 훔칠 수 없는 기쁨“이라고 정의했다.
전당대회 현장에선 그런 ‘블랙 조이’ 흐름을 어렵지 않게 포착할 수 있었다. 전당대회 둘째 날인 지난달 20일, 대선 후보를 확정하는 롤 콜(Roll call·호명투표)이 진행되던 중 무대 한쪽에서 랩 음악이 들려왔다. 조지아주 대표로 흑인 래퍼 릴 존이 히트곡 ‘턴 다운 포 왓(Turn down for what)’을 부르며 분위기를 끌어올리자 행사장을 가득 메운 흑인들은 물론 백인, 아시아계까지 열광하며 함성을 질렀다.
주최 측 자료에 따르면, 민주당 전당대회 주요 연사 10명 중 4명은 흑인이었다. 특히 최초의 흑인 대통령 버락 오바마와 그의 아내 미셸 오바마가 함께 연단에 올랐을 때, 대회장 곳곳에서는 춤을 추듯 몸을 흔들며 환영 인사를 보내거나 눈물이 범벅인 채 환하게 웃고 있는 흑인들이 눈에 띄었다. 미셸 오바마 여사가 ”트럼프가 현재 찾고 있는 일자리가 ‘흑인 일자리(black job)’일 수 있다“고 말한 대목에선 연설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을 정도로 큰 환호성이 터졌다.
지지율 상승 견인한 '블랙 조이'
실제 ‘블랙 조이’는 최근 한 달 새 해리스가 급부상하게 된 가장 강력한 배경 중 하나다. ‘블랙 조이’ 작가 루이스-기게츠는 중앙일보에 “오바마가 대통령에 당선됐을 때처럼 흑인들이 희망을 가질 때 ‘블랙 조이’ 운동은 결정적 선거 변수가 될 수 있다”며 “해리스가 후보로 나선 이번 대선 역시 분위기가 다르지 않다”고 짚었다.
그의 진단대로 ‘블랙 조이’ 현상은 유의미한 지지율 상승을 견인하고 있다. 지난 7월 CNN 여론조사에서 등록 흑인 유권자 지지율은 해리스 78%, 트럼프 15%로 지지율 격차만 63%p에 달했다. 반면 앞서 4월과 6월 CNN 조사에선 등록 흑인 유권자의 70%만 바이든을 지지했다. 한 달 만에 해리스를 지지하는 흑인 비율이 8%p 더 늘어난 것이다.
스테판 슈미트 아이오와주립대 교수(정치학)는 중앙일보에 “지난 한 달 사이에 민주당은 낙관주의와 긍정성을 순식간에 되찾았다”며 “‘블랙 조이’는 흑인 미국인들이 억압과 차별의 역사에 머물지 않고 더 나은 미래를 위해 낙관적으로 일해야 한다는 생각의 일부로서, 흑인 투표율을 끌어올리는 주요 요인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판 '이대남' 트럼프 우군 세력?
해리스가 ‘블랙 조이’, 즉 기쁨이란 감정을 선거 전략으로 활용하고 있다면,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은 분노의 감정을 통해 반전 기회를 모색 중이다. 그는 특히 18~29세 남성, 이른바 ‘미국판 이대남’의 집단적 분노에 코드를 맞춤으로써 지지율 반등을 노리고 있다.
실제 18~29세 연령대의 남녀 지지 성향은 엇갈린다. 뉴욕타임스-시에나대 8월 여론조사에서 여섯 개 경합주를 대상으로 분석한 결과, 해당 연령대 남성들은 여성에 비해 트럼프를 13%p 더 지지한 반면, 여성들은 해리스를 38%p 더 지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여성들의 지위 상승 등으로 사회적, 경제적으로 밀려나면서 분노의 감정이 커진 젊은 남성 세대가 상대적으로 강인한 이미지인 트럼프에 더 끌린다는 분석이다. 트럼프는 이런 이대남의 분노를 활용하는 선거 전략을 펼치는 중이다. 게임 유튜버 아딘 로스(23) 등 이른바 ‘남초’ 유튜브 채널에 잇따라 출연하는 것도 이대남의 분노를 겨냥한 행보로 풀이될 수 있다.
"'이대남' 지지세 백인에 한정될 수도"
다만 트럼프의 이 같은 전략은 인종적 한계에 부딪힐 수 있단 지적도 나온다. 슈미트 교수는 “여성의 지위 상승 등으로 인한 상대적 박탈감이나 분노의 감정은 젊은 백인 남성들을 트럼프 쪽으로 유인하는 요인이 될 수는 있다”면서도 “다만 성별보다 인종적 요인이 강한 흑인이나 라틴계, 아시아계 젊은 남성들까지 품어낼 수 있을 지는 의문”이라고 지적했다.
미국 정가에선 오는 11월 5일 치러지는 미국 대선은 결국 초박빙 흐름 속에 경합주의 특정 집단이 결과를 좌우할 가능성이 크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대선까지 앞으로 64일, ‘블랙 조이’를 선거 전략으로 품은 해리스가 경합주 흑인들의 대대적인 참여를 막판까지 끌고 갈 수 있을지, ‘이대남 분노’에서 틈을 노리는 트럼프가 상대적 관망세인 젊은 남성 유권자층을 적극적으로 끌어안을 수 있을지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시카고ㆍ워싱턴=정강현 특파원 fone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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