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권은 “전기 절실”, 지역은 “전자파 피해”… 꼬여버린 전력망 확충
지방 이어 수도권도 ‘전자파 포비아’
‘정부 주도’ 전력망 특별법은 국회 계류
매년 기승을 부리는 폭염과 인공지능(AI)·반도체 등 최첨단 산업 확대로 수도권 전력 수요가 치솟고 있지만 정작 필요한 전기를 공급하는 전력망 구축 문제는 점점 더 풀기 어려운 고차방정식이 되고 있다. 지역에서 생산된 전력을 반도체 클러스터·AI 데이터센터가 밀집한 수도권으로 옮기기 위해선 수백㎞ 길이의 송배전망과 추가 변전소 건설이 필수다.
그러나 송전선로·변전소가 놓이게 될 지역에선 ‘전자파 피해’를 우려한 주민 민원이 거세게 일고 있다. 지역 민심을 반영한 지방자치단체의 인허가 취소와 이어지는 행정소송이 하나의 흐름으로 자리 잡으면서 전력망 구축의 ‘골든타임’이 지나가고 있다는 목소리도 높다.
1일 산업통상자원부와 한국전력에 따르면 경기 하남시가 지난 27일 동서울변전소 사업 인허가를 불허한 ‘500kV(킬로볼트) 동해안~수도권 초고압직류송전선로(HVDC) 건설사업’ 등 5개 주요 전력망 구축 사업의 지연 기간은 평균 7.48년이다. 서해안 일대 발전소에서 생산된 전기를 경기 남부로 보내는 ‘345kV 북당진-신탕정 송전선로’ 건설은 지연 기간이 150개월이다. 주민 민원으로 입지 선정이 78개월 지연됐고, 지자체의 개발행위허가 불허·공사중지 명령으로 대법원 소송전까지 벌어지며 72개월이 더 늦어졌다.
경기 시흥시에서 인천 송도 바이오클러스터로 전력을 끌어오는 ‘345kV 신시흥-신송도 송전선로 건설사업’도 노선 변경 문제로 66개월째 표류 중이다. 한전은 2016년부터 2022년까지 북당진 등 각종 송전선로 건설이 지연돼 값싼 전력을 이용하지 못해 약 2조원을 더 썼다는 입장이다. 한전 관계자는 “지역에서 발전된 저렴한 전기를 쓰지 못해 불필요한 비용이 더 발생했다”고 말했다.
전력 수급에 난항을 겪는 사업들은 모두 수도권의 고(高)전력 수요를 맞추기 위한 핵심 사업이다. 정부는 AI·데이터센터·전기차 확대 등으로 지난해 98.3GW(기가와트) 수준인 전력 수요가 2036년 118.0GW로 20% 넘게 늘어날 것으로 본다. 특히 삼성전자·SK하이닉스가 480조원을 투입하는 용인·평택 반도체 클러스터의 전력 수요만 15.4GW로 예상된다. ‘전기 먹는 하마’로 불리는 데이터 센터도 70% 이상이 수도권에 집중돼 있다. 이에 정부는 2036년까지 총 56조5000억원을 들여 동·서해안 일대 원전 등에서 수도권으로 전력을 끌어오는 대규모 송배전망을 구축한다는 계획이다.
그러나 고압 전력망 구축이 늘어날수록 지역 주민들의 전자파 우려도 커지고 있다. 특히 당진 등 발전소 소재 지역을 넘어 고압선로·데이터센터가 들어서는 수도권 지역 주민의 민원도 확대 추세다. 앞서 인천 부평·경기 부천시에선 전자파 발생 우려에 따른 주민 민원이 제기되며 2021년 6월 345kV급 중선로(전선을 땅에 묻은 선로) 이설 등에 합의하는 데 47개월이 걸렸다. 경기 안양시도 LG유플러스 데이터센터 구축 과정에서 인근 아파트 주민들의 민원이 제기되며 14개월간의 갈등 끝에 지난해 9월 전자파 차폐시설 별도 설치 등의 합의점을 도출했다.
전력 수급의 ‘지역 미스매치’와 ‘전자파 포비아(공포증)’ 현상은 이제 한전이 해결할 수 있는 영역을 넘어선 상황이다. 김동철 한전 사장은 지난 28일 기자간담회에서 “사장인 나도 지하에 345kV 변전소가 있는 한전아트센터에서 근무한다”며 “전자파 우려는 흑색선전이자 악의적 괴담에 불과하다”고 강변했다. 하지만 한전이 할 수 있는 현실적 조치는 노선 변경이나 행정소송 대응 등에 불과한 상황이다.
전문가들은 꼬일 대로 꼬여버린 전력망 건설과 지역 주민의 민원 문제를 중앙정부가 나서서 해결해야 한다고 말한다. 올 상반기 누적 부채만 200조원에 달하는 한전의 갈등 조정 능력이 제한적인 상황에서 정부가 직접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야는 22대 국회 들어 ‘국무총리실 소속 전력망위원회’를 신설하고 주민 보상을 현실화하는 내용을 담은 ‘국가전력망 확충 특별법’을 잇달아 발의했다. 그러나 관련 입법 논의는 지지부진한 상태다. 조홍종 단국대 경제학과 교수는 “AI 등 전력 수요 확대에 따른 송배전망 건설 추진과 이로 인한 갈등은 미국 일본 등 주요국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라며 “주민 보상 등 갈등 해소에 걸리는 시간을 앞당길 수 있는 법적 토대가 하루빨리 마련돼야 한다”고 말했다.
세종=양민철 기자 liste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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