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사라지고, 달팽이와 개미만 남았다
[김성호 기자]
랩소디가 처음 동양에 소개됐을 때 광시곡(狂詩曲)이란 이름을 붙였다고 전한다. 미칠 광(狂)에 시(詩)와 곡(曲)을 붙였는데 이중 미쳤단 글자가 왜 붙었는지를 두고 의아해 하는 이가 많았다. 기실 이는 일본 저잣거리에서 흔히 읊어졌던 자유시의 일종인 광시(狂詩)로부터 유래한 것으로, 진지하게 미쳤다는 뜻보다는 우스꽝스럽고 어처구니 없다는 용례에 가깝다고 하겠다.
요컨대, 오늘날 틀을 깨는 무엇을 보고 감탄과 당혹을 섞어 '미쳤다'고 표현하는 것과 비슷한 일이다. 그랬던 광시의 이미지가 훗날 전해진 랩소디의 인상과 겹쳐서 들렸는지 번역명으로 광시곡이란 이름이 붙은 것이다. 말하자면 그 시절 동양인에게 랩소디란 곡의 형태는 자유분방하고 새롭단 인상이 강했던 모양이다.
▲ 인간 불화적 랩소디 스틸컷 |
ⓒ 서울국제여성영화제 |
여성계를 중심으로 그 저변을 꾸준히 넓혀가고 있는 서울국제영화제가 주목한 작품인 만큼 제목부터 내용과 형식에 이르기까지 오늘의 관객 앞에 유효한 무엇을 던지는 작품이리란 기대가 따른다. 어째서 이 영화는 '인간 불화'란 표현과 함께 '랩소디'란 이름을 얻게 되었는가.
짧은 영상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앞은 달팽이의 것이고, 뒤는 개미의 것이다. 영상은 각각의 종, 여러 개체 무리가 살아가는 모습을 관찰자의 시선에서 비춘다. 달팽이는 폐공장, 개미는 아파트처럼 꾸며놓은 지극히 인간적인 삶의 공간 가운데 이들 종이 자리한 모습을 그린다.
▲ 인간 불화적 랩소디 스틸컷 |
ⓒ 서울국제여성영화제 |
개미는 달팽이와 달리 발빠르게 움직인다. 더듬이를 바짝 세우고 여기저기 바쁘게 오가는 이 종 개체들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짐작하긴 어렵다. 다만 달팽이와 개미를 비추는 영상을 무려 17분 동안 보는 과정을 통하여 관객은 이들 종이 인간과 맺는 관계부터, 영상의 배경이 된 공간에 인간은 없고 이들 동물은 있는 상황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짚어나가게 된다. 명확하지는 않지만 생물종 감소며 기후 변화, 생태계가 처한 극심한 변동 등 오늘의 위기와 영상이 연관이 없지 않으리란 추정 또한 하게 된다.
근 몇 년 간 지속해 발표된 저술과 연구, 문학작품 등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인간 이후의 세계'에 대한 실험적 표현물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이와 같은 작품이 완성도며 상징성이 높은 것부터 난해하기만 하고 별다른 성취를 없는 것까지 수없이 발표돼 온 상황에서 <인간 불화적 랩소디>가 거둔 성과며 위상이 어떠한가를 짐작하는 게 흥미로운 과제일 수 있을지를 생각해본다.
▲ 인간 불화적 랩소디 스틸컷 |
ⓒ 서울국제여성영화제 |
그렇다면 왜 달팽이와 개미인가. 17분의 영상 가운데 이들이 특별히 주목할 만한 목적을 갖고 작업을 하는 모습이 보이지도 않지 않은가. 무엇이 다른 많은 생물종을 두고서 이 두 종을 카메라 앞에 세운 것인지가 궁금하였다.
그러나 감독의 답을 보면 명확한 의도나 의지는 없었던 게 아닌가 싶다. 김 감독은 "아이가 있는데, 캐스팅은 어린이집에서 생물학습을 하라고 달팽이 알을 주신 걸 썼다"며 "그 알 안에서, 그러니까 커피잔 안에서 스물 몇 마리가 나와서 캐스팅이 자연스럽게 이어졌다"고 말했다. 개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그녀는 "개미도 '학습용 개미' 이런 걸로 키워보고서 (개미가) 뭘 무서워하는지 공부도 해가면서 군체를 데려와 촬영한 뒤 방사했다"고 답했다. 즉 두 종의 선택에는 우연이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는 이야기다.
▲ 서울국제여성영화제 포스터 |
ⓒ 서울국제여성영화제 |
감독이 여성이란 걸 제외하고는 영화제와 작품 간의 연관을 찾기 어려운 탓인지 다른 곳으로 생각이 이어졌다. '인간 불화'라는 제목의 문구와 함께 작품의 제작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전시의 조건이었다는 혐오란 말까지 듣고 나니 이 두 종이 인간 여성과 맺는 어우러짐을 생각하게 된 것이다. 기실 달팽이와 개미는 남성에겐 꽤나 친숙한 종이 아닌가 말이다. 그럼에도 이 두 종과 혐오를, 그 특징까지 지목해 언급한 감독의 표현이 지극히 여성적 관점이 아닌가 여기게 된 것이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 주변 남녀에게 폭넓게 물어본 결과 남성은 물음에 답한 열 명 전부가 전혀 혐오감이 없으며 대부분은 친숙하다고 답한 사실을 확인했다. 반면 여성들은 절반 이상이 혐오감이 있다고 말했고, 친숙하다고 말한 이가 아무도 없었다. 그렇다면 성별에 따른 종에 대한 호오가 존재하는 것일까. 포유류에 대해 물은 결과는 전혀 달랐으니 어쩌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굳이 논의를 더 깊이 이어가진 않으려 한다.
<인간 불화적 랩소디>로부터 의미를 찾는다면 어디까지나 왜 달팽이와 개미가 오가는 모습에 17분간이나 카메라를 가져다 대는지, 그에게 불명확한 시적 문장과 음악을 가져다 붙이는지, 그것이 오늘의 인간과 어떻게 불화하고 있는지를 거듭 생각하게 한다는 점에 있을 테다. 모호한 연결이 도리어 인간의 사고를 활성화할 수 있음을 깨닫게 되는 건 이 영화의 가치가 어디에 있는지를 짐작케 한다.
그로부터 온갖 상상의 나래를 뻗쳐보는 건 실험영화가 주는 몇 안 되는 미덕일 테다. 여성과 달팽이, 개미, 또 인류 문명과 불화, 랩소디라는 쉬이 정의할 수 없는 음악의 갈래, 그 모두가 작품을 본 이들과 상호작용하는 모습이 어떠한 것일지 궁금하다. 그 작용이 크고 깊을수록 이 영화의 예술성 또한 크고 깊어지는 것이리라고 나는 기대를 품어보는 것이다.
덧붙이는 글 |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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