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가 주목했던 노동운동가의 변절... 충격적 부고기사 [김종성의 '히, 스토리']

김종성 2024. 9. 1.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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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성의 히,스토리] 친일파의 재산- 김경식

[김종성 기자]

일제강점기 후반에도 뉴라이트 현상과 비슷한 일이 있었다. 일제가 대중을 상대로 전쟁을 선동하는 현장에는 이광수나 홍난파처럼 친일보수로 전향한 독립운동가 출신들이 허다했다.

1910년의 대한제국 멸망에 가담한 원조 친일파들은 1920년대에 대거 퇴조했다. 세월이 흐른 결과로 그렇게 된 측면도 있지만, 상황의 변화 때문에도 그렇게 됐다. 1919년 3·1운동은 원조 친일세력을 앞세운 일제의 지배정책이 실패했음을 증명했다. 친일파들이 대중을 설득하는 데도 실패했고 대중의 동향을 감지하는 데도 실패했음을 입증했다.

그 뒤로는 그들의 영향력이 감소했고, 이로 인해 정치적 무대를 잃은 친일 귀족들이 도박에 빠져 파산하는 현상까지 두드러졌다. 1929년에 조선총독부가 친일 귀족들을 구제하고자 창복회라는 단체를 만든 사실은 이 귀족들을 주축으로 하는 원조 친일세력의 쇠락을 반영한다.

일본을 전율케 했던 김경식

그런 상황 변화에 뒤이어 1930년대 들어 대중의 정서를 잘 알고 그 속에서 독립운동을 했거나 진보운동을 했던 활동가들이 친일진영 내에서 두각을 보이기 시작했다.

결과를 놓고 보면, 그들을 전면에 내세운 것은 일제 입장에서 볼 때는 '신의 한 수'였다. 그들이 선전요원으로 투입된 가운데 강제징용·위안부·강제징병 같은 강제동원이 대규모로 관철되고, 이 덕분에 일본군은 수월하게 군사력을 충원하고 일본 대기업들은 노동력을 공짜로 활용했다. 미쓰비시 등이 대재벌로 성장한 원동력은 이 같은 '인건비 제로' 정책에 힘입은 바 컸다.

한국인 강제동원이 대규모로 관철된 것은 일차적으로는 일본 공권력의 힘에 기인하지만, 앞에 나서서 바람잡이 역할을 한 전향 친일파들의 기여도도 무시할 수 없다. 원조 친일파들이 나서서 전쟁 참여를 독려했다면 동원의 효과는 분명히 높지 않았을 것이다.
 원산총파업
ⓒ 위키미디어 공용
그런 이익을 일제에 선사한 전향자 중 하나가 김경식(金瓊植)이다. 일제강점기 최대 파업인 1929년 원산 총파업의 주역이 바로 그다. 1950년 1월 29일 사망한 그의 죽음을 알리는 그해 2월 3일자 <동아일보> 기사 '김경식 씨 서거'는 "원산의 항일 대파업을 일으키어 파업기간 백일이라는 세계적 기록을 내어 국제적으로 큰 충동을 주고 일인들을 전율케" 했다고 그를 평했다. 그랬던 인물이 제국주의로 전향해 친일 보수가 됐던 것이다.

원산 총파업을 촉발시킨 것은 1928년 9월 7일 문평제유공장에서 발생한 노동자 폭행이다. 영국인이 소유한 이 정유회사의 현장감독은 일본인들이었다. 저임금 및 장시간 노동에다가 일본인 감독들의 폭행에 시달리던 한국인들은 아옥(兒玉)이라는 한자를 쓰는 현장감독 고타마가 그날 노동자를 구타한 것에 격분해 궐기했다. 120여 명이 폭행 사건 해결과 노동조건 개선을 외치며 파업을 일으켰고, 사측이 요구를 수용하면서 28일 파업이 종결됐다.

그런데 회사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그렇게 3개월이나 시간이 흘러갔다. 이런 상태를 원산 총파업으로 발전시킨 쪽은 김경식 등이 이끄는 원산노동연합회다. 원산노련이 일으킨 파업은 1929년 1월 13일부터 4월 6일까지 노동자 2200여 명을 참여시킨 역사적인 파업으로 기록됐다. 이때 김경식의 모습이 얼마나 자신감 넘쳤는지는 그해 1월 18일자 <동아일보> 7면 상단 인터뷰에서 느낄 수 있다.

"금번의 해결 방법은 실로 묘연하야 회사 측에서 공장을 다른 곳으로 옴기든지, 본회의 세포 단테인 문평제유로동조합원 일동이 회사로부터 해고되든지 량자 중에 하나일 줄 생각합니다. 만약 전부 해고된다면 그 직공 로동자는 원산에 이속할 외에 타도(他道)가 업습니다."

회사가 원산을 떠나든지 노동자들이 해고되든지 둘 중 하나라고 말했다. 원산노련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사측이 원산을 떠나게 만들겠다는 엄포성 발언을 한 셈이다.

그런데 그가 말한 두 가지 해법 중 어느 것도 노동자들에게 이롭지 않다. 노동자들이 이기면 회사가 원산을 떠날 수 있다고 했다. 노동자들의 일자리를 불안케 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런 말을 하면서,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잃으면 자리를 옮겨주는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고 말했다. 듣기에 따라서는 일자리를 보장해줄 수 있다는 의미로 비칠 수도 있다. 깊은 생각에서 나온 말이 아니라고 볼 수도 있고, 자신감을 보여주는 말이라고 볼 수도 있다.

전향한 친일파인 김경식의 이력은 <친일인명사전> 제1권에 수록돼 있다. 이 책의 김경식 편을 살펴보면, 경기도 수원 출신인 그가 원산에서 그런 발언을 한 배경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친일인명사전>에는 그의 출생 연도가 미상으로 표기돼 있지만, 1929년 7월 21일자 <조선일보> 2면 상단에는 48세로 표기돼 있다. 1882년 임오군란을 전후해 출생한 것으로 보인다.

원산은 그가 태어나기 전인 1880년에 개항됐다. 그의 인생은 이 개항장을 무대로 다종다양하게 전개됐다. 원산객주조합 이사, 백산무역(주) 원산지점장, 원산노동회 회장, 원산점원운동회 심판부장, 원산노동회 이사, 청남주식회사 원산지점장, 동아일보사 원산지국장, 원산무역(주) 대주주 등의 경력을 쌓았다.

원산을 무대로 노동자들은 물론 기업들과도 깊은 유대를 맺었다. 이 정도면 이 수원 사람이 원산을 꽉 잡았다고 평해도 될 것이다. 그 외에 조선민립대학 설립운동 발기인, 조선노농총동맹 창립대회 집행위원, 조선노농동맹이 아닌 조선노동총동맹의 중앙검사위원, 주식회사 흥업사 감사도 역임했다. 다소 도를 벗어난, 자신감 넘치는 인터뷰의 배경을 이런 데서도 확인할 수 있다.

원산 총파업은 세계적 사건이었다. 전국의 노동단체들은 물론이고 프랑스·소련·중국·일본의 노동단체들도 원산 노동자들을 후원하고 응원했다. 상대 측도 막강한 지원을 받았다. 일제의 경찰·재향군인·청년회·소방대는 물론이고 군대까지 기업들을 지원했다. '국제 노동자 대 일제 국가권력의 대결'로 확산된 이 싸움은 4월 8일 원산노련 대의원회의 파업 종결로 막을 내렸다.

비무장 노동자 조직이 제국주의 공권력을 상대로 그렇게 오래 싸웠다는 점에서는 노동자들의 승리였다. 투쟁의 기조를 끝까지 이어가지 못했으며 조합원들의 대규모 이탈을 막지 못했다는 점에서는 노동자들의 패배로 볼 수밖에 없는 사건이었다.

세계적 사건 이후 친일파로 전향
 1950년 2월 3일 자 <동아일보> 기사 "김경식씨 서거"
ⓒ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2월 7일 구속된 그는 1심에서 징역 8월을 받은 뒤 2심인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6월을 받았다. 그런 이후에 그는 친일파로 전향했다. 그 뒤 그에게 생긴 일에 관해 <친일인명사전>은 "1936년 2월 '전향자 보호 구제'를 목적으로 결성된 사상전향자 단체인 백악회에 참여하고 4월에 백악회 주간을 맡았다"고 알려준다. 친일 전향자에 관한 논문인 지승준의 '1930년대 사회주의진영의 전향과 대동민우회'(1998년 <사학연구> 제55·56합집호)는 이렇게 설명한다.
"백악회의 사업 내용은 전향자에 대한 보호 사업으로서 거주지의 알선 및 여비의 보조, 요양의 알선과 치료비의 보조, 취직 알선 및 산업자금의 대여, 복교·취학의 알선, 차입, 가족 위문, 변호인의 소개·알선, 수양회 및 좌담회의 개최, 농원·농숙(農塾)의 경영 등이었다."

친일로 전향해 백악회에 가입하면 각종 금전적 혜택에 더해, 귀농·귀촌해 농장이나 농촌 글방을 개설하는 기회까지 주어졌다. 친일재산으로 살아갈 기회가 제공됐던 것이다.

김경식은 이런 단체의 수혜자가 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책임자 자리까지 맡았다. 다른 사람들도 전향해 친일재산으로 살아가도록 여건을 조성하는 일에 나섰던 것이다. 그는 이 분야에서 전문성을 쌓아나갔다. <친일인명사전>은 "1936년 8월 전향자 보호·구제를 넘어서 일본정신을 기본으로 한 국가주의 신(新)지도이론을 사상운동으로 전환할 목적으로 백악회가 대동민우회로 확대·개편될 때 이각종 일파와 대립하게 되면서 별도의 민우회를 조직하고 이사장을 맡았다"고 설명한다.

일제의 압박과 수감 생활의 결과이기는 하지만, 그는 항일 노동운동을 배신한 인물이다. 노동운동을 배신한 뒤 전향자 보호 사업에 뛰어들었으니, 두 번 다시 노동계에 발을 들여놓아서는 안 되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는 개의치 않았다. 위의 1950년 부고 기사는 그가 "해방 후 민국정부의 노동국장의 자리를 잠시" 역임했다고 말한다. 고용노동부의 전신인 사회부 노동국의 초대 국장이 되어 노동정책을 관장했던 것이다.

김경식 등이 담당했던 친일전향자 관리 사업은 이승만 정권에 의해서도 벤치마킹됐다. 이 정권은 주로 항일운동가 출신인 좌파 전향자들을 국민보도연맹으로 묶어 관리했다. 그러다가 한국전쟁이 발발해 더 이상의 관리가 힘들어지자, 보도연맹원 학살이라는 유명한 만행을 서슴없이 저질렀다. 김경식 등이 걸은 길은 그런 만행의 초석을 닦는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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