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8점 쏘면 동료가 10점 쏜다"…양궁 金 이끈 심리 프로그램
파리대첩 이끈 스포츠과학의 힘
2024 파리 올림픽에서 대한민국은 최소 선수단(145명)을 파견하고도 역대 최고 성적(금 13, 은 9, 동 10, 종합순위 8위)을 올렸다. 물량이나 감(感)이 아닌 ‘스포츠과학’의 승리였다. 그 배후에는 한국스포츠과학원(KISS·Korea Institute of Sport Science)이 있었다. 스포츠과학원의 박사급 연구원들은 각자의 전공을 살려 담당 종목의 훈련-멘탈-생활-재활-경기에 이르기까지 세심하게 지원했고 이는 메달 풍년으로 돌아왔다. 한국의 메달밭이었던 총·칼·활(사격·펜싱·양궁)을 중심으로 스포츠과학의 활약상을 소개한다.
가본 적 없는 미지의 무대 미리 경험
◆사격 ‘현지 적응’이 금3 원동력=사격은 이번 대회 금3개를 포함해 역대 올림픽 최고 성적을 올렸다. 대한사격연맹은 올림픽 대표 선발전 방식을 바꿔 결선에 강한 선수가 뽑힐 수 있도록 했다. 반효진(16·공기소총 금) 오예진(19·공기권총 금) 같은 신예들이 깜짝 선발됐지만 이들은 국제대회 경험이 부족했다. 더구나 샤토루 사격장은 우리 선수들이 한 번도 뛰어보지 못한 미지의 무대였다.
스포츠심리학 박사인 장태석 연구원은 대회 수개월 전 샤토루 사격장을 찾아 경기장을 미리 촬영해 보여주려고 했다. 그런데 현지의 통제가 엄격했다. 매일 사격장 직원을 찾아가 인사하고, 전통부채 같은 기념품을 선물하는 등 정성을 다했다. 결국 촬영 허가를 받았을 뿐 아니라 나중에는 직원들이 먼저 여기저기 데리고 다니면서 설명을 해 줬다고 한다. 장 박사 팀은 경기장 뒤 산에 올라가 드론을 띄워 사격장 전체를 촬영하기도 했다.
장 박사는 VR 촬영만 한 게 아니라 ‘고 스루’라는 프로그램을 작동해 구글맵의 로드뷰 같이 경기장 곳곳을 선수들이 직접 눈으로 익힐 수 있도록 했다. 이를 통해 사격장 사대 높이, 표적지를 비추는 조명의 밝기와 색깔, 사대를 향해 내려오는 조명의 각도 등을 알 수 있었다. 진천선수촌 사격장의 표적지 조명 색깔도 올림픽 경기장과 같은 것으로 바꿔 훈련했고, 종목별 사대별 조명의 밝기에 따라 모자를 쓸 건지 말 건지 시뮬레이션 해 보기도 했다.
또 권총의 경우 공학박사 팀에 의뢰해 경기용 총과 똑같은 모양과 무게의 모조 총을 3D 프린터로 제작했다. VR용 고글을 쓰고 모조 총을 잡으면 언제 어디서나 샤토루 사격장에서 총을 쏘는 것과 거의 똑같은 훈련 환경이 만들어졌다. 이번 대회 권총에서만 금 2(오예진·양지인), 은 2(김예지·조영재)개가 나온 게 우연이 아니다. 장 박사는 “올림픽 기간에 현장에서 만난 선수들이 ‘처음 온 곳인데 매일 훈련했던 곳처럼 편안하게 경기할 수 있었다’며 고맙다는 말을 해 줬다. 대한체육회-사격연맹-대표팀-스포츠과학원이 혼연일체가 된 게 사격 최고 성적의 비결이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펜싱 민첩성 강화, 양궁은 ‘불안감 해소’=올림픽의 신(新) 효자종목이 된 펜싱은 파리에서도 금2, 은1개로 이름값을 했다. 펜싱은 체력, 특히 민첩성 강화에 초점을 맞췄고 만족할 만한 성과를 거뒀다. 선수들은 각 종목에 맞는 준비운동과 정리운동, 체력 강화 프로그램이 따로 있는데 이들 프로그램은 경험이나 감에 의존한 면이 있었다. 스포츠과학원 펜싱 지원팀은 이 부분을 파고들었다. 0.01초 차로 승부가 갈리는 펜싱에서는 민첩성이 가장 중요한데 그 동안의 민첩성 훈련은 모든 종목에 공통된 거라 차별화 포인트를 찾기 어려웠다.
‘내가 8점 쏴도 동료가 10점’ 믿음 내면화
펜싱 팀은 셔틀런(왕복달리기)을 해도 펜싱 피스트(경기장) 길이인 14m로 맞춰서 경기 감을 느낄 수 있도록 했고, 스텝과 잔발뛰기 훈련도 경기에서 일어날 수 있는 동작과 가장 비슷한 쪽으로 맞췄다. 그 결과 선수들은 실전에서 미세한 민첩성의 차이를 느꼈고, 이것이 남자 사브르 개인·단체 금, 여자 사브르 단체 은이라는 결과로 이어졌다.
양궁은 이번 대회에 걸린 금메달 5개를 싹쓸이했지만 대회 전 가장 염려했던 쪽은 여자 단체전이었다. 임시현·남수현·전훈영 모두 올림픽 출전 경험이 한 번도 없었다. 더구나 여자 단체는 1988년부터 시작된 ‘단체전 10연패’를 이뤄야 한다는 엄청난 부담감을 안고 있었다.
양궁은 세계최강을 유지하기 위해 기상천외한 훈련법을 고안하고 이를 실전에서 활용해 왔다. 강변 훈련, 야구장 훈련은 기본이고 이번 대회를 앞두고는 로봇과 1대1로 대결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선수 각자의 내면에서 스멀스멀 올라오는 불안감을 잡는 건 슈팅 훈련과는 별개의 영역이었다. 이 지점에서 스포츠과학원의 맏언니 김영숙 연구원이 나섰다. 오랜 세월 양궁 선수들과 함께한 김 박사는 개인 상담을 통해 불안의 실체를 대면하도록 했다. 여자 선수들 불안의 기저는 ‘우리가 10연패를 못 이루면 어쩌지?’ ‘내가 한번 실수해 지게 되면 어쩌지?’ 하는 것이었다. 김 박사는 “개인 면담을 통해 부담과 불안감을 다스리는 법을 공유했고, 팀 차원에서는 ‘내가 8점을 쏴도 동료가 10점을 쏠 거다’는 믿음을 내면화하도록 프로그램을 짰다”고 말했다. 예를 들어 뒤에 있는 동료를 믿고 눈을 감고 선 채로 뒤로 넘어가는 동작을 하면서 서로에 대한 신뢰를 쌓아가는 식이었다.
■ “스포츠과학도 AI가 대세 될 것, 효율적 적용 고민해야”
「
지난 8월 16일 찾아간 한국스포츠과학원(KISS)은 이삿짐을 풀고 자리를 잡느라 어수선했다. 1980년 창립 이래 이어져 온 ‘태릉 시대’를 마감하고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 내 올림픽문화센터로 이전한 지 며칠 되지 않아서였다. 송강영 원장은 “태릉선수촌 안에 있다가 선수촌이 진천으로 옮기면서 우리만 섬처럼 떨어져 있었다. 이번에 대한체육회와 각 경기단체, 한국체대 등이 있는 올림픽공원으로 옮기면서 교통과 연구 여건이 좋아진 만큼 더 큰 책임감과 역할을 부여받게 됐다”고 말했다.
Q : 대한체육회의 올림픽 성적 예상이 크게 빗나갔다.
A : “체육회의 메달 예상(금 5개)은 우리와 조율한 게 아니었다. 나도 ‘5개보다는 더 딸 것 같은데’ 싶었지만 혼선을 우려해 우리 자체 예상치는 내놓지 않았다. 이번에 메달이 나온 10개 종목 중 수영을 뺀 9개 종목을 스포츠과학원에서 지원했다. 역대 최고 성적에 보탬이 된 것 같아 뿌듯하다.”
Q : 반면 일본은 ‘금 20개’ 목표를 정확히 달성했는데.
A : “일본스포츠과학원(JISS)은 2001년 설립돼 우리보다 한참 늦게 시작했지만 정부의 파격적인 지원을 받아 높은 수준을 자랑한다. JISS는 박사급 인력이 90명에 달해 KISS(44명)의 두 배 이상이고 예산도 우리보다 세 배나 많다. 우리는 10년 동안 박사급 인력이 한 명도 충원되지 않았다.”
Q : 스포츠과학이 점점 더 발전하는 것 같다.
A : “올림픽을 비롯한 국제 스포츠 무대는 갈수록 각국의 경제력과 과학기술력을 경쟁하는 장으로 바뀌고 있다. 파리에서 ‘엘리트 체육의 위기 속에 역대 최악의 올림픽이 될 것’이라는 예상을 뒤집은 건 우리 스포츠과학의 힘이었다. 앞으로 스포츠과학은 AI가 대세가 될 텐데 우리는 아직 그 준비가 덜 된 것 같다. 어떤 분야의 AI 전문가를 채용해 어디에 적용하는 게 가장 효율적일까를 고민해야 한다.”
Q : 스포츠과학원의 역할과 기능은?
A : “대한민국 스포츠의 미래와 방향을 제시하는 게 우리의 역할이다. 국가대표 선수들의 경기력 향상은 물론 장애인·꿈나무 선수들이 과학적 훈련을 통해 기량과 멘탈을 끌어올릴 수 있게 하는 것도 우리의 임무다. 동시에 스포츠 정책·산업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이론을 연구해 논문과 보고서를 내고 이를 실전에 적용하는 일을 한다. 나는 직원들에게 늘 ‘KISS가 대한민국 스포츠의 허브이자 테스트베드가 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Q : 축구선수 출신이고 이곳에서 조교를 한 적도 있다고 하던데.
A : “조교 출신으로 대학 교수를 거쳐 원장이 된 건 내가 최초인 것 같다. 그만큼 책임감을 느낀다. 파리에서 8위를 했다고 해서 엘리트 스포츠의 위기가 아닌 게 아니다. 한국 스포츠의 패러다임을 바꿀 수 있는 정책 대안을 제시하고, 스포츠 선진국들도 배우고 싶어 하는 선도적인 스포츠 시스템을 만들어 내고 싶다.”
」
정영재 기자 jerr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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