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교학점제 전면 시행과 상대평가 확대, 엇박자 아닌가요?
'대안'이라는 표현 하에 경쟁과 입시몰입교육을 지양하고, 자치와 상생을 위한 교육을 하며, 학생들이 현재를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안전한 삶의 터전을 만들어주기 위해 노력합니다. 이곳에서 여러 존재들과 좌충우돌하며 교육활동을 하고 있는 모습을 있는 그대로 담담하게 전하고자 합니다. <기자말>
[안사을 기자]
"입시지옥 대한민국에서 고교학점제의 본질은 실현될 수 없을 것 같아. 우리 학교에서는 가능할 줄 알았어. 우린 대입에 크게 흔들리지 않는 학교니까. 그런데 우리도 마찬가지일 것 같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생겼어."
몇 달 전 점심시간, 한 동료 교사에게 허탈한 말을 건넸다. 고교학점제 및 2022개정 교육과정 적용을 위한 연수에 다녀오고 난 다음 날이었다.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바로 '2028대입개편안'에 의한 평가 방침 수정에 관한 내용이었다. 고교학점제의 본래 취지와 이번 개편안과의 괴리에 대해 간단하게나마 적어보고자 한다.
▲ 고교학점제 사이트의 '고교학점제 소개' 첫 화면 |
ⓒ 고교학점제 사이트 화면 캡처 |
특성화 학교로 분류되는 본교는 2022년부터 이미 학점제 체제로 운영 중이었다. 고교학점제가 모든 학교에 전면 적용되는 시점을 준비하는 과정에 있기도 하다. 교과목, 편제, 평가 등에서 완전히 달라지는 시점을 앞두고, 기존의 시수제에서 학점제로의 일부 개편을 통해 과도기를 보내고 있는 셈이다.
특히 올해는 2025학년도 신입생의 3개년 교육과정을 확정하고 기존의 2015개정 교육과정에서 사용했던 교과목 대신 학기제로 바뀌는 2022개정 교육과정 적용을 위해 교과목과 편제를 완전히 바꾸는 작업을 진행 중이다. 스무 번이 넘는 작은 협의가 진행되었고 그 안에서의 토론은 상당히 뜨겁다.
애초 고교학점제는 학생들의 선택을 중시하여 수업 시간에 조는 아이 없이 활기찬 교실과 학교를 만들겠다는 취지가 분명했다. 그런데 전면 실시를 당장 반년 앞둔 지금, 학교 현장은 엄청난 혼란으로 가득하다. 그 원인은 명확하다. 각 과목의 평가 방식이 갑자기 바뀌었기 때문이다.
2025학년도부터 적용되어야 하는 고등학교 각 과목의 내신 성적 산출 방식에 대해, 지난해와 올해의 결정이 달라졌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공통과목은 절대평가와 석차 등급을 병기하지만 그 외 과목은 순수한 절대평가로만 실시하기로 했다. 이는 애초 고교학점제가 가지는 본질과 매우 관련이 깊다.
석차 등급 없이 절대평가, 즉 성취평가제로만 성적을 내게 되면 학생들은 자신의 흥미와 적성에 맞게 수업을 선택해서 들을 수 있다. 소인수 교과도 가능하다. 그런데 2023년 말 발표된 2028대입개편안은 충격 그 자체였다. 예술, 교양을 제외한 거의 모든 과목에 상대평가를 병기하겠다는 내용이었다.
교육부는 오히려 이 결정에 대해 '경쟁을 완화'하는 방식이라고 설명했다. 언뜻 보면 설득력이 있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따져보면 정반대다. 교육부의 주장은 기존 9등급제에서 5등급제로 바뀌므로 학생들의 부담이 경감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공통과목에 한한 내용이다.
선택교과에서는 없어질 줄 알았던 상대평가가 부활한 것으로, 이제 아이들은 흥미와 적성에 맞는 과목이 아니라 내신 등급이 잘 나오는 과목을 선택하게 될 것이다. 고교학점제의 본질이 훼손되는 것이다. 이는 교육과정의 편제에도 고스란히 영향을 미친다. 다양한 소인수 교과를 배치해주고자 하는 학교의 고민이 소용없게 되었다.
알기 쉽게 예를 들어 보겠다. 고교학점제가 전면시행되면 자신이 전공하고 싶은 분야가 확실한 학생들을 대상으로, 원하는 분야를 깊이 탐구할 수 있도록 5~7인 정도의 적은 수로 수강할 수 있는 수업을 개설해주고자 했다. 그런데 이제는 그렇게 할 수 없다. 아니, 그렇게 하면 오히려 아이들에게 손해다. 그 정도의 수로는 1등급이 발생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학생들은 2학년이 되어 자신이 듣고 싶은 과목을 선택할 수 있는 시기가 되어도, 최소한 10명 이상이 수강하는 과목을 들어야 한다. 본교는 한 학년 정원이 45명으로, 1등급을 발생시킬 수 있는 과목을 선택과목으로 편성하려면 15명 이내 정원의 과목 3개를 편성하여 15명 이내의 학생들을 고르게 분포시켜야 한다.
결국 학생의 흥미와 적성은 온데간데없고 대입 내신 산출을 위한 목적에 본질이 잠식당하는 꼴이 될 것이 분명하다. 우연히 학생들의 흥미가 딱 3분의 1씩 나뉘어있다면 모를까, 결국 아이들은 배우고 싶은 과목 대신 내신이 잘 나오는 과목을 선택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현실은 현재도 마찬가지이니 큰 상관이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런데 고교학점제라는 거대한 변화를 가져오면서, 철석같이 학생의 선택을 중시하겠다고 하지 않았던가. 이건 기대감을 줬다가 다시 빼앗는 격이니 학교 현장의 충격이 작지 않은 것이다.
▲ 의대정원이 N수생에 미치는 영향은? 25일 서울 한 학원가에 의대관련 안내문이 붙어 있다. 이날 종로학원은 2025년 수능 'N수생'이 의대 모집 확대로 21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할 수도 있다고 전망했다. 재학생과 N수생의 수능, 모의고사 접수 상황 등을 통해 예측해본 결과 N수생을 17만7천849∼17만8천632명으로 추정했다. |
ⓒ 연합뉴스 |
본교는 입시몰입교육을 지양하기로 선언한 학교로서, 이러한 혼란에 크게 영향을 받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다. 어쩌면 대한민국 어느 학교에서도 하기 힘든, 고교학점제의 본질을 실현하는 학교가 될 것 같다는 기대감을 갖기도 했다. 의욕적으로 교육과정 담당자를 자처했고 학생들이 행복하게 공부하는 학교를 꿈꿨다.
대입을 위한 맹목적 경쟁에서 벗어난 학교의 모습을 세상에 보여주고 싶었다. 학생들이 순수한 호기심을 동기로 하여 공부를 시작하는 학교. 무언가를 완성하고자 하는 자신의 욕구를 통해 끝까지 과제를 완성하는 학생들이 넘쳐나는 곳. 그 속에서 교사는 안내자로서, 함께 연구하는 학습 동료로서 존재하는 그런 학교 말이다.
그런데 참 역설적이게도 이번 대입개편안으로 인해 우리 학교조차 경쟁의 소용돌이에 아이들을 밀어 넣게 되었다. 아니, 우리 학교가 다른 곳에 비해 더욱 타격을 크게 받게 되었다. 기존에 성취평가제로 운영해오던 많은 과목을 5등급 상대평가제로 바꾸어야 할 위기에 처했기 때문이다.
2학년을 예로 들었을 때, 2015개정 교육과정 체제에서는 총 17개 과목 중 등급 산출이 되는 과목은 6개에 불과했다. 그런데 2022개정 교육과정 체제에서는 총 13개 과목 중 11개 과목에 대해 상대평가를 실시해야 한다.
심지어 '의사소통', '뮤지컬공연실습', '통합기행' 등과 같은 대안교육 전문교과에서도 없던 상대평가가 생겨난다. 내재적 동기를 통해 학생 스스로 열정을 가지고 성장하고 있던 여러 과목에 대해 시대에 역행하여 학생끼리 경쟁을 시켜야 한다고 생각하면 정말이지 앞날이 캄캄하다.
이쯤 되면 아무도 믿기 힘들겠지만, 사실 고교학점제는 입시 위주의 교육 현장을 정상화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학생이 자기가 공부하고자 하는 분야를 탐구할 수 있도록 하는 참으로 간단명료한 목적을 가진 제도이다. 하지만 이번에도 역시 대입을 위한 수단으로, 학벌 위주 사회를 존속시키기 위한 제도로 전락할 것만 같다.
이로 인해 우리 학교는 지금 교육과정 편제 보고 마감 시한을 지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혼란 속이니, 수많은 협의 후에도 결론이 나지 않고 있다. 항상 학교 철학과 교육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이야기에서부터 출발하는 우리 학교이지만 이번 만큼은 가치와 현실 속에서 갈팡질팡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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