컵라면 물 가득 부어 끼니 때워…박근혜 어깨 본 의사는 "참혹"
■ ‘박근혜 회고록’ 다시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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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정사상 첫 여성 대통령이자 첫 탄핵 대통령.
박근혜 전 대통령은 2016년 국정농단 사태에 휘말리며 기약 없는 파국의 길을 걸었습니다. 4년 9개월간의 수감 생활을 마치고 2021년 12월 31일 사면된 박 전 대통령은 국내 언론 최초로 더중앙플러스 '박근혜 회고록(https://www.joongang.co.kr/plus/series/187)'을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공개한 바 있습니다.
중앙일보 독자 여러분을 위해 재임 기간 동안의 국정 비화와 최순실 게이트 등 박 전 대통령의 솔직한 심경이 담긴 회고록을 각 파트별로 엄선하여 1화를 전문 무료로 공개합니다.
‘The JoongAng Plus(더중앙플러스)’는 중앙일보의 역량을 모아 마련한 프리미엄 지식 구독 서비스로, 재테크·육아·건강 등 134개에 이르는 다양한 시리즈를 구독 후 자유롭게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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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부 - 수감생활편〉
컵라면 물 가득 부어 끼니…의사는 내 어깨 보고 “참혹”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17878
동생 지만 면회도 거절했다…박근혜가 감추고 싶었던 것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18944
박근혜, 희미한 미소 띤 채 “내일 감옥 가는 건가요?”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19160
尹 “참 면목없고 늘 죄송했다”…당선인 돼 찾아온 ‘특검 팀장’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19421
」
「 〈제6부〉나의 구치소 이야기 」
처음 서울구치소에 들어갔을 때는 구치소 담당 여성 계장이 쓰던 사무실을 비우고 그곳에 병원 간이침대를 놓고 이틀간 있었다. 구속영장이 발부될지 안 될지 확정되지 않은 상황이었는데, 그렇다고 나를 일반 수감자들과 함께 둘 수 없으니 구치소 측에서 임시로 마련한 장소였다. 그 방에는 CCTV가 설치돼 있었고, 며칠 후 옮긴 독방에도 CCTV가 있었다. 나로서는 식사부터 수면까지 24시간 내내 감시받는다는 것이 너무나 정신적으로 힘들어 이것을 치워달라고 요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규정상 CCTV를 설치하는 것은 흉악 범죄 등을 저지른 수감자들에게 적용된다고 한다. 그런데 이를 나에게 적용하는 것은 너무 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영하 변호사가 구치소 측에 강하게 항의해 CCTV는 가리는 것으로 결정됐다. 처음 며칠 동안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낯선 환경 탓도 있었지만, 앞으로 어떤 일들이 기다리고 있을지에 대한 이런저런 생각으로 도무지 잠을 청할 수 없었다. 잠을 자지 못하니 조금은 멍한 상태로 매일 접견을 오는 유 변호사를 만나 재판 진행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조금씩 구치소에 적응해 가려고 노력했다.
구치소서 “음식 짜지 않게 해달라” 설문 적기도
낯선 환경에 잘 적응하는 데 가장 중요한 게 음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평소 음식을 싱겁게 먹었다. 그런 내게 구치소 음식은 상당히 자극적이었으며 짜다고 느껴졌다. 처음 며칠간은 거의 반찬을 먹지 않고 맨밥만 조금 먹었고, 반찬을 물에 씻어 조금씩 먹었다. 구치소는 수용자들의 평균적인 입맛에 맞춰 음식을 준비할 수밖에 없고, 또한 남자 수용자가 많기 때문에 아무래도 바깥 음식보다는 간이 셀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구치소에서 가끔 수감자들에게 음식에 대한 불편 사항을 묻는 설문지를 돌리곤 했는데 그때마다 나는 음식을 좀 짜지 않게 해달라고 적어냈지만 별 효과가 없었다.
그나마 몸 상태가 좋을 때였다면 짠 음식도 어떻게든 잘 먹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이도 나이인 데다 구치소에서 몸 이곳저곳이 나빠지다 보니 식사를 하고 나면 소화가 영 시원찮았다. 평소 위가 좋지 않아 알약도 잘 먹지 못하던 나였기에 짠 음식은 위에 많은 부담을 주었다. 결국 끼니 때마다 나오는 식사를 다 먹지도 못하고 3분의 1 정도만 먹고 잔반 통에 버리는 것이 반복되었다. 그러다 보니 점점 입맛을 잃었고 소화 기능도 저하됐다.
컵라면에 물 많이 부어 끼니 때워
밥 대신 미숫가루를 타 먹거나, 컵라면을 구매해 물을 많이 부어 최대한 싱겁게 먹는 것으로 대신하기도 했다. 구치소에 들어오기 전 나는 평소에 라면을 먹은 적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구치소에서는 달리 방법이 없었고, 그나마 싱거운 라면만이 먹을 만했다.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는 날이 이어지다 보니 결국 다른 병이 생기고 말았다.
나중에 출소한 뒤에 만난 몇몇 분과 구치소 이야기를 하던 중에 내가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 고생했다고 하자 내게 사식(私食)을 시켜서 먹지 그랬느냐고 했다. 그분들은 구치소에도 사식이 들어갈 수 있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구치소 규정상 바깥 음식은 일절 재소자들에게 들어갈 수 없다. 다만 구치소 안에서 수용자들이 제한된 범위 내의 물품을 신청해 먹을 수는 있다. 햄이라든지 멸치 무침, 오징어채, 조미 김 같은 것들을 사 먹을 수 있었다. 다만 이것도 나에겐 마찬가지로 자극적이었다. 식사나 수면 부족으로 건강이 눈에 띄게 나빠지기 시작해 구치소 안에서 판매하는 종합비타민을 구입해 먹으면서 어떻게든 견디려고 노력했다.
구치소는 여름과 겨울을 지내기가 특히 어렵다. 바깥보다 냉난방 시설이 잘 갖춰져 있지 않기 때문에 많은 분이 내가 여름이나 겨울을 어떻게 날지 걱정하는 편지를 보내주셨다. 나는 다른 사람보다 더위를 많이 타지는 않지만 반대로 추위를 심하게 타는 체질이라서 겨울을 나는 것이 상당히 고통스러웠다.
목도리 대신 수건 감아…추위에 잠 깨 지새우기도
내가 있는 방은 복도 끝이어서 외풍이 다른 곳보다 심했다. 너무 추웠지만 뾰족한 방법이 없어 구치소에서 구매할 수 있는 기모 소재의 옷을 입고 그 위에 두툼한 재킷을 껴입고 견뎠다. 목에는 타올로 목도리를 대신해 감았다. 잘 때도 양말을 신은 채로 잠을 청했고, 추위에 잠을 깨 그대로 밤을 지새운 적도 많았다. 온수는 샤워할 때만 이용할 수 있었는데 샤워실은 난방이 되지 않아 빨리 샤워를 하고 방으로 돌아와 머리를 말리곤 했다.
구치소에서 가장 힘든 것은 역시 건강 문제였다. 건강 유지를 위해 안에서 간단한 운동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방이 비좁기도 했고 몸 상태가 좋지 않아 방안에서는 운동할 수가 없었다. 하루 1시간 정도 다른 재소자들과 구분되어 있는 작은 공터에서 가볍게 걷는 것으로 운동을 대신했다. 입에 맞지 않아 제대로 먹지 못하는 상태에서 운동도 제대로 할 수가 없자 점점 몸이 지쳐가고 망가져 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좁은 방에서 오래 지낸 탓인지, 아니면 나이 탓인지 어깨와 허리를 비롯하여 무릎·팔·발목 등 근골격계 여러 군데에서 참기 힘든 통증이 나타났다.
몸이 너무 안 좋으니까 누군가 와서 “같이 가자”며 내 몸을 잡아당기면 몸이 다 부스러질 것 같은 생각마저 들었다. 살면서 그런 약한 생각이 들었던 것은 처음이었다. 그런데 60세 넘은 내가 아무 탈이 없을 수는 없었다. 구치소에 와서 들은 이야기인데, 튼튼한 장정이 와도 1년이 지나면 몸이 망가져서 나간다고 한다.
왼쪽 어깨 통증 끊어질 듯…빨래도 못 널었다
허리·무릎도 좋지 않았지만 왼쪽 어깨는 정말 끊어질 듯 아팠다. 조금이라도 무거운 책을 들거나 무언가를 옮기려 하면 ‘탁’하고 통증이 왔다. 밤에도 이 때문에 잠을 제대로 자기가 어려웠다. 한참 상태가 안 좋을 때는 팔을 들어 올리는 것도 힘들어 교도관에게 내 방에 걸려 있는 빨랫줄을 내려달라고 부탁했을 정도였다. 도저히 팔을 올려 빨래를 널 수가 없었다. 어깨 때문에 팔을 제대로 쓰기가 어려우니 운동이라고 해봐야 팔을 최소한의 반경으로 움직이는 수준이었는데, 이조차도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접견 온 유영하 변호사에게 내 상태를 설명하자 유 변호사는 내게 아픈 곳이 있으면 참지 말고 있는 대로 교도관에게 이야기하라고 했다. 그러다가 정말 큰병이 되면 서로 불편해지고 곤란한 상태가 올 수 있다고 했다. 나는 처음 구치소로 오는 날부터 나로 인해 교도관들이 힘들어지면 안 된다고 생각해 될 수 있는 한 개인적인 부탁은 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파도 참으면서 견딜 수 있을 때까지 견뎌보자고 생각을 했던 것이다. 유 변호사의 말을 듣고 난 다음부터는 내가 아프다는 것을 교도관들에게 이야기한 것 같다.
내가 어깨 통증을 호소하자 2018년 5월 서울 구치소 측에서 처음엔 외부 병원 진료 의뢰라는 것을 이용해 서울 성모병원으로 가 진료를 받게 해주었다. MRI 촬영 결과 회전근개 파열과 관절염 증세가 발견돼 통증 부위에 스테로이드 치료를 받았다. 하지만 통증이 가시지 않고 계속돼 1년 이상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통증이 지속되었다. 정말로 ‘불에 덴 것’ 같은 통증과 ‘칼로 살을 베는 것’ 같은 통증이 목과 어깨 부위에 나타났고, 다리 부분은 저려서 밤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해가 바뀌어 2019년이 되자 통증은 점점 심해졌고, 결국 다시 외부 진료를 나가 통증 부위에 대한 정밀 검사를 받았다. 그 결과 어깨뿐만 아니라 고관절·무릎·발목 등 여러 부위에 병변이 발견됐고, 그 부위에 다시 스테로이드 주사를 맞았다. 특히 좌측 어깨 부분에는 2018년 11월과 2019년 5월 두 차례에 걸쳐 관절경내 스테로이드 주사를 맞았지만 왼쪽 팔은 점점 더 경직되고 들어 올리기조차 힘들었다. 결국 나는 의료진의 권고를 받아들여 어깨 수술을 하기로 결정하고 이를 구치소 측에 알렸다. 그래서 유 변호사가 구치소 의료과장, 서울 성모병원 의료진과 상의해 수술 날짜를 잡았다. 수술을 받기 위해선 집행정지가 필요하다고 해 2019년 9월 초 검찰에 집행정지를 신청했다. 그 전에도 집행정지를 신청했지만 불허된 적이 있어 조금은 걱정됐지만 수술하기 위해 신청하는데 불허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어깨 근육 거의 끊어져…의사 “참혹한 수준”
검사가 구치소로 와 구치소 의무과장이 입회한 자리에서 여러 가지 질문을 했다. 검사가 검진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해 제출하면 형집행정지심의위원회에서 이 보고서를 토대로 집행정지 여부를 결정한다. 유 변호사는 “검사가 의사 자격이 있는 분이고 매우 진지하게 문진하는 것으로 보아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라고 나를 위로했다.
하지만 결과는 불허였다. 수술이 필요해 신청한 것인데 이것마저 불허되자 순간적으로 가슴 속에 한스러운 감정이 솟구쳤다. 당시에 뼈저리게 체험한 것인데 심한 통증이 계속되면 사람의 머릿속은 오로지 통증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게 된다. 불에 덴 것 같은 통증과 칼로 살을 베는 듯한 통증, 저린 증상으로 정상적인 수면을 하지 못해 하루하루가 너무 힘들었다. 게다가 언제 구치소를 나갈지 아무런 기약도 없는데, 끝이 안 보이는 고통을 무조건 참고 견디려니 형용할 수 없이 비참한 기분이 들곤 했다. 수술 날짜는 잡혔는데 집행정지가 불허되자 구치소 측도 무척이나 당황하는 것 같았다.
결국 어깨는 상태가 날로 악화돼 도저히 버티기 어려운 상황이 됐지만 더는 형집행정지를 신청할 수 없었다. 그러던 중 구치소 측에서 외부 병원 진료를 상부에 건의하겠다고 했다. 그 후 법무부 측에서 이를 받아들여 2019년 9월 16일 어깨 수술을 위해 서울성모병원에 입원하게 됐다. 당시 나의 어깨 수술은 김양수 교수가 담당했다. 김 교수가 어깨에 대한 정밀검사를 한 결과 왼쪽 어깨 근육이 거의 다 끊어져 “참혹한 수준”이었다고 한다. 다행히 수술은 잘 끝났고, 김 교수는 그 이후에도 세밀하게 치료해주었다. 수술 후 재활치료도 성모병원에서 최선을 다 해주었고, 식사도 영양사가 신경을 많이 써 준 것으로 전해 들었다. 다들 너무 고마운 분이고 이 자리를 빌려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병원에 입원했을 때 잊을 수 없는 일도 있었다. 미국 시애틀에 거주하는 한 교민 부부는 내가 입원한 후 미국에서 들어와 성모병원 맞은편에 있는 메리어트 호텔 방을 잡고 한 달간 매일 내가 있는 병실을 바라보았다고 한다. 너무나 고마워 유 변호사에게 그분들을 만나 감사하다는 말씀을 전해달라고 부탁도 했다.
내가 입원해 있을 당시 내 건강이 걱정돼 연락해 온 분도 있었다. 내가 재판받을 때 하루도 빠지지 않고 방청했던 서상기 전 의원, 허원제 전 정무수석과 김재수 전 농림부 장관이 먼발치에서나마 나를 보고 싶다는 말을 유 변호사를 통해 전해왔다. 그래서 입원하고 한 달이 지날 무렵 병원 창가에 서서 병원 입구 쪽을 바라보자 세 분이 병원 입구에서 내가 있는 병실을 올려다보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너무 고맙고 감사하면서 오랜만에 사람에 대한 정을 느꼈다.
약 70일간의 치료를 마치고 12월 3일 구치소로 돌아왔다. 병원 측에서는 내가 아직 회복되지 않았다며 재수감되는 것을 완곡하게 반대했다. 이 과정에서 주치의에게 항의가 많이 들어오고, 구치소 측은 구치소대로 나의 장기 입원에 대한 세간의 시선 때문에 입장이 매우 곤란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병실에서 함께 생활할 수밖에 없는 교도관들도 많이 힘들고 고생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물론 조금 더 재활치료를 받았으면 하는 마음은 있었지만, 다시 구치소로 돌아오는 것에 대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지금도 나는 어깨 관리에 많은 신경을 기울인다. 조금만 무리하면 통증이 찾아오기 때문이다. 처음에 수술했을 때만 해도 다시 정상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주치의의 말대로 어깨 근육이 끊어지고 많이 망가지기 전에 수술을 받았더라면 지금보다 상태가 훨씬 나았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이미 지난 것을 되돌릴 수는 없다.
황교안 대행 땐 의자 반입 불허, 문재인 땐 허용
허리도 옥중에서 많이 나빠졌다. 처음 구치소에 들어갔을 때 의자를 주지 않아 맨바닥에 앉았더니 점점 상태가 좋지 않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재판이 주 3~4회씩 강행군으로 이어진 것도 허리에 무리를 줬다. 하루 10시간가량 불편한 자세로 앉아 있으니 한 번 재판을 받고 나면 허리에 통증이 밀려왔다. 무릎도 퉁퉁 부어 잘 구부려지지 않았다.
입감 초부터 구치소 측에 의자를 요청했는데 구치소에서는 상부에 의자 반입에 대해 보고했는데 허가가 나지 않는다며 미안해했다. 유 변호사는 “의자는 의료 보조기구라서 충분히 넣어줄 수 있고, 과거 김대중 전 대통령도 감옥에 있을 때 의자가 허용됐는데 왜 반입해 주지 않느냐”고 몇 차례 구치소 측에 항의했다. 하지만 상부에서 허가하지 않는데 실무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은 한계가 있었고, 그들도 뾰족한 해결책을 찾을 수 없었다. 위에서 허락하지 않는데 구치소에서 이를 어기면서까지 의자 반입을 해 줄 수는 없었으리라 생각하며 참고 견뎠다. 그렇다고 해도 의자 하나 넣어주는 것이 그렇게 자신들의 입장이 곤란해지는 일인지 당시에는 너무 야속했다.
내가 계속해서 허리 통증을 호소하고 의자에 관해 이야기하자 하루는 유 변호사가 헌책방에서 커다란 국어대사전 3개를 구해 넣어주었다. 그 위에 담요를 깔고 의자 대용으로 사용했다. 아쉬운 대로 그 위에 앉아 낮은 간이 탁자에 책을 놓고 독서하곤 했는데 조금 책을 읽다 보면 사전이 미끄러지면서 자세가 흐트러지곤 했다. 문재인 정부로 정권이 바뀌고 난 뒤인 2017년 7월 하순께 상부에서 허락했다고 하면서 구치소 측에서 의자를 들여보내줬다. 그리고 의자에 맞춰 구치소 측에서 책상도 새로 만들어 반입해줬다. 예전보다는 한결 편하게 책을 볼 수 있어서 허리와 무릎 상태가 전보다 나아졌다.
문재인 정부에서는 의자 반입을 허락했는데, 황교안 총리가 권한대행으로 있던 정부에서는 구치소 측에서 의자 반입을 하게 해달라고 수회에 걸쳐 보고했음에도 끝내 이를 외면하고 허락하지 않았는지 지금도 나는 그 이유가 궁금하다.
지금도 허리가 여전히 좋지 않다. 하지만 이 부위를 수술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해 달성으로 이사 온 후 운동으로 근육을 단련하는 노력을 하고 있다. 그 덕분인지 현재는 2시간 정도 의자에 앉아 책을 보거나 사람들과 대화를 해도 그리 큰 통증은 느끼지 않는다.
수감 고통 속에도 지지자 격려편지에 감동
수감 4년 차였던 2020년은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전 세계가 난리 났을 때다. 나도 아스트라제네카 백신을 두 번 맞았다. 그런데 하루는 병원 통원 치료를 위해 외부 병원에 갔는데 그때 동행했던 교도관 한 분이 코로나에 확진돼 나는 20일 정도 병원으로 이송돼 자가 격리를 했다.
사면되기 전의 구치소 생활은 표현하지 않았지만 정말 고통스럽고 견디기 힘들었다. 다만 그런 상황 속에서도 그나마 버티고 힘을 낼 수 있었던 것은 나를 믿고 격려해주신 국민의 지지 덕분이었다. 재판을 받으러 나올 때마다 하루도 빠짐없이 재판을 방청하던 지지자분들은 내가 구치소로 돌아갈 때마다 “대통령님, 힘내세요”라고 격려해줬는데 정말 큰 힘이 됐다.
구치소에 있는 동안 받은 8만여 통의 격려 편지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한 통도 빠짐없이 읽으며 큰 감동과 힘을 얻곤 했다. 그중 기억에 남는 것은 어떤 중증 장애인의 편지였는데, ‘자신도 이렇게 포기하지 않고 살아가니 대통령께서도 힘을 내셨으면 좋겠다’는 내용이었다. 읽는 동안 가슴이 뭉클해졌다. 이런 분들이 계시는데 내가 스스로 포기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곤 했다.
그 외에도 4대 중증을 앓는데 보험처리가 되어 부담을 덜었다든가, 직장 때문에 아이를 어디에 맡겨야 할지 걱정이었는데 아이 돌봄 교실 덕분에 안심하게 됐다든지 하는, 내 임기 중 정책에 대한 고마움을 적은 사연들을 읽을 때도 참 기쁘고 고마웠다. 그리고 어느 분은 월스트리트 저널 등 외신에 난 박근혜 정부에 대한 평가 기사들을 스크랩해 보내주기도 했다. 나는 일일이 답장을 하고 싶었지만 8만 통이나 되는 편지에 일일이 답장을 보낸다는 게 현실적으로 어려웠다. 그래서 감사함을 전하기 위해 이 중 몇 통을 추려 답장을 쓰고 이를 책(『그리움은 아무에게나 생기지 않습니다』)으로 낸 것이다. 일일이 답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이렇게 나의 마음을 전할 수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 책은 많은 국민이 관심을 갖고 읽어주셨다고 들었다. 책을 읽고 난 뒤에 병원으로 편지를 보낸 분들도 많았다. 모두 감사할 따름이다.
▶〈7부 - 수감생활편〉 다음 편이 궁금하시다면, 아래 링크를 참조하세요.
동생 지만 면회도 거절했다…박근혜가 감추고 싶었던 것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18944
박근혜, 희미한 미소 띤 채 “내일 감옥 가는 건가요?”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19160
尹 “참 면목없고 늘 죄송했다”…당선인 돼 찾아온 ‘특검 팀장’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19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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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근혜 회고록’ 다시보기 목차
「 〈인터뷰 영상 풀버전〉
박근혜 前대통령 침묵 깼다 “탄핵 제 불찰, 국민께 사과”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195342
〈1부 - 최순실과 탄핵〉
“최순실과 이혼한 줄도 몰랐다”…朴이 밝힌 ‘정윤회와 인연’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71726
문건 배후엔 김무성·유승민? 朴 “촉새 女의원의 음해였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03665
“대통령님, 비덱이 뭔가요?” 잡아뗀 최순실, 난 믿었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13853
“이러려고 대통령 했나 자괴감” 참모 말린 이 말 직접 넣었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14162
시중에 나돈 ‘탄핵 찬성’ 62명…날 힘들게 한 명단 속 그 이름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14472
최순실 일탈 왜 보고 안됐나…어렴풋이 짐작 가는 게 있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17551
〈2부 - 정책편〉
내가 삼성병원장 꾸짖었다? 사진 한장이 괴담 만들었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09249
난 욕 먹고 연금개혁했는데…文, 손 하나 까딱 안 하더라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05050
“지구상 이런 나라 몇 있을까”…내가 국정교과서 마음 먹은 순간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12773
〈3부 - 국내 정치편〉
안대희·이완구 다 날아갔다…“가슴 쓰렸다” 총리 잔혹사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199668
朴 “내가 혼외자 터뜨려 채동욱 찍어냈다? 황당하단 말도 아깝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199967
통진당 해산 반대한 문재인…朴 “위기때 실체 드러나는 법”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00295
박근혜가 직접 택한 남자…“그가 내 앞에서 울먹였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03922
그날 밤, 연락 끊은 유승민…그와의 관계 그때 파탄 났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06770
유승민 그리 키울 일 아니었다…2016년은 정말 되는 게 없었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07097
“내가 알던 진영 아니었다” 朴 놀라게한 측근의 돌변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07448
〈4부 - 외교안보편〉
“위안부 합의 들은 적 없어” 윤미향 오리발, 말문 막혔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196717
朴 커터칼 테러때 도착한 쇠고기, 거기엔 아베 편지 있었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196960
안 그래도 ‘최순실’ 터졌는데…朴, 왜 논란의 지소미아 집착했나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197297
개성공단 폐쇄, 내가 선수쳤다…뻗대던 北, 그제야 꼬리내렸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05335
김관진 “협상 결렬” 문 박차자, 김양건 “뭔 결렬” 팔 붙잡았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05632
그토록 공들여 성공한 첫 방미…하필 그때 윤창중이 사고쳤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08606
中 전승절때 구석 밀려난 北, 최용해는 나와 눈 마주치자…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10748
한국형 전투기가 되겠냐던 文, KF-21 출고식서 “우리가 개발”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11087
가발까지 쓴 표창원·손혜원…춤추며 ‘사드 괴담’ 퍼뜨렸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12466
〈5부 - 세월호의 기억편〉
“내가 정윤회와 호텔서 밀회?”…朴 직접 밝힌 ‘세월호 7시간’ (상)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01531
세월호 그날 청와대 왜 갔나…朴 밝힌 ‘최순실 미스터리’ (중)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01874
朴 “나도 흥분해 경질했다”…교육장관 ‘황제 라면’ 진실 (하)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02193
〈6부 - 검찰 수사편〉
朴 “왜 더러운 사람 만드냐” 검사 면전서 서류 확 밀쳤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15628
최순실과 눈도 안 마주쳤다, 그녀는 중요한 말은 쏙 뺐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15911
“딱 하나 사실대로 말 안했다” 검찰조사 그날, 박근혜의 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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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물죄, 이미 정해져 있었다” 판사도 놀란 朴 최후 입장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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