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평생 유족들의 '보호자'로... 34년생 인혁당 생존자의 삶
[하성태 기자]
▲ 다큐 <인혁당 생존자, 34년생 박중기> 인터뷰 중인 박중기 선생. |
ⓒ 네번째달 |
성인이 되고 만난 동지였던 김정남 전 청와대 교육문화수석은 헌쇠 박중기 선생 산수문집 <헌쇠 80년>(2013년 출간)에서 이런 회고를 남겼다. 박중기 선생은 운신의 폭이 넓어지거나 경제적 여유가 조금이라도 생길 때면 희생자들의 부인과 자식들을 찾아 위로했다. 인혁당 사건 당시 고문 당한 후유증으로 별세한 류진곤 선생 아들 류동민씨와 김용원 선생의 아들 김민환씨가 이를 잘 기억하고 있었다.
"'어느 해 겨울 (상처투성이가 된 우리 가족 앞에 나타나), 어느 날 나를 백화점으로 불러 외투를 사 입혔고 또 언젠가는 탕수육에 자장면을 사 먹였다. 대학에 합격한 겨울, 자신이 경영하는 고물상 뒷골목에서 쇠고기를 사 먹이고(...), (대학) 입학금이 든 봉투를 내 손에 쥐어 주었다. 약간 과장에서 말하자면, 그는 갑자기 끊어져 버린 내 유년의 시간, 그리고 홍대 앞이라는 공간과 '지금의 나'를 이어주는 유일한 끈이었다." (<헌쇠 80년> 류동민씨 글 중에서)
사건 발생 전, 아버지와 함께 박 선생의 가게를 찾았던 유년 시절의 즐거웠던 기억을 소환한 류씨의 헌사다. 같은 경험을 공유하는 김민환씨 역시 박중기 선생을 "인생의 방향을 잡아주신 키다리 아저씨"이자 "진정한 스승이시고 보호자이십니다"라며 감사를 전했다.
통일민족민주 운동에 몸담은 후배들도 같은 평가였다. 아버지 세대에게 느낄 수 없었던 "진정한 부성"을 느꼈다거나 2000년대까지 공적인 활동을 두드러지게 하지 않았던 그를 만났을 때의 감동을 기꺼이 털어놓은 후배들도 부지기수였다.
인혁당 사건 피해자들의 명예회복이 이뤄지고 보상금이 지급됐을 당시, 유가족들은 돈을 모아 선생님께 드렸다. 선생은 적지 않은 그 돈을 다시 기부했다. 영화 < 1987 >의 실제 주인공 중 한 명인 전병용 전 교도관은 그를 "내가 올곧게 살지는 못했지만, 내게 올곧게 사는 게 이런 것이라고 손수 보여주신 분은 헌쇠 박중기 선생"이라며 이런 헌사를 보냈다.
"여러 진보적 인사들이 머리는 뜨겁지만, 가슴은 식어 버린 경우가 많아 적잖이 나를 실망시켰고 좌와 우란 것도 입지에 따라 입장이 변해 버리기도 했다. 그러나 박중기 선생은 일관되게 자기를 지켜 오셨고 그것이 내가 박 선생을 존경하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헌쇠 80년> 전병용 전 교도관 글 중에서)
91세 피해자가 들려주는 생생한 기억과 증언
▲ <인혁당 생존자, 34년생 박중기> 인터뷰를 마치고 귀가 중인 박중기 선생의 뒷모습. |
ⓒ 네번째달 |
겸손이 몸에 뱄다는 표현이 그저 수사가 아니다. 하지만 세월을 거스를 수는 없는 법이다. <헌쇠 80년>이 출간된 지 벌써 10년이 넘었다. 4.9통일평화재단 고문인 박 선생도 그만큼 연세가 더 들었다. 그럼에도 재단 사무실에 들르거나 동지들의 묘역을 찾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자택과 가까운 인터뷰 장소도 지팡이를 짚고 직접 걸어 다닐 만큼 정정함을 자랑한다. 수차례 이어진 인터뷰 중 지난 8월 초 만난 선생에게 인혁당 사건 유가족들의 근황을 물었다.
"지금 유가족은 어른들 연세가 많아서 인터뷰가 힘든 사람이 많지. 생존해 있는 분들도 몇 분 안 되고. 치매에 걸린 어른들도 많은 데다 숨만 붙어 있지 의식이 흐릿한 분들도 많아요. 자제 분들은 어머니한테 들은 이야기라든가 자기가 겪은 일이나 마음속 이야기를 들려줄 순 있을 거고.
인혁당의 경우, 가족들이 제일 심하게 당한 사건을 꼽으라면, 울릉도 간첩단 사건이라는 게 있었다. 억지로 만든 사건인데 집 문틈에 쪽지를 놔뒀는데 그걸 간첩이 해 놓고 갔다고 한 거지. 울릉도는 빨갱이들이 나올 재간이 없다. 별도로 그 간첩단 사건이 인혁당 사건과 같이 발생한 거지. 박정희 정권 시절 판사들은 똑똑했다. 간첩도 만들 수 있는 재주를 가졌다. 쪽지 문구 자체를 잘 모를 사람을 잡아갔으니까."
박 선생이 인혁당 사건과 별개로 최악의 간첩 조작 사건으로 꼽은 울릉도 간첩단 사건은 1974년 중앙정보부가 울릉도 등지에 거점을 두고 간첩 활동을 하거나 이를 도왔다며 전국에서 47명을 불법구금하고 고문한 공안 조작 사건이다. 당시 적발된 47명 중 32명이 국가보안법·반공법 위반 등 혐의로 구속기소됐다고 전해진다. 박 선생은 울릉도라는 환경에서 간첩이 활동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라며 조작의 주체들을 두고 "똑똑했다"는 반어법을 쓴 것이다.
그 시절 기억을 떠올리던 박 선생은 드물게도 1차 인혁당 당시 고문을 당했던 상황을 들려줬다. 마치 일종의 무용담을 전하듯 꽤 담담한 어조였지만 듣는 이로 하여금 '저 세월을, 저 시간을 어떻게 견뎠을까' 하는 탄식이 절로 나오는 이야기였다. 고문에 대한 묘사도 생생했다. 양아무개라는, 박 선생을 담당했던 고문 형사 이름이 나오면서부터 시작된 기억은 이랬다.
"1차 인혁당 때 나하고 만났어. 하도 심하게 굴어서 저항을 했더니 악질이라고 자꾸 끄집어내더라고. 고문도 아니고, 자기 사무실 야전 침대 같은 거에 나를 엎어 놓고 야구 방망이 같은 나무 재질로 막 두들기는 거지. 치료관한테 보내야 하는데 안 되니까 소고기를 근육에 두드려 펴서 그걸 붙여 주고 난리였지. 멍이 안 삭으니까.
그게 다 일본 (고문) 기술자들한테 배운 기술이나 업을 승계한 거다. 두드려 패는 것도 근육이 있는 곳만 패지. 뼈가 상한 채로 오래 가면 자기가 되레 당한다는 소리도 하고. 또 전기 고문은, 교류 전지를 쓰는데 대개는 야전 배터리 전화기였어. 그게 위력이 굉장히 세요. 사람이 죽지는 않지만 눈이 툭 튀어나오는 것 같았으니까. 심장 약한 사람은 까무러치기도 하고. 전기가 잘 안 통하는 사람은 목욕탕에 집어넣고 전기를 돌려요. 그럼 튀김 하듯이… (하략)."
고문을 당한 민주 인사들 중 "독한" 축에 속했던 이들은 "이 새끼야, 니는 자식도 안 키우나"라며 수갑이 채워진 채로 싸우기도 했단다. 가정이, 자식이 있는 경찰들을 향한 저항이었다. 그 저항이 물론 쉬운 건 아니었다. 극히 어려운 일이었다. 박 선생은 "박종철이 죽고 난 뒤 (고문은) 상당히 완화가 됐다. 사회적으로 완전히 노출이 됐으니까"라며 한국 현대사를 바꾼 역사적인 사건을 대수롭지 않은 일화처럼 언급했다. 박 선생은 과연 어떤 세월을 살아왔던 걸까.
▲ 다큐 <인혁당 생존자, 34년생 박중기> 인터뷰 중인 박중기 선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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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선생은 특히 지리나 역사, 인물들에 관해선 해박한 지식과 놀라우리만치 또렷한 기억력을 자랑하시곤 한다. 한 가지 사안이라도 방대하고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그와 연관된 기승전결을 풀어 놓으셔야 직성이 풀리신다. 본인 이야기도 마치 옛이야기처럼 들려주는 선생의 일화 중 밀양 출신인 선생이 전쟁통에 부산에서 신문 배달 일로 수완을 발휘했던 이야기는 군계일학이었다. 어릴 적부터 호방하고 진취적이었던 선생의 성격을 잘 드러내 주는 일화였다.
"내 나름대로 중학교 때 신문 배달을 해본 경험이 있는데, 수완꾼이던 장기영씨가 부산에서 <한국일보>를 만든 거야. 그래서 토요일에 편집국장을 찾아가서 '저가 시골에서 와 가지고 살림이 어려운데 신문 배달을 했으면 좋겠는데 저 좀 시켜 주십시오' 했지. 고향이 어딘지 묻고 기자가 뭘 묻는데 몰라도 안다면서 끄덕끄덕했지. 그때 신문은 4면을 접은 형태였는데 수검까지 같이 했어요. 그렇게 취직을 했지."
그런 박중기 선생은 1차 인혁당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후 10년이 지난 2차 인혁당 사건 당시 운명의 장난과도 같은 투옥으로 형장의 이슬을 피할 수 있었다. 그런 선생이 희생자들을 생각하는 마음은 각별할 수밖에 없을 터다.
"희생자들은 안타깝지 않은 사람이 없어요."
기억도 녹슬지 않았다. 8명의 희생자들에 대해 묻자 한 명 한 명 나이와 생김새와 특징들을 부지런히 길어 올린다. 그 각별함이 표정과 목소리에 고스란히 묻어 난다. 특히 두고두고 "나 대신 죽었다"며 안타까워했던 김용원 선생에 대한 추억은 남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김용원 선생은 (박정희 정권의) 사냥감이 안 됐지. (동지들 중) 거기에서 제일 처지고. 그런데 (정권) 안에서 보기에 이 사람은 타협도 안 하고, 선생이니까 옳은 거를 가르치고 나쁜 거는 배제하고. 사회과학을 가르친 것도 아니고 물리학, 수학을 가르쳤으니까. 누구누구하고 언제 만나는지 그런 걸 가지고 꼬투리를 잡은 거지. 내가 제일 오래 접촉했던 이도 김용원이었거든."
▲ 다큐 <인혁당 생존자, 34년생 박중기> 인터뷰 중인 박중기 선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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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형 카메라 앞에서 더 솔직해지시는 선생께서 드물게 속내를 털어놓으신다. 재작년 별세한 김금수 한국노동사회연구소 명예이사장에 대한 그리움을 잠깐 비치시며 이내 감상에 젖으신다. 어쩔 수 없다. 박 선생은 그런 분이시다. 먼저 떠나보낸 이들을 그리워하고 그들의 제를 올리는 조선시대 능참봉처럼 묵묵히 제 자리를 지켜나가는 박중기 선생. 과거 민족민주열사·희생자추모(기념)단체연대회의 명예의장으로서의 역할이 딱 그랬을 것이다.
마석모란공원과 이천민주화운동기념공원에 특히 그의 민주화운동 동지들과 인혁당 사건 관련 동지들이 여럿 안장돼 있다. 이제는 거동이 그리 편하지 못해 예전보다 자주 찾을 순 없지만 그럼에도 누구보다 앞장서 묘역을 찾는 이도 바로 박중기 선생이다.
"민주화를 위해 힘쓴 이들을 대우해 줘야 앞으로 이 나라가 잘못됐을 때 누군가 또 나설 것 아닙니까."
불과 몇 년 전, 80대 후반이던 초로의 나이에 릴레이 1인 시위에 나섰던 박중기 선생. 그가 국회 앞에서 피켓을 들고 법안 통과를 목 놓아 외쳤던 민주유공자법이 발의 된 지 수년 만에 최근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는 성과를 이끌어 내기도 했다. 수많은 후배들이 존경을 보낼 수밖에 없는 활동이었다.
민주화를 이뤄내기 위해 목숨 바쳐 투쟁했던 동지들의 명예 회복과 계승 사업의 복판엔 항상 그가 자리하고 있었다. 현재 4.9통일평화재단 고문을 맡고 있는 박중기 선생은 그렇게 80대 나이에도 세월호 참사와 이태원 참사를 잊지 않았고, 마음으로 참사 유가족들의 아픔을 헤아렸다.
이제 아흔을 넘긴 그가 간직해 온 '오래된 미래' 속 소중한 희망, 꿈, 그리고 후배들을 향한 당부를 듣는 일은 비극적인 역사의 의미를 오늘에 되살리는 작업이 되어줄 것이다. <인혁당 생존자, 34년생 박중기>의 제작 소식이 전해진 뒤 응원을 보내는 많은 이들의 뜻과 마음도 다르지 않을 터.
<인혁당 생존자, 34년생 박중기>는 지난 2000년 푸른영상이 비디오를 통해 선보인 인혁당 사건 소재 장편 다큐멘터리 < 4월 9일 > 이후 극장에서 개봉하는 최초 장편 다큐를 목표로 제작의 첫발을 디뎠다. 이를 위해 박중기 선생님도 열심히 카메라 앞에 서고 계신다.
'그러니 부디 선생님, 인혁당 사건이 50주기를 맞는 내년은 물론 이후 오래도록 건강하셔야 합니다! 겸손함은 잠시 미루신 채 완성된 영화를 스크린으로 후배들과, 동지들과, 관객들과 함께 객석에서 보게 될 그날까지요.'
덧붙이는 글 | https://tumblbug.com/19750409 <인혁당 생존자, 34년생 박중기> 텀블벅 1차 후원 페이지는 9월 1일 종료됩니다. 1차 연재는 6화로 마칩니다. 글을 쓴 하성태 기자는 <인혁당 생존자, 34년생 박중기> 작가 및 프로듀서입니다. 연재 기사는 다큐멘터리 구성안에 바탕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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