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샹의 또 다른 이름…그녀 ‘로즈 셀라비’ [유경희의 ‘연금술의 미술관’]

2024. 8. 31. 0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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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중자아’를 흠모한 예술가들
로즈 셀라비로 분한 뒤샹, 1920년, 만 레이가 찍음.
예로부터 주술사와 영매는 예술가였다. 이미 예술가가 무당임을 간파한 세계적인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은 디지털 무당으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을 새롭게 자리매김했고, 여러 차례 예술 작업으로서의 굿을 진행한 바 있다.

영매와 예술가 두 존재를 공통과 차이로 변별해보자.

첫 번째, 형식적으로 보면 영매가 행하는 예언과 굿과 처방은 마치 현대예술을 보는 듯하다. 예언은 레게(혹은 힙합) 혹은 개념미술의 인스트럭션(오노 요코와 존 레논의 협동 작업인 “War is over”처럼), 굿 속의 몸짓은 해프닝과 퍼포먼스, 부적 같은 처방전은 회화와 흡사하다. 두 번째로 두 존재 모두 타자에의 감정이입과 감응이 중요하다. 그중에서도 소외되고 배제된 존재에 대한 깊은 연민과 관심 없이는 불가능한 직업이다. 세 번째로 영매와 예술가는 통로, 즉 매개체(mediator)여야 한다. 요즘은 예술가가 예술 작품보다 더 중요한 위상을 차지한 듯 보이지만, 어디까지나 예술가는 예술을 위한 메신저여야 한다.

그러나 빈 그릇 같은 영매는 타인의 몸에 실린 혼을 불러내거나 죽은 혼에 스스로가 빙의되는 것에 비해, 예술가들은 자신 속의 타자, 예컨대 억압돼 무의식에 저장돼 있는 그림자(shadow)를 불러내거나 아니마(남성 속의 여성무의식)와 아니무스(여성 속의 남성무의식)를 불러낸다. 영매는 타인의 영혼을 달래서 보내야 할 것이라고 본다면, 예술가들은 인간이란 다중자아(multiple-ego)를 가진 존재라고 간주한다.

사실, 다중자아가 문제가 돼 ‘다중인격장애(multiple personality disorder)’라는 정신의학용어가 생겼지만, 예술에서는 내심 다중자아를 가진 존재를 부러워한다. 과거의 위대한 철학자, 문학가, 심리학자도 대부분 인간의 마음이 본질적으로 여러 개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초기 그리스도교 철학자 아우구스티누스는 밤마다 늙은 이교도 자아가 튀어나와 자신을 괴롭힌다고 썼다. 셰익스피어 속 인물들은 끊임없이 자기 정체성을 바꾼 것으로 유명하다. 햄릿, 오셀로, 멕베스 등은 한결같이 다중인격장애를 의심받는다. 사실 이들은 셰익스피어 내면에 자리 잡고 있는 낯선 존재를 드러내는 것일지도 모른다.

근현대 시각예술 분야 예술가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멀티플하게 드러내는 일을 다양한 방식으로 진행해왔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자신의 부캐를 적극적으로 드러냈던 화가로 툴루즈 로트렉이 단연 돋보인다. 근친결혼으로 인해 난쟁이가 돼버린 로트렉은 단 한 점의 자화상, 그것도 자신의 모습을 오래 응시하는 게 힘들었는지 눈을 지워버린 자화상을 남겼지만, 변장을 한 모습을 찍은 사진은 여러 점 남겼다.

로트렉은 유년 시절부터 자신을 위장하는 데 매력을 느꼈다.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즉각 실행에 옮겼는데 성가대 소년, 어릿광대, 가발을 쓰고 드레스를 입은 여자, 일본의 사무라이 남자, 가상의 대중에게 설교하는 회교도 사제, 성수채 대신 총채를 든 가톨릭 복사, 펠트 모자와 푸른 작업복을 입은 노동자 등으로 분장했다. 심지어 로트렉은 ‘톨로세그뢰그’라는 가명을 사용하면서 “카이로를 방문했고, 지금은 친구 집에 머물고 있으며, 재능이 있어 언젠가는 그 재능을 증명하게 될 몽마르트르의 헝가리인”으로 행세하기도 했다. 죽기 몇 년 전에는 빨간 바지에 파란 우산을 쓰고, 도자기로 만든 개를 들거나, 마분지로 만든 코끼리를 끌고 거리를 활보하는 등 더욱더 놀라운 행동을 보여줬다. 로트렉이 신체적 장애라는 개인적 트라우마에 근간해 복장으로 변장과 위장을 함으로써 색다른 취향의 정체성을 보여주고자 했다면, 뒤샹은 여러 직업을 가진 존재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을 다양하게 보여준 인물이다. 먼저 화가, 조각가, 사진가, 시인, 디자이너, 영화감독, 판화가, 배우, 철학자 등 예술 관련 직업군을 가졌고, 다른 한편으로는 도서관 사서, 체스 선수, 불어 교사, 큐레이터, 딜러 등 예술과 무관한 직업군에서 일했다. 그는 작품 활동을 하는 데 크게 구애받지 않아도 되는 직업을 전전했다. 사실 뒤샹은 그림조차 그리지 않아도 되는 일을 하기를 진정으로 원했다.

파사디나 미술관에서의 회고전에서 이브 바빗츠와 체스를 두는 뒤샹, 1963년, 줄리앙 와서 사진.
사무라이로 변장한 로트렉, Maurice Guibert, 1892년경.
뒤샹과 닮은 듯 다른 앤디 워홀

뒤샹은 성 정체성도 바꿨다. 뒤샹은 어느 순간부터 스스로를 재정의하고 싶어 했다. 급기야 1920년 늦여름, 여장을 한 채 만 레이의 카메라 앞에 섰다. ‘로즈 셀라비(Rrose Selavy)’라는 이름의 여성 자아를 등장시킨 것. 이때부터 뒤샹 대신 여성 분신(alter ego)이 활동하기 시작했다. 사실 로즈 셀라비는 말장난인데, 이는 “에로스, 그것은 인생”이라는 뜻의 프랑스 말 “에르소, 세 라 비(Eros, c‘est la vie)”, 혹은 “삶을 위해 건배”라는 뜻의 “아로제 라 비(Arroser la vie)”로도 받아들여진다. 이는 결국 “예술보다는 인생이 더 중요”하다는 뒤샹의 명언과도 통한다. 당시 뒤샹은 진정으로 자신을 여성으로 여겼다. 그는 뒤샹이 아니라 셀라비처럼 행동했다. 그 기간 동안 제작한 ‘발랄한 과부’ ‘왜 로즈 셀라비는 재채기를 하지 않는가’ 등에 ‘로즈 셀라비’로 서명했다.

그로부터 60년 뒤 앤디 워홀이 뒤샹의 제스처를 반복한다. ‘드래그 퀸(drag queen)’에 관심이 많았던 워홀은 파티에서 여장을 즐겼다. 그의 이상형은 “완전히 여자아이(girl)기를 원하면서 인생을 보내는 남자아이(boy)”였다. 이런 역할 놀이를 통해 구축한 워홀의 성 정체성은 그만의 또 다른 페르소나가 됐다. 뒤샹과 워홀은 전통적인 성적 역할에 도전한다는 점에서는 유사하나, 워홀이 그저 여장을 했을 뿐 자신의 정체성으로 내세우지는 않았던 반면(그래서 이름도 지어주지 않았다), 뒤샹은 ‘로즈 셀라비’를 또 다른 자아, 즉 또 다른 주체로 내세웠다는 점에서 다르다. 이 시기 서명을 ‘로즈 셀라비’로 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여장한 워홀이 캠프(camp·기교나 과장 등의 비자연적이거나 조악한 것을 즐기는 태도를 뜻하는 문화 용어)적 취향에 가깝다면, 뒤샹의 로즈 셀라비는 진정한 유사인격, 즉 얼터 에고다.

현대 정신분석학에서는 이미 하나의 진정한 자아, 영원히 변치 않는 본질적인 ‘나’라는 믿음을 망상이라고 본다. 현대 철학자 질 들뢰즈의 ‘되기(프: devenir, 영: becoming)’ 개념은 예술가의 다중적 자아 개념에 잘 들어맞는다. ‘되기’란 “다른 삶으로 이행하는 것” 또는 “현재의 영역 바깥으로 이행하는 것”이다. ‘되기’는 인간이 자신을 하나의 정체성에 한정시키지 않고, 이 존재의 상투형이 굳어지기 전의 가능성의 지대로 돌아가, 다른 것과의 접속을 통해 존재의 지평을 창조적으로 넓히는 것이다.

자! 지금부터 내 안의 낯선 타자를 불러내 사랑하는, 나를 지루해하는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해주자. 인생 별거 있나. 변장하는 것도 아니고, 다른 이름으로 불러달라는데.

‘유경희의 연금술의 미술관’은 이번 호를 끝으로 연재를 마무리합니다. 그동안 보내주신 애정과 성원에 감사드립니다.

[유경희 유경희예술처방연구소 대표]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274호 (2024.08.28~2024.09.03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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