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연의 K컬처] 금메달리스트가 보여준 진짜 겸손의 의미
“아뇨, 제 노력의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세계랭킹 하위권의 반란이다’ 이런 말이 많이 나오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한 기자의 질문에 여자 태권도 금메달리스트 김유진 선수가 웃으며 한 말이다. 자신의 업적을 두고 그는 “너네도 다 할 수 있으니 포기하지만 말아라”, “그동안의 혹독한 훈련의 결과”라는 등 본인의 땀과 노력을 절대 폄하하지 않는다. “괜찮아, 다 나보다 못 쏴”, “자신감은 늘 있고요, 못 해도 금메달 하나는 제가 여러분께 꼭 보여드리겠습니다”와 같은 인터뷰를 남겼던 사격선수 김예지의 말도 세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오만방자하다’와 같은 댓글도 있지만 ‘멋있다’, ‘쿨하다’, ‘카리스마 있다’, ‘당당하다’와 같은 찬사가 쏟아진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던데 겸양의 미덕은 도대체 보이지 않는다. 한국문화의 잣대로는 특히 그렇다.
요즘 젊은이들도 수업 시간에 교수가 던지는 어려운 질문에는 즉답을 잘하지 않는다. 답을 몰라서가 아니라 튀지 않기 위해서다. 결국 교수의 지목을 받으면 그제야 자신의 학식과 부지런함을 미련 없이 뽐낸다. 나름 일거양득(一擧兩得)의 전략이다. ‘공부도 잘하는데 겸손하기까지’. 하지만 이번 파리 올림픽에서 훌륭한 성과를 거둔 국가대표 선수들의 말은 달랐다. 한국인이 통념상 따르는 겸손함이 거기엔 없었다.
인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한국문화에서 특히 겸손은 한 사람의 인격이나 미덕을 평가함에 있어 절대 빠지지 않는 요소 중 하나다. 능력이 뛰어나거나 높은 지위에 있는 이들에게는 자신의 자질이나 업적을 낮춰 표현할 것을 묵시적으로 강요하는 풍토가 우리 문화에 깊게 자리하고 있고, 이는 때로 법에 우선할 정도로 강력하다. 굳이 이름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행동이나 말본새가 거만해 보인다는 이유로 대중의 뭇매를 맞거나 낙인찍히는 유명인들을 우리는 자주 보아왔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겸손의 실체적 정의보다는 어떻게 해야 겸손해 보이는가에 관심이 더 많다. 따라서 어떤 이가 ‘겸손하다’는 것과 ‘겸손해 보인다’는 것 사이에는 이격이 존재하며, 한국에서 겸손하다고 평가받는 이들이 개념적 정의상 겸손과 거리가 멀거나 혹은 그 반대인 경우가 적지 않다.
필자가 재해석하기에, 긍정 심리학(positive psychology)을 연구하는 학자들 사이에서 겸손(humility)의 한 축은 ‘거시적 관점에서의 자기 객관화’ 정도로 정의된다. 한 분야에서 오랜 기간 자신을 연마한 이들은 그 경험을 축적하는 과정에서 같은 분야에서 일하는 여러 사람을 만나게 되며, 여기서 치열한 상대평가가 꾸준히 일어난다. 결과적으로 자신의 장단점에 대한 이해가 뚜렷해지고, 자신이 타인에 비해 무엇을 특별히 더 잘하는지, 부족한 것은 무엇인지 깨닫게 된다. 평가의 틀이 커질수록 자신을 능가하는 이가 있음도, 그럼에도 자신의 자질이나 역량이 유효하게 쓰이는 곳이 있음을 받아들일 수 있다. 자신이 뛰어나다는 사실을 인지하면서도 자신을 능가하는 이들 역시 반드시 있다는 확신, 따라서 자신이 틀릴 수 있음에 대한 인정과 새로운 관점을 받아들일 준비와 열려있음이 이들을 특징짓는다.
이런 이들에게서 공통적으로 관찰되는 성향 하나가 평등주의(egalitarianism). 세상 모든 다른 이들도 나처럼 나름의 탤런트 한 가지씩은 가지고 태어난 귀한 존재이며, 동시에 그 영역이 한정되어 있어 따로 떨어져서는 부족함이 많아 서로에게 의지해야 하는 나약한 인간이라는 직관적인 믿음이다. 필자가 즐겨보는 한 유튜브 채널에서는 고장 난 컴퓨터나 태블릿 등 여러 가전제품을 중고 시장에서 구매해 주로 반도체 기판을 수리하는 과정이 편집되어 올라온다. 주인장의 찰진 입담이 우습기도 하지만, 수리 과정에서 그가 보여주는 자잘한 트랜지스터의 수와 종류에 압도될 때가 많다. 전자제품의 성능은 물론 중앙처리장치(CPU)나 모뎀 등 주요 장치에 의해 정해지지만, 수많은 다른 부속품들이 체계를 이루고 자신의 자리에서 고유의 역할을 감당해 낼 때에만 전체가 비로소 작동한다. 손톱만 한 단돈 몇백 원짜리 부품도 결코 우습게 볼 수 없다. 여기에 결함이 생기거나 다른 부품과의 연결이 원만하지 않다면 제품은 작동하지 않는다. 종교적인 관점에서 보면, 이러한 세계관은 기독교의 소명의식(calling)과도 닮아있다. 신(神)은 인간의 영혼 하나하나에 그 나름의 ‘쓰임새’를 불어넣어 창조하였으며, 인류는 그것을 찾아 연마하는 과정을 겪으며 자아실현을 이루어야 하는 수고로운 업보(業報)를 지고 하루하루 고된 삶을 살아간다. 드디어 자신의 용처(用處)를 깨달은 자들이 자신만이 구현할 수 있는 독특한 방식으로 공동체와 사회에 기여할 때 세상은 의미 있는 진화를 경험한다. 이러한 개념적 유사성 때문인지 겸손에 관해 공부하는 학자 중에는 신학 전공자가 유독 많다.
평등에 대한 신념은 흥미롭게도 한국문화에서는 다소 비현실적일 수 있는 커뮤니케이션 행동을 가능하게 한다. 누구나 가지고 있는 장점이고 단점이기에 자신의 재능이 큰 자랑거리도, 단점이 감춰야 할 허물도 아니다. 그러므로 진실로 겸손한 사람이라면 자신의 장점이나 단점에 대해 말할 때 형식적 사회규범이나 예의에 대한 기대에 얽매여 주저하지 않는다. 바로 이 지점이 ‘겸손하다(being humble)’와 ‘겸손떨다(playing humble)’를 가르는 분수령이다. 보편적으로 한국에서 겸손(謙遜)은 ‘남을 존중하고 자기를 내세우지 않는 태도’ 혹은 ‘남을 높이어 귀하게 대하고 자신을 낮추는 태도’ 정도로 정의되는데, 각 구절의 전제를 생각해 보면 겸손의 학술적 개념과 극명한 차이가 드러난다. ‘자신을 내세우지 않거나 낮춘다’는 표현에는 발화 당시 상대방과 비교해 자신에게 내세울 만한 것이 있거나 자신의 지위나 상황이 상대적으로 높음이 암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발화 행위는 둘 모두가 그 당시 여하히 눈에 띄게 된 권력격차를 인정하고 있을 때 가능한 것이며 배려의 ‘미덕’을 행할 수 있는 특권은 전적으로 권력을 가진 자에게만 국한된다. 주요 대학 인기 학과를 졸업한 사람이나 대기업 임원은 겸손할 수 있거나 겸손해야 하지만, 학벌이나 직장이 이미 ‘겸손한’ 이들은 더 겸손해질 수도 없고, 겸손을 강요받지도 않는다. 이스라엘의 최초 여성 총리를 지냈던 골다 메이어(Golda Meir) 여사는 겸손한 언행이 오히려 타인에 대한 존중이나 평등심의 결여를 내포할 수 있음을 꼬집어, “Don’t be so humble...you are not that great” (‘너무 겸손해 말아요. 당신이 그리 대단한 사람은 아니니’) 이라는 경계의 말을 남긴 바 있다.
언뜻 보기에 사회 친화적이고 관계 지향적인 ‘겸손떨기’가 사실은 자신의 우월함과 이에 대한 상대방의 암묵적 동의를 수반한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한국에서의 겸손은 개념상 나르시시즘(narcissism, 자기도취)에 오히려 가까울 수 있다. 표현방식이나 의도가 다를 뿐 둘 모두 일차원적 혹은 찰나에 나타나는 우열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평등주의에서 세상 모든 이들을 등가(等價)로 보는 이유는 개인의 역량이나 자질을 입체적으로 평가하기 때문이다. 누구는 수학을 잘하지만 다른 누구는 어학에 소질이 있다. 어떤 이는 운동선수가 되기 위한 최적의 신체를 타고나며, 다른 이는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성격이나 말씨를 가지고 있다. 모두 한순간의 짧은 대화나 관계에서는 파악하기 어려운 것들이다. 오랜 인간관계와 삶의 경험, 그리고 성찰을 거쳐야 비로소 조금씩 깨달을 수 있는 직관적 식견이며 이것이 바로 진정한 겸손의 근본이다. 진실로 겸손한 이들이 살아가는 사회가 어떤 것일지 예측하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필시 거기에는 표현의 자유, 개인에 대한 존중, 진정성, 인내, 다양성, 평등과 같은 긍정적 가치들이 조금은 더 성숙한 형태로 발전해 있을 것임은 분명해 보인다.
진정한 겸손은 자신의 능력이나 자질을 애써 깎아내려 ‘친히’ 상대와의 눈높이를 맞춤을 뜻하지 않는다. 축적된 경험을 통해 알게 된 자신의 장단점에 대해 있는 그대로 솔직히 표현할 수 있음이 오히려 겸양의 미덕이며 타인에 대한 존중이다.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라 앎을 정의한 공자(孔子)의 말과 꼭 같다. 이번 파리 올림픽에 참가한 국가대표 선수들은 오직 세계를 무대로 자신을 단련해 온 사람들이다. 그것이 후원단체의 홀대이든 경제적 어려움이든 인생의 다른 모든 부분은 포기하거나 무시한 채 칠흑 같은 인고의 시간을 보내며 누구보다도 객관적이고 거시적인 관점에서 자신의 능력을 평가할 수 있는 이들이다. 자신이 맞싸워야 하는 이들이 누구인지도, 자신의 무기와 허점이 무엇인지도, 또 경쟁상대 역시 자신만큼이나 많은 것을 희생했을 것임도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을 터이다. 메달을 목에 걸고 전한 그들의 소해는 겸손한 것일 수밖에 없다.
김상연 광운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 겸 한국문화데이터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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