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길원 목사의 고백록] 아버지의 유언장을 훔쳐보다
“사람이 양심이 있어야제.”
아버지를 두고 한 어머니의 넋두리였다. ‘어떤 양심’인지 물었다. “양심이 있어야 사람이제.” 결국 그 말이 그 말이었다. 이 명제가 수없이 되풀이되고서야 그 의미를 깨우쳤다. 짐승은 양심이 없다는 것, 사람이니까 양심이 있어야 한다는….
그 양심의 정체가 드러난 것은 오래지 않았다. 서러운 시집살이부터 시작해 노름판에서 돈을 잃고 자살 소동을 벌인 일, 다른 여자에게 마음을 빼앗겨 어머니를 속 썩인 일, 직원에게 돈 빌려줬다가 떼인 일. 레퍼토리는 다양했고 소상했다. 그러나 정작 어머니에게 잊히지 않는 일은 따로 있었다. ‘아픈 데는 좀 어떠냐’고 따뜻한 말 한마디 청했다가 단박에 거절당했다. 돌아온 답은 서늘했고 아팠다. “그런 남자 있으면 찾아가 살아라.” 그게 그렇게 서럽더란다.
이번엔 요양원에 계신 아버지가 유언장 이야기를 꺼내셨다. 숨 거두고 나면 공개하라는 엄명에도 궁금하기 짝이 없어 내 것을 뜯어 보았다. 어디 숨겨 놓은 밭떼기라도 있으려나 했지만 ‘역시나’였다. ‘상주(喪主) 길원에게’로 시작된 유언은 어머니 봉양으로 끝났다.
유언장의 정체를 눈치챈 어머니에게 ‘어머니 것도 보여 드릴까’ 물었더니 뜻밖에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신다. “봐서 뭘 하게? 지나간 과거사를 돌이킬 수 있남?” 완강히 거부하시던 어머니가 어느 날 조심스레 입을 뗀다. “유언장 좀 볼 수 있냐.” “볼 필요 없다면서요.” “그래도 그놈의 양심은 봐야…” 말끝을 흐렸다. 덕분에 나도 아버지의 유언장을 훔쳐보게 되었다.
“사랑하는 내 아내에게!”
글씨는 정갈했고 내용은 간절했다. “거친 삶을 옆에서 지켜주느라 고생했던 당신에게 무슨 염치로 유언을 하겠소. 유언장이라기보다는 내 참회문이라 생각하면 좋겠소. 자식 키우랴! 남편 뒷바라지하랴! 평생을 한시라도 쉴 새 없이 앞만 보고 살아온 당신에게 사랑 주지 못한 내가 무슨 할 말이 있으리오. 그저 용서를 바랄 뿐이오.”
참회문은 살아온 세월에 걸맞게 길었다. 어머니를 보살피고 헤아리지 못한 일에 대한 후회와 탄식이었다. 지금까지의 아버지가 아니었다. 날라리 집사였던 아버지는 성경도 인용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 ‘헐!’ 그리고 마지막 문장은 이렇게 마무리된다.
“여보, 당신! 부디 몸조심하고 남은 인생을 잘 보내고 다음 세상에서 좋은 인연으로 다시 만나길 바라겠소. 이 모든 나의 잘못을 용서해 주오. 여보, 당신이 분명히 용서해 준다면 조용히 눈을 감겠소.”
어머니는 내게 유언장을 밀쳐 내면서 한마디 하신다. “징글징글 맞다.”
“어머니, 또 있는데요.”
2부작으로 꾸며진 참회록은 어머니 이름 석 자를 부르는 것으로 시작됐다. “사랑하는 김정숙에게!” 이어진 고백은 이렇다. “남남으로 만나서 사랑하기로 굳게 약속하고 일생을 나와 함께한 나의 사랑 당신! 당신 이름 부를 날도 며칠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하늘나라의 부름은 나이 순서대로 부르는가 봅니다. 아마 하나님은 당신보다 나를 더 보고 싶어하는 것 같습니다. 당신께 무거운 짐만 맡기며 다시 돌아오지 못할 외롭고 쓸쓸한 머나먼 길을 당신만 남기고 혼자 가려 하니 눈물이 앞을 가려 심장이 터질 것만 같으오. 살다가 괴롭고 외로우면 꿈속에서 저를 꼭 부르세요. ‘꼭’ 당신을 만나러 오겠습니다. 약속합니다. 내 인생의 전부였던 당신! 멀고 먼 저 하늘나라에 가서 가장 밝게 빛나는 큰 별이 되어 당신 앞길을 밝혀주며 당신을 지켜 드리겠습니다.”
펼쳐진 사랑의 서사가 내 마음을 출렁거렸다. 어머니는 이번에도 고개를 돌린다. “큰 별? 쥐똥별이면 모를까?” 아침 시간, 외삼촌 앨범을 하염없이 들여다보고 계신 어머니에게 밤새 아버지 소식을 전한다. 돌아가신 외삼촌과 어머니 생각하며 많이 우시더라고. 이어진 길고 긴 침묵. 다시 만나는 게 징그럽다는 어머니 옆구리를 푹 찌른다.
“어머니, 아버지가 양심은 있는가 보죠?” “그러니까 니 아버지가 사람이제.” 어머니의 일갈(一喝)이다. “푸하하하.” 나도 웃고 어머니도 따라 웃는다. 어머니 눈망울에 진주 보석이 주렁주렁이다. 그런데도 나는 여전히 ‘짐승’과 ‘사람’ 사이에서 허우적거린다.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행 2:37)
송길원 하이패밀리 대표·동서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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