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인 박수근 화백 그림 보며 선하고 참된 것의 가치 깨달아 [우성규 기자의 걷기 묵상]

우성규 2024. 8. 31. 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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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의 마지막 날 걷기 묵상은 수도권 지하철 4호선 대공원역 4번 출구에서 시작한다.

가난한 집 출신으로 초등학교만 마치고 독학으로 그림을 공부한 박 화백은 도시 변두리의 십자가, 아이를 업은 농촌의 여성, 앙상한 나목(裸木)을 그리며 6·25전쟁 이후 궁핍했던 시절을 선량한 눈빛으로 담아냈다.

장 프랑수아 밀레의 기도하는 모습을 담은 명화 '만종'을 보고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 박 화백의 그림을 보며 선하고 참되며 아름다운 것이 오래 남는다는 진리를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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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서울대공원 둘레길 옆 미술관
경기도 과천 국립현대미술관 옥상정원에서 바라본 서울대공원 호수와 관악산 전경이다.


8월의 마지막 날 걷기 묵상은 수도권 지하철 4호선 대공원역 4번 출구에서 시작한다. 올여름 길고도 강력했던 폭염의 기세가 한풀 꺾였다 해도 한낮엔 30도를 웃도는 날씨가 이어지고 있다. 여름철 혹서기는 걷기의 비수기다. 추울 땐 걸으면 몸이 따듯해지지만 무더울 때 걸으면 쓰러진다. 그렇기에 기후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는 길을 택해야 한다. 나무 터널이 피톤치드를 내뿜으며 한여름 땡볕을 막아주고 가을엔 환상적인 단풍으로 사람들의 발길을 끌어모으는 서울대공원 동물원 둘레길로 향한다.

대공원역 4번 출구로 나와 한국카메라박물관을 거쳐 주차장을 따라 크게 돌면서 스카이리프트 옆 호수를 조망하는 길로 들어선다. 대공원 동물병원을 지나 그대로 계곡을 따라 걸어가다 보면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동절기는 오후 5시)까지 개방하는 동물원 둘레길이 나온다. 왼쪽 동물원 철제 담장 안쪽에서 캥거루가 뛰놀고 있다. 청계산에서 내려오는 물길을 따라 조성된 둘레길은 아스팔트 옆에 야자매트가 깔려 있고 경사 역시 완만해 노약자들도 쉽고 편하게 걸을 수 있다.


무엇보다 귀가 즐거운 길이다. 캥거루가 있는 호주관에 이어 열대조류관 큰물새장 등이 걷는 길 왼편에 나타난다. 다른 곳에서 좀처럼 듣기 힘든 희귀 새들의 지저귐이 계속된다. 계곡 물소리에 더해 맹금사의 울부짖음이 단조로움을 깨고 머리 위로는 김포공항에 착륙하려는 여객기가 일정한 간격으로 강하하는 소리를 낸다. 둘레길 절반쯤 걷다 보면 웅장한 물소리와 함께 폭포와 더불어 숲속 저수지가 나온다. 그곳에서 바라보는 관악산 풍경 또한 일품이다.

둘레길이 끝나는 곳에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이 나온다. 더위를 피해 냉큼 냉방 시설이 작동하는 전시관으로 들어선다. ‘1960~70년대 구상회화 기증작품전’이 진행되고 있다. 이건희 컬렉션, 동산 박주환 컬렉션 등 최근 5년 사이 한국 미술계의 축복과도 같았던 기증작품들이 전시 중이다.

서울대 서양화과 교수였던 김태(1931~2021) 화백의 ‘남부민동의 언덕’(1974)에 눈길이 간다. 부산 남항에 맞닿은 바다는 에메랄드빛으로, 노을에 물든 하늘은 분홍빛으로 표현했다. 시원한 바다 풍경 그림을 보기만 해도 더위가 가신다. 함경남도 흥원 출생인 작가는 어업에 종사하던 부모를 따라 이후에도 줄곧 어촌 풍경을 그렸다. 가톨릭 신앙을 그림으로 표현하며 성화도 남겼다.

박수근 화백의 아틀리에였던 서울 창신동 자택 모습. 국민일보DB


기증작품전의 하이라이트는 ‘국민화가’ 박수근(1914~1965) 화백의 ‘세 여인’(1961)과 ‘농악’(1960년대)이다. ‘세 여인’은 검정 고무신에 흰 치마저고리 차림의 여인들이 시장 바닥에서 좌판을 벌이고 있는 모습이다. ‘농악’은 세로 1.6m 가로 1m의 대형 작품인데, 악기를 연주하는 모습보다 박 작가 고유의 화강암 질감이 덧칠된 대작이다. 가난한 집 출신으로 초등학교만 마치고 독학으로 그림을 공부한 박 화백은 도시 변두리의 십자가, 아이를 업은 농촌의 여성, 앙상한 나목(裸木)을 그리며 6·25전쟁 이후 궁핍했던 시절을 선량한 눈빛으로 담아냈다.

무엇보다 박 화백은 감리교인이었다. 부인 김복순(1922~1979) 전도사와 고향 강원도 양구 인근 금성감리교회에서 결혼했다. 전쟁에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먼저 남하한 박 화백은 미군 PX에서 초상화를 그려주는 일을 하면서 소설가 박완서(1931~2011)를 만나 박 작가의 등단작 ‘나목’(1970)의 주인공이 된다. 소설에서 박 화백은 ‘어리석지 않게 선량한 눈을 하고 상심이 짙게 밴 음성’의 남자로 묘사된다. 장 프랑수아 밀레의 기도하는 모습을 담은 명화 ‘만종’을 보고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 박 화백의 그림을 보며 선하고 참되며 아름다운 것이 오래 남는다는 진리를 깨닫는다.

과천=글·사진 우성규 기자 mainport@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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