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지하게 웃기는 인생] 나도 좋은 아빠가 되고 싶었다

2024. 8. 31. 0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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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성준 작가


대학 다닐 때는 글을 쓰지 않고 읽기만 하는 축이었는데 그래도 글쓰기의 도움을 톡톡히 본 적이 있다. 교내 창작곡 연구회 동아리 ‘뚜라미’의 임원으로 활동할 때였다. 당시 공연을 앞두고 있던 나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빠 수업을 빼먹기 일쑤였다. 그런데 하루는 친구가 “내일 교육학 기말고사 보는 날인데, 알고 있어? 너 요즘 수업도 통 안 들어오더라”라고 하는 것이었다. 하늘이 노래지는 것 같았다.

교양과목으로 신청한 그 수업은 결석을 많이 한 데다가 전공책까지 잃어버려 내심 포기하다시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다. 무슨 이유인지 몰라도 시험이 취소되어 기말고사는 리포트로 대체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리포트 제목도 정해져 있었다. ‘내가 만약 부모라면’.

하지만 교육학 교과서도 가지고 있지 않은 내가 무슨 수로 리포트를 쓴단 말인가. 한참을 고민하던 나는 콩트를 한 편 써서 제출하기로 마음먹었다. ‘오늘은 나의 쉰아홉 번째 생일이다. 아침에 독일에 가서 미술을 전공하고 있는 첫째로부터 생일 축하 메시지가 도착했다’로 시작하는 짧은 이야기였다. 내가 결혼을 일찍 해서 아이 둘을 낳았는데 그들을 어떻게 키웠나에 대해 쓴 가상의 보고서였다.

임신 중 특별한 태교는 없었지만 늘 평온한 마음을 가지려 노력하고 싸움이나 논쟁이 생길 만한 곳은 가지도 않았으며 클래식 음악을 즐겨 들은 이야기, 직접 키운 채소와 농작물로 자연 이유식을 만들어 먹인 이야기, 건강에 안 좋은 플라스틱 장난감 대신 나무로 둥글둥글한 인형과 장난감을 만들어 주었던 이야기, 미술에 소질을 보이는 큰아이를 기성품처럼 키우기 싫어서 미술학원에 보내는 대신 독자적으로 그림을 공부하게 해서 결국 국가장학생으로 유학 보낸 이야기 등을 마음껏 지어냈다.

그리고 마지막엔 ‘대학 때 내가 만약 부모가 된다면, 이라는 주제로 리포트를 쓰고 낮은 점수를 맞아 우울한 적이 있었다. 30년이 지나고 나서야 내 생각이 옳았음을 깨닫는다. 그때 내게 낙제점을 주었던 교수님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계실까?’라는 문장으로 끝을 맺었다. 치기로 가득한 내용이었지만 에라 모르겠다, 하는 심정으로 내 버렸다. 그런데 또 기적이 일어났다. A+ 학점이 나온 것이다. 교수님이 내 글을 귀엽게 여기신 덕분이었다.

결혼해서 아이를 낳으면 좋은 아빠가 될 것 같다는 소리를 여러 번 들었다. 하지만 나는 대학 때 리포트에 썼던 것 같은 좋은 아빠가 될 자신은 없었다. 무엇보다 내가 결혼생활을 영위한다는 걸 상상할 수 없었다. 나는 ‘누가 평생을 함께할 정도로 나를 믿고 사랑해 주겠어?’라는 헛된 생각에 사로잡혀 결혼은 꿈도 꾸지 않았다. 그런데 마흔이 넘어 진짜 사랑이 찾아왔다. 아주 우연한 기회에 아내를 만나 연애를 하고 동거를 거쳐 결혼식을 올리고 정식 부부가 되었다. 나는 카피라이터였는데 출판기획자였던 아내가 어서 책을 내라고 격려를 해 주는 것은 물론 직접 기획자로 나서 결국 나는 작가가 되었다.

그런데 출판기획자와 결혼하고 나서 가장 많이 듣는 질문은 ‘책은 언제 나오냐?’가 아니라 ‘애는 언제 나오냐?’였다. 사람들은 우리의 애에 관심이 많았다. 아니면 결혼한 사람들에겐 애를 낳으라고 말하는 게 사회적 약속인 것 같았다. 우린 둘 다 이미 나이가 너무 많아서 아이를 낳을 수 없다고 말해도 사람들은 막무가내였다. 대답하기에도 지친 아내와 나는 모범답안을 하나 만들어 써먹기 시작했다. “노력은 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한 뒤 슬픈 눈으로 먼 산을 바라보는 것이었다. 그러면 사람들은 더 이상 아이 낳으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보령으로 이사를 오니 마을 할머니들이 아내를 ‘새댁’이라고 불렀다. 하하, 새댁이라뇨. 나이가 쉰이 넘었는데. 할머니들은 새로 이사 온 새댁이 아이도 없이 남편과 둘만 산다는 말을 듣고 지금이라도 빨리 애를 낳으라고 조르기 시작했다. 할머님들, 저희가 순자라는 고양이를 한 마리 키우는데요, 얘 사료값과 병원비도 장난 아니에요. 손 안 가기로 소문난 동물을 키우면서도 이렇게 허덕입니다. 게을러서요.

저도 한때 좋은 아빠가 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때를 놓친 걸 어떡합니까. 저는 세상의 모든 아빠들을 존경하며 살고 있습니다. 저는 되지 못한 위대한 사람이 바로 아빠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대한민국에서 아빠로 산다는 것은 더더욱 존경할 만한 일이거든요.

편성준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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