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상권 잃은 아이들, 어른들 촬영·연출에 후순위 밀려

이정헌 2024. 8. 31. 0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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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콘텐츠가 삼킨 아동 권리
개인정보 노출·사생활 침해 최다
공포 환경속 겁 질린 모습에 열광
동의 없이 싫어한다는 생각 안해


#1. 구독자가 수백만 명에 육박하는 유튜브 채널의 영상. 자정 가까운 시각, 어두컴컴한 키즈카페에서 어린이들이 잃어버린 물건을 찾아야 하는 상황이 연출된다. 어린이들은 이런 상황이 무섭고 불편하다는 표정을 짓거나 겁에 질려 훌쩍이기도 한다. ‘쿵’ 소리 한 번에 아이들은 소스라치게 놀라고 공포감을 조성하는 조명에 움츠러든다. 아이들이 울거나 소리를 지르는 장면과 함께 “리액션이 좋다” “ㅋㅋㅋㅋ” 등의 자막이 흘러나온다.

#2. 어느 초등학교 졸업식 브이로그 영상. 졸업 가운을 입은 청소년이 무대 위에서 박수 갈채를 받으며 상장을 받고 있다. 이어 카메라가 확대해서 보여준 졸업장에는 아이 이름과 생년월일 등 개인정보가 고스란히 노출돼 있다.

유튜브나 틱톡 등 온라인 플랫폼에 올라오는 동영상은 24시간 방송이나 다름없다. 아동·청소년은 온라인 동영상을 보는 주요 시청자로 자리매김했고, 때론 영상에 직접 출연하기도 한다. 하지만 동영상 안팎에서 아동의 권리는 어른들의 촬영과 연출 작업 탓에 후순위로 밀리기 일쑤다.

뒷전 밀린 아동 권리

디지털 미디어 환경이 아동의 권익을 침해한다는 목소리는 갈수록 커지고 있다. 굿네이버스 아동권리모니터링단에서 활동하는 심래아(12)양은 30일 “친구들과 유행하는 영상을 공유하면서 논다”며 “그 중엔 아이들의 동의를 구하지 않고 사적인 영역을 촬영한 영상이 있다”고 말했다. 심양은 “어른들이 찍은 영상은 여전히 어린이들을 보호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 같다”고 말했다.

심양의 어머니 박은정(42)씨도 “(일부 육아 유튜브 채널에서) 아이의 일상이 고스란히 담긴 브이로그 영상을 보면 사생활이 지나치게 드러날 수 있어 위험해 보인다”며 “아이가 촬영에 동의할 수 있는 (판단력을 가진) 나이도 아니라서 우려스러울 때가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온라인 동영상 속 아동·청소년의 권리 보장은 제대로 확보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아동권리보장원은 지난해 7월부터 1년간 유튜브와 틱톡 등에서 아동·청소년이 출연한 동영상 1038개를 모니터링한 결과를 이날 발표했다. 보장원이 점검 지표로 활용한 기준은 ‘유엔아동권리협약’ 등에 바탕을 둔 ①아동과 아동의 보호자 특성에 따른 차별 ②아동 최우선의 이익 침해 ③아동의 건강한 의식주 권리보장 침해 ④아동에 해로운 콘텐츠 연출 및 강요 ⑤교육적·윤리적 부적합 ⑥개인정보·프라이버시 및 사생활 침해 ⑦자기결정 및 참여의 권리 침해 등이다.


모니터링 결과 아동 인권을 보호할 필요성이 제기된 영상은 전체의 19.8%(206개)였다. 영상 속 점검 지표를 위반한 건수는 313건에 달했다. 특히 아동의 개인정보를 노출하거나 사생활을 침해한 영상은 문제 영상의 40.9%(128개)로 가장 많았다. 아동의 최우선 이익을 침해한 영상은 17.3%(54개)였다. 아동에게 해로운 콘텐츠 출연을 강요한 영상은 15.7%(49개)로 조사됐다. 이에 대해 황정아 보장원 아동정책본부 아동참여지원부 부장은 “온라인 동영상 속에서 방송 촬영이 아동 권리보다 우선된 결과”라고 설명했다.

보장원이 모니터링한 영상 1038개에는 아동·청소년의 사생활 침해 장면이 곳곳에 담겨 있었다. 영상 속에선 어린이의 씻는 모습과 기저귀를 찬 모습 등 사생활이 여과 없이 노출된 경우가 있었다. 청소년의 이름과 나이, 신장, 학교 등 개인정보도 쉽게 노출됐다. 또 아동을 ‘초딩’ ‘잼민이’라고 부르고 꿀밤을 때리거나, 우는 아이를 달래주지 않고 방치하고 겁을 주는 장면도 있었다. 추운 곳에 앉혀놓거나 늦은 밤에 촬영하는 등 아동의 신체·정서 등을 고려하지 않은 사례도 적지 않았다.

이은주 한국아동권리학회 회장은 온라인 영상 속에선 아동·청소년의 동의가 빠져있다고 지적한다. 그는 “온라인 속에서 어른들은 아이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을뿐더러 아이들이 (영상 속 상황을) 싫어하리라는 가정조차 하지 않는다”며 “영상을 만들고 보면서 즐기는 사람은 어른들이지만, 실상 영상 속의 아이들에게 동의를 구하지 않고 (촬영을) 강요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김아미 미디어리터러시 독립연구자는 “디지털 환경은 아동의 삶에서 떼어낼 수 없는 필수적인 장소”라며 “하지만 현실은 온라인·디지털을 예외적·부차적인 환경으로 본다. 오프라인에 익숙한 어른들의 관점이 반영된 영향”이라고 진단했다.

아동·청소년에게도 초상권 보장해야

온라인 동영상을 촬영하고 시청하는 어른들이 영상 속 아이들의 입장을 성인과 같은 눈높이로 바라봐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어른들도 동의 없이 동영상에서 개인정보가 노출되고, 초상권이 침해되는 건을 원치 않듯이 같은 잣대를 아동·청소년에게 적용하자는 것이다.

이 회장은 “동의 없이 얼굴 사진을 퍼가는 건 어른들도 싫어하는 일이지만, 온라인 동영상 속에선 내 아이니까 내 마음대로 찍어서 올린다는 게 일상적”이라면서 “존중을 받아 버릇한 아이들이 타인의 권리를 존중할 수 있다. 어른들이 같은 눈높이로 아이들을 바라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 연구자는 지난해 초록우산 어린이재단 아동복지연구소에서 발간한 ‘디지털 환경에서의 아동권리 보장 방안’ 보고서에서 “성인 보호자가 아동이 경험하는 온라인 위험 상황에 적극적인 중재자가 될 것”을 주문한다. 보호자 교육을 통해 부모가 지나친 간섭과 통제가 아닌 아동의 의견을 듣고 동의를 구하면서 온라인 환경에 접근할 수 있도록 유도하자는 것이다. 특히 아이들이 온라인 속에서 개인정보, 프라이버시, 초상권 등을 존중하기 위해선 보호자의 교육과 지원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정헌 기자 hle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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