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보다 인도 문화 받아들였다…유럽인 등장 전, 남양의 풍경 [김기협의 남양사(南洋史) <25>]
앤서니 리드의 〈통상시대의 동남아시아 Southeast Asia in the Age of Commerce〉(2책, 1988, 1993)와 빅터 리버먼의 〈기묘한 평행선: 세계사 속의 동남아시아 Strange Parallels: Southeast Asia in Global Context, c. 800-1830〉(2책, 2003, 2009)가 동남아 역사에 관한 지금까지 나온 가장 중요한 연구서들이다. 연재 초입에서 나는 리드의 책에 더 끌린다고 밝힌 바 있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42250)
버마사 연구로 출발한 리버먼이 대륙부 중심으로, 수마트라섬 연구로 출발한 리드가 해양부 중심으로 동남아를 바라보는 차이가 바닥에 깔려 있다. 내가 리드에게 더 끌리는 까닭은 다른 지역과 구별되는 동남아의 특성이 해양부에서 먼저 나타난다고 보기 때문이다. “남양사”란 제목에도 해양부를 앞세워 보는 뜻이 담겨 있다.
물론 동남아 역사에서 대륙부의 몫이 해양부에 못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여러 변화 단계에서 실마리가 먼저 나타나는 것은 대개 해양부 쪽이었다. 리드가 통사에 접근하는 〈갈림길의 역사-동남아시아 A History of Southeast Asia: Critical Crossroads〉(2015)를 쓴 것은 그 실마리들을 연결한 것이다. 리버먼에게는 그런 접근을 기대하기 어렵다.
중국보다 인도 문화를 쉽게 받아들인 이유
리드의 〈갈림길의 역사-동남아시아〉에서 자주 마주치는 말이 ‘다중성(plurality)’이다. 남양의 문화적 현상을 이해하는 중요한 키워드로 삼을 수 있겠다. 육로보다 해로의 가변성이 크기 때문에 다양한 외부의 자극을 수시로 받는 도서 지역에서는 한 방면의 자극에 휩쓸리기보다 여러 성분을 융합하는 경향이 있었다.
인도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은 사실도 이 경향에 비추어 이해할 수 있다. “인도차이나”라는 별명처럼 동남아는 인도와 중국 사이에 있다. 굳이 비교한다면 중국 쪽으로부터의 인구이동이 더 많았다. 그런데도 중국 문화의 영향은 베트남 북부에 그친 반면 힌두교와 불교, 그리고 산스크리트어는 남양 전역에 널리 퍼졌다.
문자 차용(借用) 현상에서 그 차이의 원인을 쉽게 알아볼 수 있다. 6세기부터 나타나는 남양의 금석문에는 산스크리트어가 쓰였다. 이어 각 지역 언어를 산스크리트 문자로 음사(音寫)한 기록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굴절어인 산스크리트어는 고착어인 한자보다 다른 언어의 표기가 쉽다. 진(秦) 통일 이후 한자의 고착어 성격이 강해진 것과 나란히 중국의 주류 사상에도 고착성이 강해진 점을 생각할 수 있다. 합리주의로 쏠린 중국 사상은 남양의 토착 신앙과 어울릴 포용성을 갖지 못했다. 불교와 힌두교가 정치체제와 무관하게 퍼져나간 것과 달리 중국 사상과 문화는 제국체제에 편입된 교주(交州, 베트남 북부)를 넘어서지 못했다.
인도 문화를 받아들인 남양 지역에서는 토착 신앙과 인도 종교의 2중성이 자연스러운 현상이 되었다. 토착 신앙, 불교, 힌두교의 3중성이 나타나기도 했다. 신계(神界)의 서열을 가진 힌두교를 지배계층에서 선호하는 경향이 일어났으나 민중의 불교와 병행했다. 정치적 영향 없이 문화적 영향만을 받아들이기 때문에 가능한 다중성이었다.
나가라와 네게리, 내륙과 해안의 결합 양상
해안 교역기지와 내륙 농업지대의 결합 관계가 남양 문화의 다중성을 뒷받침했다. 남양 정치조직의 기본단위인 나가라(nagara)와 네게리(negeri) 사이에는 주도권을 내륙과 해안, 어느 쪽이 갖느냐 하는 차이는 있어도 양자의 결합은 일반적 현상이었다. 해안에서는 외래문화가, 내륙에서는 토착문화가 중심이 되어 다양한 결합이 이뤄졌다.
해안과 내륙 사이의 주도권은 일차적으로 지리조건에 따라 정해졌다. 생산력이 큰 평원을 가진 대륙부에는 나가라가, 교역의 비중이 큰 해양부에는 네게리가 쉽게 발전했다. (해양부에 위치한 자바가 나가라의 특성을 많이 나타낸 것은 섬 안에 농업생산력이 뛰어난 곳들이 있기 때문이다. 대륙부에 위치하면서도 네게리의 특성을 많이 보인 참파 지역과 대비된다.) 그러나 상황에 따라 비중이 바뀌기도 했다. 자연재해로 농업생산이 부진할 때는 해안으로, 정세 변화로 교역이 침체할 때는 내륙으로 주도권이 옮겨가곤 했다.
근년 과학적 연구자료의 확대에 따라 기후 변화, 대규모 화산 폭발, 지진과 쓰나미 등 자연현상이 역사 전개에 끼친 영향의 연구가 늘어나고 있다. 그러나 지금 내 고찰에서는 앞세우지 않는다. 우연성이 많이 개재하는 영역이고, 앞으로의 연구에 따라 관점이 바뀔 여지가 크다고 보기 때문이다.
장기적 정세 변화를 설명해주는 책으로 리드의 〈갈림길의 역사-동남아시아〉와 케네스 홀의 〈초기 동남아 역사〉(2011)가 있다. 남양 일대 교역 성쇠가 중국 사정에 크게 좌우되었음을 두 책에서 알아볼 수 있다. 당나라가 융성한 7-8세기에 활발하던 남양의 교역 활동이 9-10세기에 침체했다가 11세기에 송나라가 자리 잡으면서 다시 확장을 시작한 것이다.
리버먼은 10세기 이후 대륙부에 대형 국가들이 나타난 시기를 ‘헌장 시대(Charter Era)’로 중시한다. 그러나 리드와 홀은 이 국가들이 겉보기는 커도 통합성이 약했다며 의미를 제한한다. 교역의 침체에 따라 내륙의 힘이 상대적 우위를 점하는 데 따른 현상이라는 것이다.
웅대한 유적을 남긴 힘은 국가보다 종교
리버먼이 10-13세기를 동남아의 ‘헌장 시대’라 하는 것은 국가의 틀이 만들어진 시기라는 뜻이다. 대규모 토목공사가 흔히 국가 발전의 증거로 나타난다. 이 시기에 세워진 보로부두르(자바), 앙코르와트(캄보디아) 등 웅장하고 화려한 유적을 보면 고도의 국가조직을 떠올리게 된다.
앙코르와트의 웅대한 규모는 높은 생산력을 말해준다. 앙코르 일대의 농업시설을 조사한 연구자들은 당시로는 대단한 1-2백만 명의 인구 수준을 추정한다. 그런데 이 일대의 수리시설은 비트포겔이 말한 ‘수리 제국(hydraulic empire)’의 규모는 아니다. 우기에 범람한 강물이 건기에 빠져나갈 때 일부를 막아 농업용수로 쓰는 작은 저수지들일 뿐이다.
여기에서 ‘무앙(Muang)’의 역할이 주목받는다. 무앙은 동남아 대륙부에 (중국 서남부-인도 동북부까지) 널리 존재한 정치-사회 조직으로, 역사학계에서 쓰인 용어로는 ’성읍(城邑)국가‘에 가깝다. 그 어원을 “관개용 도랑”으로 추정하는 연구자들은 ’무앙‘을 논농사 지역의 상당한 독립성을 가진 마을 형태로 생각한다.
웅대한 유적들을 만든 데는 거대한 정치권력의 작동이 분명히 있었다. 그러나 그 정치권력은 신앙을 매개로 한 무앙들의 자발적 협력에 근거를 둔 것이어서 지속성을 갖지 못한 것이라고 리드는 해석한다. 안정된 국가조직은 15세기 이후 화약무기의 사용으로 시작된다며 새로운 단계의 국가를 ’화약국가(gunpowder states)‘라 부른다.
남양의 이슬람화는 중국의 영향?
10세기까지 남양에는 외부인의 ’침투‘만 있었지, 외부세력의 대대적 ’침공‘은 없었다. 인도양과 남중국해를 누비는 배들은 남양인의 것이었고, 대륙의 상인과 외교사절과 구법승들은 남양인의 배를 이용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대륙의 항해 수요가 늘어나면서 10세기경부터 대륙세력의 배들이 남양 해역에 나서기 시작했다.
유럽인이 나타나기 전까지 남양에 대한 외부세력의 침공으로는 1025년 촐라제국의 스리비자야 정벌, 13세기 말 원나라의 자바 정벌, 그리고 15세기 초의 정화 함대가 꼽힌다. 이들 침공이 화약국가의 출현을 촉발하는 등 남양 일대에 전면적 변화의 계기가 되었다.
교역의 수요가 매우 크던 중국(송나라)에서 원양항해용 선박이 12세기에야 만들어지기 시작하는데, 인도 남부의 촐라제국이 11세기 초에 스리비자야를 정벌한 것은 놀라운 일이다. 아마 그 전에 촐라 세력이 스리비자야의 마이너 파트너로 교역활동에 참여하면서 조선술과 항해술을 공유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짐작되는데, 확실한 사정은 모르겠다.
13세기 말 원나라의 자바 정벌은 송나라 병탄(1279) 후 남중국의 병력과 선박을 동원한 것인데, 그 실패는 자바 세력의 방어력보다 원정군의 항해 역량에 원인이 있었던 것 같다. 이때 이탈하거나 포로로 잡힌 수만 명 병력이 현지에 남아 교역로 일대에 자리 잡은 것으로 추정된다. 백여 년 후 정화 함대가 마주친 중국인 ’해적‘ 세력의 출발점이다.
이슬람은 일찍부터 남양에 전파되었으나 교역로 일대에만 얇게 퍼져 있다가 14세기부터 깊이 침투하기 시작했다. 이 변화에 중국 방면의 영향이 컸다고 보는 연구자들이 있다. 원나라의 정벌 때 잔류한 중국인 중에 무슬림이 많았고, 원나라 말 천주(泉州)의 무슬림폭동(波斯戍兵之亂, 1357-1366) 등 무슬림 핍박 사태로 중국의 무슬림이 이주하면서 남양의 이슬람화를 촉진했다고 보는 것이다.
정화 함대의 활동에서도 남양 교역로의 이슬람화에 공헌한 측면이 두드러진다. 무슬림인 시진경을 선위사로 임명한 것도 그렇고, 말라카를 전진기지로 간택한 후 말라카의 이슬람화가 시작된 것도 그렇다. 정화 함대의 역사적 의미에는 중국의 해양 진출과 함께 중국 무슬림 집단의 행로를 겹쳐서 생각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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