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설악 사진가'로 불리는 성동규(76) 사진작가. 1973년 속초시 설악동으로 이주한 그는 지금까지 사진과 영상으로 설악을 꾸준히 기록하고 있다.
ⓒ 김진석
▲ '설악 사진가'로 불리는 성동규(76) 사진작가의 젊은 시절. 1973년 속초시 설악동으로 이주한 그는 지금까지 사진과 영상으로 설악을 꾸준히 기록하고 있다. 사진은 1990년 8월 설악산.
ⓒ 성동규
50년 넘게 '설악(雪嶽)'을 사진과 영상으로 기록해왔다. '설악 사진가'로 불리는 성동규(76) 작가. 지난 8월 15일 오전 설악동의 한적한 곳에 자리잡은 <오디오씨> 카페에서 그를 만났다. 그 카페 1, 2층 벽에는 설악산 사진 작품들이 걸려있었다. 주인장이 산 관련 매체에서 기자 생활을 했단다. '설악산'과 씨줄날줄 연결된 이야기를 주고받기에 이보다 더 좋은 공간이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성 작가가 설악산에 홀려 강원도 속초시 설악동으로 이사를 온 건 스물다섯 살 때인 1973년. 첫 눈에 반해 '아, 여기가 내가 평생 살아야 할 곳이구나', 운명같은 인연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그 인연이 50년 넘게 이어질 줄 그 때는 몰랐다.
대표적인 명산인 설악의 풍경을 기록하는 사람들은 많다. 그러나 1970년대 초반부터 50년 넘게 꾸준히 설악의 곳곳을 손금보듯 돌아다니며 기록으로 누적해온 이는 성동규 작가를 빼고는 손에 꼽기 어렵다. 계절의 온도 차가 나무의 나이테를 만든다. 성 작가는 그러한 '설악의 나이테'를 때로는 멀리서, 때로는 가까이서 사진에 담아왔다.
1968년 스무 살에 자원해 베트남전에 참전했다. 그게 그의 인생을 바꿔놓았다. 3년가량 맹호부대 통신병 전기 담당으로 있으면서 사진에 눈을 뜬 것이다. 최전선이 아닌 후방 사령부에 있었기에 비공식 보도사진을 찍는 일을 병행할 수 있었다. 베트남에서 처음 접한 미국의 보도사진 전문잡지 <라이프>(LIFE)도 그의 사진 인생에 큰 영향을 미쳤다.
"맑고 고운 설악의 속살, 짝사랑에 빠졌다"
▲ '설악 사진가'로 불리는 성동규(76) 사진작가가 찍은 설악의 풍경. 1973년 속초시 설악동으로 이주한 그는 지금까지 사진과 영상으로 설악을 꾸준히 기록하고 있다.
ⓒ 성동규
▲ '설악 사진가'로 불리는 성동규(76) 사진작가가 찍은 설악의 풍경. 1973년 속초시 설악동으로 이주한 그는 지금까지 사진과 영상으로 설악을 꾸준히 기록하고 있다.
ⓒ 성동규
▲ '설악 사진가'로 불리는 성동규(76) 사진작가가 찍은 설악의 풍경. 1973년 속초시 설악동으로 이주한 그는 지금까지 사진과 영상으로 설악을 꾸준히 기록하고 있다.
ⓒ 성동규
1970년에 제대한 그는 친구와 함께 서울에서 2년가량 카메라 필름을 현상·인화해주는 일을 했다. 그 친구가 20년 가까이 백두산을 기록해온 '산악 사진가' 안승일 작가였다. 안 작가와 어울려 여러 산을 다니다가 운명처럼 만난 '설악산'의 매력에 빠져들어 아예 설악동으로 이사를 온 게 1973년 봄 무렵이다. 그는 "맑고 고운 설악의 속살을 보고 짝사랑에 빠졌다".
"산은 평등하고, 평화와 자유가 있다. 찬밥 한덩이와 된장찌개, 필름 몇 롤만 있으면 무한정 산에 머무는 행복이 있다. 자연이 연출하는 아름다움을 나만의 생각으로 사각틀 속에 자유롭게 디자인할 수 있는 그런 산을 나는 좋아한다. 아직까지도 자연의 섭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난 시각장애인이나 다름없다. 설악은 그런 나를 여전히 포용하고 가르쳐 준다. 그래서 나는 설악을 사랑하고, 오늘도 산에 오른다."|성동규의 사진일기 (2006년 10월 12일, <서울신문> 기사 중에서)
▲ '설악 사진가'로 불리는 성동규(76) 사진작가가 찍은 설악의 풍경. 1973년 속초시 설악동으로 이주한 그는 지금까지 사진과 영상으로 설악을 꾸준히 기록하고 있다.
ⓒ 성동규
▲ '설악 사진가'로 불리는 성동규(76) 사진작가가 찍은 설악의 풍경. 1973년 속초시 설악동으로 이주한 그는 지금까지 사진과 영상으로 설악을 꾸준히 기록하고 있다.
ⓒ 성동규
▲ '설악 사진가'로 불리는 성동규(76) 사진작가가 찍은 설악의 풍경. 1973년 속초시 설악동으로 이주한 그는 지금까지 사진과 영상으로 설악을 꾸준히 기록하고 있다.
ⓒ 성동규
아무리 설악을 짝사랑한다고 해도, 가정을 꾸려나가는 생계는 현실의 문제다. 설악산으로 수학여행을 온 학생들이나 관광객들을 상대로 필름을 파는 등 사진과 관련된 여러가지 일을 하면서 사진과 생계의 연결고리를 만들었다. 베트남전에서 처음 접했던 고가의 슬라이드 필름으로 찍은 설악산의 비경을 영사기로 틀어주는 일도 했다. 마치 무성영화처럼. 그렇듯 설악산의 도움으로 가계도 꾸리고 자녀들도 키웠다.
어느 순간, 사진으로만은 성에 차지 않았던 그는 큰 맘 먹고 16mm 무비 카메라를 사서 설악의 모습을 영상으로도 담았다. 1990년대 중반까지 극장에서 영화 상영 전에 틀어주던 '대한뉴스'가 공보처(현문화체육관광부) 산하 국립영상제작소에서 35mm 무비 카메라로 제작한 영상 뉴스다.
1988년 서울올림픽이 끝난 뒤였다. 그가 만들었던 영상이 '타임캡슐' 안에 탑승했다. 100년 후에 개봉될 예정인, 100년 전의 중요 기록물로 인정받은 것이다. 그의 '설악 영상'은 MBC 등 주요 방송사에서 다큐멘터리 작품으로 방영되기도 했다. 1986년에는 금관상 문화영화제 우수작품상·촬영상, 1992년에는 한국영상음반협회 영상음반 기술상도 수상했다.
"일년에 네 달 이상을 설악산에 머문다"
▲ '설악 사진가'로 불리는 성동규(76) 사진작가의 젊은 시절. 1973년 속초시 설악동으로 이주한 그는 지금까지 사진과 영상으로 설악을 꾸준히 기록하고 있다.
ⓒ 성동규
▲ '설악 사진가'로 불리는 성동규(76) 사진작가의 젊은 시절. 1973년 속초시 설악동으로 이주한 그는 지금까지 사진과 영상으로 설악을 꾸준히 기록하고 있다. 사진은 1989년 2월 공룡능선.
ⓒ 성동규
1970, 1980년대의 사진·영상 관련 장비는 지금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부피나 무게가 만만치 않았다. 수십 킬로그램(kg)의 짐을 어깨에 메고 가파른 산길을 올라야 했다. 산에서 며칠 머물 요량이면 텐트까지 챙겨야만 했다. 지금처럼 등산로가 잘 정비돼 있지도 않았고, 사람들이 드문 곳은 길을 내다시피 하면서 올라가야 했다.
그가 설악산 사진을 찍기 시작한 초창기에는 지금과 같은 등산로가 아니었다. 천불동계곡~대청봉, 대청봉~백담사, 설악동~백담사 구간 말고는 변변한 길조차 드물었다. 지금은 철계단을 설치해 험한 코스도 어렵지 않게 다닐 수 있지만, 그 당시에는 얼키설키 나뭇가지로 엮은 줄을 잡고 올랐다고 한다. 부실하나마, 대피소도 1969년 설악산 죽음의 계곡에서 히말라야 등반을 위해 사전 훈련중이던 산악대원 열 명이 눈사태로 사망한 뒤에야 생겼다.
"장비가 무거워서 한 번에 다 못 지고 간다. (짐을 나눠서) 한 번 갖다 놓고 내려와서 또 지고 올라가야 했다. 정밀한 사진·영상을 찍으려면 그만큼 장비도 더 많고 무겁다. 삼각대 하나만 해도 무게가 7~8kg 정도 나갔다. 한 번 올라가면 며칠 머물 때가 많았다. 텐트에서도 자고, 겨울철엔 산장이나 대피소도 이용했다. 겨울철엔 눈이 1m쯤 쌓인다. 눈밭에서 헤엄칠 정도다. 눈 사진을 찍으려면, 눈이 오기 전에 미리 올라가 (찜해둔) 자리에서 기다려야 한다. 눈이 올 때까지."
성 작가는 초창기에 독일제 중형 카메라 롤라이플렉스(Rolleiflex)를 썼다. 직사각형 깡통 모양의 카메라인데, 지금처럼 렌즈를 갈아끼울 수 있는 게 아닌 렌즈 고정형이었다. 당시에는 사진 전문가들이 일제보다 독일제 카메라를 선호하던 때였다.
▲ '설악 사진가'로 불리는 성동규(76) 사진작가가 찍은 설악의 풍경. 1973년 속초시 설악동으로 이주한 그는 지금까지 사진과 영상으로 설악을 꾸준히 기록하고 있다. 1982년 2월.
ⓒ 성동규
▲ '설악 사진가'로 불리는 성동규(76) 사진작가가 찍은 설악의 풍경. 1973년 속초시 설악동으로 이주한 그는 지금까지 사진과 영상으로 설악을 꾸준히 기록하고 있다. 1981년 2월.
ⓒ 성동규
▲ '설악 사진가'로 불리는 성동규(76) 사진작가가 찍은 설악의 풍경. 1973년 속초시 설악동으로 이주한 그는 지금까지 사진과 영상으로 설악을 꾸준히 기록하고 있다. 사진은 봄빛을 받은 신갈나무.
ⓒ 성동규
'지난 50년 동안 설악산에 오른 게 몇 번이냐'는 물음에 그는 '횟수에 뭐 큰 의미가 있겠냐'는 표정을 지으며 "안 다녀본 데가 거의 없다. 나만큼 설악산 곳곳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답했다. 옛날에는 한 번 올라가면 일주일이건 열흘이건 오래 머물렀다고 한다. 그는 일년에 네 달 이상을 설악산에 머문다. 50년 세월 동안 20년 가까이를 설악산에 올라가 생활을 한 셈이다.
"산도 변화가 심할 때가 있다. (사진 찍기) 좋은 장면들은 그 변화의 과정에서 생긴다. (날씨가) 변화 없이 정체돼 있는 때는 그 모습이 그 모습 같고 그러니까. 예를 들어 겨울철이 지나고 봄으로 넘어가면서 막 눈이 녹을 무렵이나 바람의 세기나 방향 등이 바뀔 때가 그렇다. 자주 가고, 오랫동안 머물러 있는다고 좋은 장면을 찍을 수 있는 게 아니다.
같은 장소라고 해도 빛의 움직임에 따라 풍경이 달라진다. 해가 지는 것도 계절마다 다르다. 처음에는 그런 걸 잘 몰랐다. 하루종일 한 자리에서 지켜볼 때도 있었다. 설악산 넓은 지역에 올라가면 사진은 안 찍고 이삼일 동안 빛과 그림자만 관찰하기도 했다. 몇 년 동안 몸으로 익히면서 어떤 계절, 어떤 날씨, 어느 시간 등에 대한 감을 잡았다."
'땅의 옷' 지의류 사진전을 연 까닭
▲ '설악 사진가'로 불리는 성동규(76) 사진작가가 찍은 설악산 일대의 지의류(地衣類, Lichen). '땅의 옷'이라고 불리는 지의류는 산이나 바닷가 바위 표면이나 나무껍질에 버짐처럼 얼룩덜룩 붙어사는 생명체다.
ⓒ 성동규
▲ '설악 사진가'로 불리는 성동규(76) 사진작가가 찍은 설악산 일대의 지의류(地衣類, Lichen). '땅의 옷'이라고 불리는 지의류는 산이나 바닷가 바위 표면이나 나무껍질에 버짐처럼 얼룩덜룩 붙어사는 생명체다.
ⓒ 성동규
▲ '설악 사진가'로 불리는 성동규(76) 사진작가가 찍은 설악산 일대의 지의류(地衣類, Lichen). '땅의 옷'이라고 불리는 지의류는 산이나 바닷가 바위 표면이나 나무껍질에 버짐처럼 얼룩덜룩 붙어사는 생명체다.
ⓒ 성동규
성 작가는 요즘 설악산을 세밀하게 들여다보는데 정성을 쏟고 있다. "풍경 사진보다는 설악산 곳곳에 있는 작은 것에서 의미를 얻을 수 있는 사진"에 더 관심이 간다고 한다. 50년 동안 꾸준히 관찰하다보니, 예전과 달라진 설악산의 생태계나 색감의 미묘한 변화도 체감한다. 기후위기 영향인 듯 꽃은 피는데 열매를 맺지 못 하는 식물들도 있단다. 열매로 번식하는 개체일 경우 새로운 방식으로 진화하지 않는다면 자칫 멸종하는 거 아닌가 하는 우려도 든다고.
'사진은 빛의 예술'이라고 한다. 그가 그 빛으로 찾아내고 있는 작은 생명체들 가운데 하나가 '지의류(地衣類, Lichen)'다. '땅의 옷'이라는 뜻을 지닌 지의류는 산이나 바닷가 바위 표면이나 나무껍질에 버짐처럼 얼룩덜룩 붙어사는 생명체다. 바위나 나무를 부식시켜 다른 식물이 살 수 있도록 토양을 만드는 역할을 한다. 그가 찍은 지의류 사진 25점은 8월 27일부터 31일까지 속초문화예술회관 전시실에서 열리는 '지의류는 생명이다' 사진전에서 만날 수 있다. ( 관련기사|'설악 사진가' 성동규, <지의류는 생명이다> 사진전 연다 https://omn.kr/29tkr)
"산행 중 색채와 문양이 특이해 무심히 매크로 렌즈로 들여다보니 작은 점들의 집합체는 점묘화나 추상 미술작품처럼 보여 영감이 떠올랐다. 다양한 문양과 태고적 색채를 띠고 있는 지의류를 보니, '세상의 모든 것은 다 변화의 과정을 밟게 된다'는 뜻의 불교용어인 '성주괴공(成住壞空)'이 생각났다. 삼라만상 우주는 아주 작은 점에서부터 시작되었고, 우리 몸조차도 우주의 원소들로 채워져 있다고 과학자들은 말한다. 지의류는 곧 우주이고 생명이며 나 자신과 별다를 게 없다고 느껴졌다."|성동규 (<지의류는 생명이다> 사진전 작가의 말)
▲ '설악 사진가'로 불리는 성동규(76) 사진작가. 1973년 속초시 설악동으로 이주한 그는 지금까지 사진과 영상으로 설악을 꾸준히 기록하고 있다.
ⓒ 김진석
▲ '설악 사진가'로 불리는 성동규(76) 사진작가. 1973년 속초시 설악동으로 이주한 그는 지금까지 사진과 영상으로 설악을 꾸준히 기록하고 있다.
ⓒ 김진석
'설악산 사진'하면 조건반사적으로 튀어나오는 이름이 성동규다. 그런 그가 요즘 대외 활동을 자제하고 개인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예전에는 "카메라 메고 산에 올라 먹고 살았는데" 요즘에는 "내가 좋아하는 일만 하다보니 (산을) 더 많이 돌아다닌다"고 한다. '지의류'도 그렇게 스스로의 내면에 침잠하면서 건져올렸고, 그 깨달음을 사람들과 공유하는 것이다.
그는 요즘 새삼 '산이 인간에게 보내는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그리고 그걸 카메라에 담으려고 한다. 그건 자세히 들여다봐야 보이는 '산의 질서'이고 '자연의 하모니(조화)'다. 산의 겉모습이 아니고, 거대함도 아니다. 그래서 산에 가면 '꼭 하나'를 고집하지 않고, 이런저런 여러가지 모습을 보려고 노력한다. 그 속에서 "옛날에는 보이지 않았던 걸 보게 된다". 50년 세월이 그에게 설악산을 바라보는 새로운 '눈'을 선물한 것이다.
"성동규에게 설악산은 '선생님'이다"
▲ '설악 사진가'로 불리는 성동규(76) 사진작가가 찍은 설악의 풍경. 1973년 속초시 설악동으로 이주한 그는 지금까지 사진과 영상으로 설악을 꾸준히 기록하고 있다.
ⓒ 성동규
▲ '설악 사진가'로 불리는 성동규(76) 사진작가가 찍은 설악의 풍경. 1973년 속초시 설악동으로 이주한 그는 지금까지 사진과 영상으로 설악을 꾸준히 기록하고 있다.
ⓒ 성동규
▲ '설악 사진가'로 불리는 성동규(76) 사진작가가 찍은 설악의 풍경. 1973년 속초시 설악동으로 이주한 그는 지금까지 사진과 영상으로 설악을 꾸준히 기록하고 있다. 1989년 3월.
ⓒ 성동규
70대 중반으로 접어든 나이. '요즘도 산에 올라가 사진을 찍는데, 체력은 괜찮냐'고 묻자, "아직까지는 오를만하다"고 한다. 그는 국립공원관리공단 국립공원연구원에서 발행한 설악산·지리산·오대산 <생태보감> 촬영을 담당했다. 그리고 2009년부터 2022년까지 13년 동안 국립수목원 주관으로 진행된 '설악 대청봉지역 고산식물 기후변화 생태 모니터링'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일주일에 한 차례씩 대청봉 주변 고산식물들의 식생을 추적 관찰하는, 매주 설악산에 오르는 게 그의 일이었다.
그에게 '지리산과 설악산의 느낌이 어떻게 다르냐'고 물었다. "지리산은 날카롭지 않고 두리뭉실해서 다 포용해주고 안아주는 엄마같이 포근하고, 설악산은 그야말로 그냥 한 번에 딱 안아보고 싶은 매력이 있다"고 답한다. 사진작가로서는 '마치 심술부리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는 변화무쌍한' 설악산이 더 끌린다고.
그는 '설악산은 남한의 금강산'이라는 말을 못마땅해 한다. '설악산은 설악산이고, 금강산은 금강산이며, 설악산이 금강산에 꿀릴 이유가 하등 없다'는 것이다. 인터뷰 말미에 그에게 물었다. '성동규에게 설악산은 무엇이냐'고. 그는 머뭇거리지 않고 즉답했다. "성동규에게 설악산은 선생님"이라고.
▲ '설악 사진가'로 불리는 성동규(76) 사진작가. 1973년 속초시 설악동으로 이주한 그는 지금까지 사진과 영상으로 설악을 꾸준히 기록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