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숨 살릴 수 있는 고객 안내문자 한 통
[백남주 ]
지난 7월 11일 경북 경산에서 폭우로 불어난 급류에 실종된 택배기사 A씨(40대 여성)가 숨진 채 발견됐다. A씨는 7월 9일 새벽 5시 10분경 180mm가 넘는 기록적인 폭우 속에서 회사 차도 아닌 자차를 이용해 배달했다고 한다. A씨는 자신의 자가용으로 물건을 배송하는 쿠팡의 '카플렉서'였다.
우리 사회는 A씨 같은 택배기사를 '특수형태근로종사자(특수고용 노동자)'라고 부른다. 일반적인(?) 노동자와는 달리 자율적으로 일할 시간과 업무량을 결정해 자유롭게 일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A씨는 기록적인 폭우가 내리는 상황에서 '자유롭게' 작업을 중단하지 못하고 목숨을 건 배달을 해야 했을까.
▲ 20일 오전 울산에 내린 폭우로 울주군 온산읍 원산리 한국제지 앞 도로가 침수돼 차량이 물에 잠겨 있다. 2024.8.20 |
ⓒ 연합뉴스 |
전국서비스산업노동조합연맹(이하 서비스연맹)이 특수고용· 플랫폼 노동자(이동 노동자의 대다수가 특수고용·플랫폼 노동자다)를 대상으로 지난 7월 12일~14일 진행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98.0%(아주 심각 79.5%, 약간 심각 18.5%)는 최근의 폭염, 폭우 등 기후 위기와 관련해 심각성을 느끼고 있었다.
이러한 기후 위기는 이미 이동 노동자의 건강과 노동 환경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최근 2년간 여름철 폭염 시 온열 질환(두통, 어지럼, 근육경련, 피로감, 의식저하) 등 건강 이상 증상을 겪은 적이 있느냐?'라는 질문에 응답자의 85.1%가 있다고 답했다.
'근무 중 기습, 집중 호우가 내리거나 침수가 발생했을 때 안전에 대한 위협을 얼마나 느끼냐?'는 질문에는 '매우 위험하다고 느낀다' 66.6%, '약간 위험하다고 느낀다' 29.5%로 응답자의 96% 이상이 집중 호우 등으로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특히 배달라이더의 경우 99.9%(응답자 173명 중 172명)가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정부의 '물·그늘·휴식'이 작동하지 않는 이유
중요한 것은 특수고용 노동자인데도 위험을 느끼는 상황에서 작업을 중단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직관적으로 생각해 보면 배달라이더나 대리운전기사와 같은 플랫폼 노동자의 경우 단말기를 끄고 일을 쉬면 된다. 가정을 방문해 서비스를 제공하는 설치 수리 기사나 방문점검원 등도 고객에게 양해를 구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위협을 느꼈는데도 작업을 중단하지 못했던 이유'를 묻는 말에 응답자들은 가장 많은 비율(37.8%)로 이후에 누적될 물량(작업)의 부담을 꼽았다. 다음 이유로 35.5%가 수익의 감소라고 응답했다.
특수고용·플랫폼 노동자를 폭염, 폭우 등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는 일정 기간 일을 하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했을 때 자신이 처리해야 할 업무에 대한 조정과 수익 보전과 관련된 대책이 필요함을 보여준다. 통상 한 달간의 업무량이 주어져 있는 설치 수리 노동자나 방문점검원, 학습지 교사 등은 계획된 하루 일을 쉬 게 되었을 경우 해당 일을 남은 기간 처리해야 한다. 노동강도가 증가할 수밖에 없다.
하루 업무량이 주어지는 택배기사의 경우는 그 정도가 더욱 심하다. 배달라이더, 대리운전기사, 퀵서비스 기사 등이 단말기를 끄는 순간 고스란히 수익 손실로 이어진다. 특히 배달 플랫폼 기업들은 기상이 악화되는 경우에도 배달이 진행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배달라이더들이 가져가는 수수료를 높게 책정해 배달 노동자들을 모은다. 단말기를 끄면 포기해야 하는 수익은 더욱 커진다.
▲ 7월 16일 서울고용노동청 앞, 기후 재난 시기 이동 노동자 작업중지권 보장 촉구 및 현장 노동자 실태 발표 서비스연맹 기자회견 |
ⓒ 서비스연맹 |
'작업중단을 위해 필요한 조건'을 묻는 말에는 응답자의 47.5%가 회사 측의 안전조치(작업중단 지침 마련, 물량 조절, 고객 양해 공지 등)가 필요하다고 응답했다. 다음으로 41.8%가 작업중단 시 수익 손실분에 대한 보장이 필요하다고 답했다.
여기서 한 가지 주목되는 것은 작업중단을 위해 필요한 조건으로 금전적인 부분이 아닌 회사 측의 작업중단 지침 마련, 물량 조절이나 고객 양해 공지 등을 가장 많이 선택했다는 것이다. 실제 위협적인 상황에서도 작업중단을 하지 못한 이유를 묻는 말에 주관식 답변(기타 응답)의 대부분도 고객과의 관계 문제, 고객 불만 등이었다.
이는 기업이 기후 재난과 노동자 안전에 관심을 가지고 서비스를 받는 고객을 대상으로 안내만 잘해도 지금보다는 더 많은 노동자를 기후 재난에서 보호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고객이 양해해 준다면 물량조정 등은 한층 쉬워질 수 있다.
물론 고객 안내만으로는 부족하다. 기업이 노동자를 기후 재난 현장으로 내모는 제도 개선 역시 시급하다. 앞서 소개한 A씨의 경우 비가 억수같이 내리는 상황에서도 배송을 위해 운전대를 잡을 수밖에 없었다. 그 이면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7시 전 새벽 배송 완수'라는 기준을 설정하고, 배송을 완수하지 못하면 평점을 낮게 줘서 이후 쿠팡 일을 할 수 없도록 한 노무 관리 시스템이 자리하고 있다.
수익 보전과 관련해 기후 실업수당, 기후 보험 등 다양한 방안에 대한 사회적 논의를 확산할 필요가 있다. 기후 실업급여는 폭염이나 집중호우로 일을 하지 못하는 경우 이를 '초단기 실업'으로 보고 고용 보험을 통해 해당 시간에 대한 실업급여를 받는 제도다. 경기도는 내년부터 기후 보험 지원사업에 나설 예정이다. 기후 위기로 인한 건강 피해로 인정하는 진단 코드일 경우 손해사정을 따질 필요 없이 보험금을 신청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제도를 특수고용·플랫폼 노동자에게 특화해서 설계할 수도 있을 것이다.
법·제도 개선 필요
산업안전보건법에는 (현장에서의 사용에 많은 문제점이 남아 있지만) '산업재해가 발생할 급박한 위험이 있는 경우' 노동자 스스로 작업을 중단할 수 있는 권리(작업중지권)가 명시되어 있다. 하지만 이 권리는 근로기준법상 근로자에게만 보장되어 있어 특수고용·플랫폼 노동자에겐 그림의 떡에 불과하다.
재난적 상황에서 자신의 생명을 보호하려는 것은 인간으로서 가져야 할 최소한의 권리라는 점에서 작업중지권은 특수고용 노동자를 포함한 모든 일하는 사람에게 확대해 적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나아가 기후 위기로 더욱 심각해지고 있는 폭염, 폭우, 폭설 등에 대한 작업중지 기준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기후 재난으로 인한 산업재해는 먼일이 아니다. 이미 수많은 노동자가 기후 재난 현장으로 내몰리고 있다. 보호 장치 마련을 위한 논의와 제도화가 절실한 시점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격월간 <비정규노동>에도 실립니다.글쓴이는 백남주 전국서비스산업노동조합연맹 정책연구원 연구위원입니다. 이 글은 한국비정규노동센터에서 발행하는 격월간 <비정규노동> 168호 9,10월호 '기획[이동노동자 작업중지권]' 꼭지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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