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아이돌 고마워요... 싱가포르 대형마트에서 벌어진 일

이봉렬 2024. 8. 30. 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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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글로벌리포트 - K푸드 월드투어] '한류 열풍' 넘어, 싱가포르 음식의 일부가 된 한식

한류 열풍 속에서 한식의 맛과 멋을 즐기는 사람들이 늘고 있습니다. <오마이뉴스>는 2024년 하반기 특집으로 세계 각국의 한식 열풍을 소개하는 '글로벌 공동리포트'를 기획했습니다. 태평양을 건너간 김밥, 유럽을 강타한 불닭볶음면과 바나나맛 우유까지... 세계를 사로잡은 한식의 다양한 모습을 공유합니다. <편집자말>

[이봉렬 기자]

 다민족 국가인 데다 서양 문화가 진작에 흡수되어 음식의 천국이라는 싱가포르, 하지만 이민자가 원한 건 한국 음식이었습니다.
ⓒ 이봉렬
2006년대 초, 온 가족이 싱가포르로 이민을 왔습니다. 적도에 위치한 섬나라라 일 년 내내 더운 걸 제외하면 이민 초기에 가장 힘들었던 건 입에 맞지 않는 음식이었습니다. 중국계가 대부분이고 인도계와 말레이계가 섞여 사는 나라답게 다양한 음식이 많았지만, 30년 이상 한국 음식에 길든 토속적인 혀와 위가 원하는 건 고춧가루 잔뜩 뿌린 매운 음식과 젓갈, 된장, 간장 등이 들어간 짭조름한 한국 음식뿐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어느 대형 마트를 가더라도 일본에서 들여온 식자재는 쉽게 구할 수 있었지만, 한국 식자재는 거의 볼 수 없었습니다. 한국 식재료를 따로 수입해서 파는 곳이 있긴 했지만 거긴 가격이 너무 비싸서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 당시 소주 한 병이 2만 원이 넘고, 깻잎 몇 장 묶은 것도 만 원이 넘는 걸 보고 그냥 없는 곳이라 여기기로 했었습니다.

그래서 가까운 이웃끼리 일 년에 한두 번 한국에 갔다 올 때 마트에서 식자재를 잔뜩 사서 상자째로 가지고 오는 게 암묵적 행동 지침이었습니다. 그렇게 가져온 식자재를 조금씩 나누는 거죠. 깻잎과 고추장, 조미김은 필수였고, 양념류나 콩자반, 젓갈, 멸치조림 등의 밑반찬도 환영받았습니다.

외식을 하더라도 한국 식당만 찾았습니다. 하지만 당시 싱가포르에는 열 개 남짓한 한국 식당이 있을 뿐이라 선택의 폭이 넓지 않았습니다. 짜장면을 파는 한국식 중국집이 서너 개, 삼겹살을 구워 먹는 고깃집이 또 그만큼, 그리고 간단한 비빔밥부터 족발에 부대찌개까지 다양한 한식을 고루 내놓는 한정식집이 몇 개 더 있었습니다.

더운 나라임에도 차가운 면을 잘 먹지 않는 싱가포르 사람들 때문에 냉면 전문점은 찾아볼 수 없었고, 곱창이나 순대 등 손이 많이 가는 음식도 없었습니다. 일식집에 가면 회를 팔기는 하지만 한국식으로 푸짐하게 나오는 그런 횟집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한국에 가게 되면 싱가포르에서 먹지 못하는 음식을 식당마다 찾아다니며 먹는 걸 무슨 숙제 하듯 하곤 했습니다.

대장금이 한국 음식을 싱가포르에 소개하다
 싱가포르 탄종파가에는 한국 식당만 50개가 넘게 늘어서 있어서 코리아타운이라고 불러도 될 정도입니다. 도시국가 싱가포르에 한국식당만 300개가 넘게 있습니다.
ⓒ 이봉렬
하지만 그런 눈물겨운 세월은 그리 오래지 않아 끝이 났습니다. 싱가포르 마트에 한국 식자재가 들어오기 시작하더니 시내에 한국 식당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겁니다. 그런 변화는 두 번에 걸쳐 이뤄졌습니다.

첫 번째 변화는 <대장금> 때문이었습니다. 2004년에 처음 방영된 <대장금>은 싱가포르 공중파에서 몇 해에 걸쳐 네 번이나 틀어 줬습니다. 서점에 가면 대장금 관련 책이 주요 매대를 차지하고 있었고, <대장금>의 주인공들이 등장하는 광고도 자주 볼 수 있었습니다. 당시 <대장금>이 동남아시아에서 얼마나 인기가 있었는지 아시아나항공은 2006년에 비행기 동체에 대장금을 그려 넣은, 이른바 대장금호를 만들어 동남아시아 노선에 투입하기도 했을 정도입니다.

이런 <대장금>의 인기는 한국의 프랜차이즈 식당이 싱가포르에 진출하는 계기가 됐습니다. 2007년 BBQ치킨이 말레이시아 기업과 손잡고 첫 싱가포르 매장을 연 후 2년 동안 10개 이상의 매장을 추가로 열었고, 2012년에는 네네치킨도 싱가포르에 진출했습니다. 백종원 대표의 더본 코리아가 내놓은 고깃집 본가가 2012년에 첫 매장을 열었고, 2013년에는 백's 비빔밥도 들어왔습니다.

하지만 <대장금>의 인기가 한국 프랜차이즈 식당의 성공을 보장하지는 않았습니다. BBQ치킨은 한국 매장과 다르게 가족 레스토랑 형식으로 운영하다가 2013년에 모두 철수했고, 한 때 9호점까지 열었던 네네치킨도 지금은 다섯 개만 남았습니다. 본가도 현재 두 개만 운영 중입니다.

당시 프랜차이즈 말고 개인사업자가 차린 한국 식당도 많았습니다. 어디나 다 그렇듯 장사가 잘되는 곳은 지금까지 살아남았고, 안 돼서 문을 닫은 식당도 많습니다. 그러면서 열 개 남짓했던 싱가포르의 한국 식당은 싸이가 강남스타일로 한류에 불을 당긴 2012년에는 약 60개를 넘겼습니다.

한류가 만들어낸 싱가포르 내 코리아타운
 싱가포르에서 한국 드라마와 K팝, 예능만 방송하는 케이블 채널이 여럿 생겨서 한국 문화가 실시간으로 전달되고 있습니다.
ⓒ 케이블 채널 ONE 웹사이트
두 번째 변화의 계기는 바로 (<대장금> 이후의) 한국 드라마가 주도한 한류입니다. 나라별로 한류가 전해진 시기와 방법이 조금씩 다르겠지만 싱가포르의 경우는 2000년대 들어 시작된 한류가 2010년대 중반 이후 폭발적으로 넘쳐 흘렸습니다.

싱가포르 공영방송인 채널 U는 오래전부터 한국 드라마를 방영했습니다. 하지만 한국에서 방영된 지 오래된 드라마를 중국어로 더빙해서 소개하는 경우가 많아서 주로 중장년 세대가 많이 시청했습니다. 젊은 층은 보고 싶은 한국 드라마를 인터넷 불법 다운로드를 통해 보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2010년대 중반이 되면서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세계적으로 한류가 인기를 끌면서 싱가포르에서도 한국 드라마와 예능, K팝만 전문으로 방영하는 케이블 채널이 우후죽순 생겨났고, 한국과 같은 시기에 같은 드라마를 보게 됐습니다. 싱가포르 젊은이들이 한국 드라마에 푹 빠지면서 넷플릭스 순위 대부분을 한국 콘텐츠가 차지하는 경우를 흔하게 볼 수 있었습니다.

BTS와 블랙핑크의 노래를 듣고, <태양의 후예>와 <사랑의 불시착>을 본 싱가포르인들은 드라마에서 주인공들이 즐기는 한식에도 관심을 두기 시작했습니다. 떡볶이와 어묵, 삼겹살에 소주, 치킨에 맥주, 김치와 감자탕, 짜장면과 짬뽕… 드라마의 주인공들처럼 한식을 직접 경험하길 원했던 겁니다.

몇 안 되는 한국 식당은 몰려드는 손님을 맞이하기에 바빴고, 그 모습을 보고 많은 이들이 새롭게 식당을 열었습니다. 예전과 달라진 건 메뉴가 다양해지고 전문적이 됐다는 겁니다. 2000년대 초만 해도 몇 안 되는 한국 식당들이 한정식, 짜장면, 삼겹살, 치킨, 족발 등 인기 있는 메뉴를 모두 취급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선택의 폭도 좁았고, 한국에서 먹는 것과 맛의 차이도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2010년대 후반에는 분식, 냉면, 회, 찜, 탕, 죽, 비빔밥, 곱창, 순대… 등 메뉴별로 특화됐습니다. 부산 돼지국밥, 전주 비빔밥, 제주 갈치구이, 수원 갈비, 마산 아귀탕, 춘천 닭갈비, 북창동 순두부 등 한국에 가지 않아도 한국의 유명 맛집을 골고루 제대로 경험할 수 있게 됐습니다.
 싱가포르 탄종파가의 한국식당. 가게 밖에서 번호표 받고 대기하는 줄이 깁니다.
ⓒ 이봉렬
2024년 현재, 싱가포르의 한국업소 주소록에 올라와 있는 한국 식당 수만 260개가 넘고, 이름을 올리지 않은 곳까지 포함하면 300개는 훌쩍 넘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실제로 싱가포르의 탄종파가 지역에 가면 500미터 남짓한 거리에 한국 식당만 50개가 넘게 모여 있습니다. 도로 사이에 두고 양쪽으로 식당 둘 중의 하나는 한국 식당이라 입구에 코리아타운이라 이름 붙여도 전혀 어색하지 않습니다.

한국식당이 그렇게 많은데도 가게마다 늘 손님들이 많아서 밖에서 한참 동안 기다려야 하는데, 손님의 대부분이 싱가포르 현지인이라는 게 특징입니다. 20년 전 한국 음식을 그리워하는 한국 이민자들끼리 찾던 한국 식당 분위기와는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한국 음식이 싱가포르에서 일상이 되다
 싱가포르 푸드코트에 있는 한식 매장. 싱가포르인들이 한국 음식을 배워서 운영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집 근처 어디에서건 한식을 만날 수 있게 됐습니다.
ⓒ 이봉렬
한국식당은 여기서 고급식당으로 분류되기 때문에 가격이 비쌉니다. 안 그래도 물가 비싼 싱가포르에서 한국 식재료를 수입해서 제공하는 한국식당의 음식 가격이 비싸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값싸게 한국음식을 맛볼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싱가포르의 서민들이 즐겨 찾는 푸드코트에 있는 한식 매장에 가는 것입니다.

푸드코트 매장에선 라면, 비빔밥, 고등어구이, 김치찌개 등을 저렴한 가격에 팝니다. 주인이나 주방장이 한국인이 아닌 경우가 대부분이라 한국인의 입맛에는 살짝 어색하기는 하지만 싱가포르인들에게는 인기가 높습니다. 집 근처 어느 푸드코트에 가더라도 한국 음식을 맛볼 수 있게 됐다는 건 한국 음식이 이제 싱가포르 음식의 일부가 됐다는 뜻입니다.

한국식당이나 푸드코트의 한국 음식을 맛본 싱가포르인들이 이제 집에서도 한국 음식을 만들어 먹는 단계까지 왔습니다. 20년 전 한국 라면 말고는 한국 식자재가 없었던 대형 마트는 이제 한국 식자재 코너를 따로 만들어 깻잎, 상추, 애호박 등 한국 농산물을 팔고, 겨울이 되면 제주 감귤도 들여옵니다. 냉동실에는 만두, 핫도그, 떡갈비 등 한국에서 온 냉동식품이 가득하고, 냉장실에는 김치가 종류별로 전시되어 있으며, 짜장면, 짬뽕 등 즉석조리식품도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한국 과자도 진열되어 있습니다.
 싱가포르 대형 마트의 주류코너, 제일 좋은 자리에 한국 소주가 진열되어 있습니다. 20년 전에는 한 병에 25달러였는데 지금은 13달러로 가격도 저렴해졌습니다.
ⓒ 이봉렬
라면 코너에는 한국 라면이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주류 코너에는 한국 소주가 가장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한국 식품이 인기가 있다 보니 싱가포르나 태국의 식품업체가 만든 한국식 냉동식품에 한글 상품명을 붙여 한국산인 양 파는 경우도 흔합니다.
 마트 냉동고에 한글이 적힌 식재료들이 많이 보입니다. 모두 싱가포르나 태국 식품회사에서 만들어 한국 식품인 것처럼 보이도록 꾸민 것입니다. 한국 식품의 인기에 편승하려는 겁니다.
ⓒ 이봉렬
한류는 이민 20년차 싱가포르 이주민의 초기 걱정이던 한국 음식에 대한 그리움을 완전히 해소해 줬습니다. 당시만 해도 한국 식당이 몇 개 안 되다 보니 늘 가던 식당만 갔었는데, 지금은 매주 외식을 한다고 해도 한국 식당을 한 번씩 다 가보려면 몇 년이 걸릴 겁니다. 한국에 다니러 갔다 올 때도 한국 식재료를 잔뜩 싸 들고 오는 경우는 잘 없습니다. 수하물 추가 비용을 내느니 싱가포르에서 필요한 만큼 조금씩 사는 게 낫습니다.

2024년 현재, 싱가포르에서 한식은 한류를 넘어 싱가포르 음식 문화의 일부가 되어 버린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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