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한 감동" 영미권이 '파친코'에 보낸 전례 없는 호들갑
[하성태 기자]
"시대가 변했잖아요. 이제는 이 사람들이 우리한테 갚을 때예요."
드라마 <파친코>('Pachinko') 속 '자이니치'(재일조선인) 3세 솔로몬(진하)이 1세대 자이니치이자 고객인 한금자 할머니에게 항변한다. 10대 때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 솔로몬은 거대 은행의 일본 지사로 금의환향한 야심 찬 '뱅커', 즉 은행가다.
▲ 애플TV+ '파친코' 시즌2 관련 이미지. |
ⓒ 애플TV+ |
이때까지 솔로몬도 사실 잘 몰랐다. 정말 시대가 변한 건지, 일본과 미국이 조선인들에게 빚을 진 건 맞는지 말이다. 늘그막이 글자를 깨우칠 만큼 신산하게 살아왔던 한금자는 억만금을 준대도 땅을 팔기 싫다. 남편을 떠나보내고 먹고살기 바쁜 자식들과도 소원한 한금자에게 평생에 걸쳐 소유권을 쟁취해낸 땅이야말로 죽어서 묻혀야 할 심리적·물적 토대요, 어떤 민족적 자긍심의 발로일 터다.
이러한 1세대 자이니치 한금자와 부사장 승진이 걸린 솔로몬의 대립각은 미국과 일본 사이에 낀 과거 세대와 미래 세대 간, 이념 간 가치관 갈등을 대변한다. 고뇌하는 솔로몬에게 선자는 "그라모, 평생 자식들 뒤에서 희생하는기, 그기 우리 팔자가 이 말이가? 언제쯤 그만하면 되노? 죽으면 그만해도 되나?"며 역정을 낸다. 부산 영도에서 일본으로 건너가 가족을 건사하기 위해 죽도록 고생했던 선자의 한이 서린 한탄이었다.
그리하여, 한금자와 뒤이은 솔로몬의 예상치 못한 결정으로 인해 이중 삼중의 경계인인 솔로몬의 운명은 또 한 번 변곡점을 맞게 된다. 자기 땅, 그러니까 차별받는 재일조선인으로서 자신들의 물적 토대를 지켜나가겠다는 의지의 표출이 극적 반전을 도모하는 추가 되어 주는 것이다. 이 드라마가 단순히 반일이나 반미 등 민족적 대결 구도에 빚지지 않음을, 세대 간 대립까지 품어내는 야심을 드러내는 의미심장한 설정이라 할 수 있다.
2017년 뉴욕타임즈 '베스트 도서 10선'으로 꼽힌 재미교포 이민진 작가의 동명 소설 원작이자, 애플TV가 1억 3천만 달러(약 1000억)를 투자한 OTT 시리즈 <파친코> 시즌1은 4대에 걸친 한인 가족들의 이민사를 그리며 현재가 과거를 경유해 그 과거를 반추하게 만들고 또 그 과거가 현재를 추동하게 만든 바 있다.
"시대가 변했잖아요"라던 솔로몬의 대사처럼, 그렇게 <파친코>라는 TV 쇼는 텍스트 안팎으로 시대가 변했음을 온몸으로 강변해냈다. 한국 영화나 드라마도 엄두를 못냈던 소재에 도전한 이 용감무쌍한 미 애플TV 드라마는 미 매체에서 먼저 반향이 일었고, 글로벌 OTT와 K-컬쳐 바람을 타고 전 세계 27개 언어로 타전됐다.
지난해 <파친코>는 끝내 수상이 불발된 에미상은 외면했지만 제28회 크리틱스 초이스 시상식 최우수 외국어 시리즈상 수상하는 쾌거를 거뒀고, 전 세계 11개 시상식에서 수상하며 완성도를 인정받았다. 어렵지 않게 시즌2가 결정됐고, 마침내 첫 방영으로부터 2년 만인 지난 8월 23일 <파친코> 시즌2 1화가 공개됐다.
▲ 애플TV+ '파친코' 시즌2 관련 이미지. |
ⓒ 애플TV+ |
이제 <파친코> 시즌2는 공히 재일조선인 1,2,3세대를 모두 다루는 진귀한 드라마로 거듭났다. 단언컨대, 기대 하시기를. 먼저 시즌2를 정주행한 감상을 일부 풀어 놓자면, 시즌2는 시즌1과는 결이 또 다른 진한 감동과 놀랄만한 서사적 감흥의 깊이를 선사한다.
이제 1945년이다. 1910년에서 출발한 선자(김민하)의 시대적 배경은 시즌1 결말로부터 7년이 흘렀다. 2차 세계대전, 즉 일본이 일으킨 태평양 전쟁도 막바지에 이르렀다. 오사카에 터를 잡은 선자네 가족들의 삶은 여전히 신산하다. 전쟁 말기 일본인들의 삶이 그러했듯이. 심지어 노아와 동생 모자수까지 온 가족이 일본인들 틈에 끼어 죽창을 들고 전투 훈련까지 받는 상황이다.
'반도'라는 성을 쓰는 노아(김강훈)는 중학생이 됐지만 재일조선인에 대한 차별이 바뀔 리 없다. 좌익으로 몰렸던 선자의 남편 이삭(노상현)은 여전히 투옥 중이고, 이삭의 형 요셉(한준우)은 나가사키의 공장으로 돈 벌러 가서 집을 비운 상태다. 그 빈 자리를 종종 선자와 경희(정은채) 가족을 들여다보는 동네 남자 김창호(김성규)가 채운다. 그리고 선자 가족의 주변을 더 큰 자본가가 된 한수(이민호)가 맴돈다.
1989년 3세대 솔로몬(진하)의 고군분투도 여전하다. 시즌1에서 한금자 땅의 투자를 선자와의 갈등과 '민족적' 감정으로 스스로 좌초시켰던 솔로몬은 재기를 위한 기회를 엿본다. 물론 녹록지 않다. 여기저기 치일 뿐이다. 결국 솔로몬은 선자 앞에서 재일조선인을 차별하는 일본인 상점 점원에게 분노를 폭발시킨다. 그리고는 안쓰러워하는 선자에게 "이젠 너무 힘들어요. 할매를 계속 불쌍해 할 수는 없어요"라며 그간과는 다른 길을 갈 거라 선언한다.
솔로몬과 마찬가지로 결국 1~2세대나 3세대 자이니치 모두 상황과 조건은 다를지언정 선택과 생존이 관건일 터. 일본인 장인의 가업을 이어받은 한수에게도 재일조선인이란 낙인은 지워지지 않는다. 아들이 노아도 마찬가지다. 반도라는 일본 성을 빌려왔지만 자신도 재일조선인인 학교 선생이 그를 알아보곤 와세다 대학 진학을 응원해준다. 낙인이 민족애로 되돌아오는 순간이다.
선자의 분투도 계속된다. 전쟁 통에서 살길이 막막해진 선자는 밀주를 만들어 팔아보지만 그게 쉬울 리 없다. 그 선택은 선자를 결국 7년 동안 자신과 노아 곁을 몰래 지켜왔던 한수와의 해후로 이끌게 된다. 1화의 결정적 장면이자 시즌2의 향방을 가리키는 방향타다.
▲ 애플TV+ '파친코' 시즌2 관련 이미지. |
ⓒ 애플TV+ |
확실한 것은 시즌2 1화에서 엿볼 수 있는 감정의 진폭과 인물 간 갈등이나 내적 고민의 깊이가 시즌1 초반이나 시즌2 전체와 비교해도 훨씬 깊어질 것이란 기대다. 시즌1이 기실 선자가 일제 강점기 하 부산 영도에서 재일조선인으로 거듭나기까지 여정으로 발전시켜나가는 데 있어 중간 중간 서사나 감정의 빈 공간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시즌2 1화는 분명 달라 보인다. 특히 1945년 속 선자 가족에 대한 묘사는 '빌드 업'이란 표현이 어울릴 만큼 전개를 위해 감정과 설정을 켜켜이 쌓아가는 쪽에 가깝다. 개별 사건들 자체가 그렇다.
선자는 여전히 씩씩하지만 시대 상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노아도, 모자수도, 심지어 한수도 재일조선인이란 굴레에서 벗어나기란 요원해 보인다. 이런 '빌드 업'으로 인해 쇼의 포문을 여는 1화 치고는 살짝 심심해 보일 수도 있을 듯 하다. 하지만 시즌 전체를 아우르는 1화의 정서를 감안한다면 <파친코> 시즌2는 코리안 디아스포라라는 거대 가족 서사를 경유하여 멜로 드라마로서의 가능성을 품고 있다고 봐도 무방할 것 같다.
그리하여 세상을, 국내 시청자들 역시 놀라게 했던 <파친코>의 장점은 고스란히 이어진다. 세트부터 의상까지, 유려하고 우아한 촬영과 시대를 넘나드는 특유의 편집 또한 한층 원숙해졌다. 아카데미상 여우조연상 수상자인 윤여정을 필두로 시즌1의 배우들도 더 성숙하고 친숙한 얼굴 그대로다. 이중 새롭게 합류한 한수의 오른팔인 김창호(김성규)와 노아(김강훈, 강태주)가 새롭게 엮어낼 전개 또한 기대해도 부족함이 없을 듯 하다.
<파친코>의 디아스포라 서사는 식민지를 경험한 전 세계 시청자들에게 공감대를 형성하며 화제작으로 자리 잡았다. 확실한 건, 할리우드라는 천년왕국과 넷플릭스를 위시한 OTT 거대 공룡들을 거느린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초강대국 미국이 K-콘텐츠를 주목하며 지갑을 통 크게 열었다는 사실이다.
애플TV는 <파친코> 시즌2에도 1000억대 제작비를 아낌없이 쏟아부었다. 그건 비단 북미 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불어 닥친 K-콘텐츠에 대한 폭발적인 관심이 뒷받침된 결과다. 미 엔터 업계는 예상보다 훨씬 더 보수적이고 냉정하다는 현실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시즌1은 수 휴나 테레사 강 로와 같은 프로듀서들과 <애프터 양>의 코고나다 감독, <푸른 호수>의 저스틴 전 감독까지 '한국계'들이 쇼를 이끌어나갔다. 이 역시 전례 없는 일이었다. 시즌2는 여기에 '찐' 재일 조선인이자 <훌라걸스>, <악인>, <분노>, <유랑의 달> 등으로 일본 영화계를 이끌고 있는 이상일 감독이 연출자로 합류했다. <파친코>라는 TV 쇼 자체가 점차 코리안 디아스포라의 어떤 전범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1화 최초 공개 이후, 영미 평단은 전례 없는 호들갑으로 화답 중이다. <버라이어티>는 "원작을 뛰어넘는 화려한 감동"이라는, <뉴욕타임스>는 "사랑과 투쟁의 멋진 서서시"라는, 영국 <가디언>은 "역사상 최고의 고전에 가깝다"는 호평을 내놨다. 대다수가 1시즌을 뛰어넘는 완성도라는 데 이견이 없어 보인다.
이처럼 <파친코> 시리즈는 미국에서 이미 상업성이 검증된 이민진의 원작과 K-콘텐츠 및 K-컬쳐의 영향력과 창작자들의 힘, 애플TV의 고급화 전략과 맞아 떨어진 행복한 만남을 이어나가는 중이다. 그렇다. 시대가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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