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남선생의 완도 신교육과 항일운동

완도신문 김풍호 2024. 8. 30. 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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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도신문 김풍호]

ⓒ 완도신문
"우리 완도는 완도인의 완도이지 타인의 완도가 아니다. 모름지기 완도인이 이를 지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다만 관리의 명령에만 따르지 말고 자진해서 교육 경제의 개량 할 것은 개량하여 완도의 발전 진보를 계획해야 한다."

"완도는 타군에 비하여 물가가 고가이다. 그러므로 이 자리에 참석한 청년회원들을 중견으로 하여 완도소비조합을 조직하고 물화의 저가공급과 이익배당을 목적 하여야 할 것이다."

"조직된 완도 상회로부터 박리공급을 표방하고, 외지인(일본인)을 배척하여 조선은 조선인만으로 경영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완도상회'를 설립 운영하자, 일제는 '독립사상을 고취 선동한 것으로서 필경 정치의 변혁을 목적으로 안녕질서를 방해 할 것을 선동한 것'이라며 1920년에 소남 김영현 선생이 완도읍에서 청년들을 모아놓고 한 연설을 고발 조치했다. 김영현 선생은 장흥지방법원과 대구복심법원에 1년여간 구속 수감됐다가 무죄판결로 방면되었다.

위와 같이 소남 선생의 항일운동 저변과 그 단초가 조선의 신교육의 필요성과 항일운동의 당면성으로 인식됐다. 그 시작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908년 한성 융희학교에 입학 후 1회로 졸업(중앙고보 2회) 후 폐교되었고, 광주 교원 양성소를 거쳐, 1911년 완도고금보통 학교 개교 시 교사로 부임했다. 1920년 고금 학생 만세운동사건으로 교사에서 퇴출됐고, 위 완도상회 사건으로 1921년 무죄 판결 후, 1921년 경북 상주 낙동면 풍양조씨 조태연 요청으로 양진당 제각을 개조하여 조명 강습소를 세웠다.

1923년 오석균 선생으로 하여금 군외 사립교인학교를 개교시키고, 1924년 김영현 선생이 사립교인학교 교장으로 취임해 1924년 노농회 세 곳을 당일 창립(사립교인학교 분교 교사와 완도 해남 학생 들이 주도)했다. 세 곳은 완도면 중도리 중도 노농회(완도군), 해남 북평면 영평 노농회, 서홍 노농회(해남군)이다.

1927년 사립 교인학교에 바다건너 해남군 북평면에서 많은 학생들이 몰려오자 그곳 해남에 사립교인학교 분교를 동명학원과 동광학원 두 곳으로 설립하였다. 사립교인학교가 11년간 운영돼 왔으나 1934년 독립운동가 양성소라고 해 강제 폐교됐다.

동년 불목리 영창간이학교로 이전 개교됐으나, 1943년 영창간이학교는 강제 폐교됐다. 1945년 군외 동초등학교, 군외초 불목분교로 개칭(현재, 2020년 3월 1일 폐교)됐다.

정리하면, 소남 김영현 선생은 고금 보통학교 10년 근무, 경북 상주에 사립학교 조명강습소 3년, 군외면에 사립 교인학교 설립(9년), 해남 북평면에 사립 동명학원과 동광학원을 설립, 총 30년 동안 2천여명의 문하생을 배출시켰다. 젊은이들에게 문맹퇴치운동, 조혼폐지, 미신타파, 반일투쟁과 백의민족 정기를 고취시켜 대다수 제자들이 항일 운동을 하도록 유도했다.

당시 항일운동 개요는 신간회 조직 및 노농회, 무산청년회, 광주학생사건, 독서회사건, 불목리 청년반사건, 고금학교 만세사건, 신지면 강습소사건, 약산 사립학교 출판물사건, 완도소비조합사건, 전남운동협의회사건 등의 주동자는 소남 김영현 선생의 제자들이었다.

선생의 항일운동은 완도군의 대표적 항일운동인 소안항일운동(중앙고보 6회 송내호), 신지항일운동(중앙고보 4회 임재갑), 고금항일운동(중앙고보 2회 김영현)과 매우 밀접하게 전개됐다.

소안항일운동은 이미 국가차원에서 기념사업회 등 관련 부분사업들이 잘 조명돼 있고, 신지항일운동은 임재갑 선생이 신지사립학교를 설립(1924년 3월 17일 개교)하고 장석천 선생(신지출신이나 고금보통학교를 다님)과 학교 교육을 통한 항일운동을 전개했다.

고금항일운동은 1911년 개교한 고금보통학교 출신 정학균, 이현렬, 홍철수, 이수열, 배명순, 김천녕 등이 주도해 1919년도 기미만세후 죽음을 무릅쓰고 일제강점기에 1920년 고금만세운동을 했다. 또한 고금보통학교와 교인사립학교 출신들이 광주로 유학해 성진회, 독서회를 조직하여 광주학생운동을 주도했다. 이는 전국적인 학생운동으로 확산됐다.

이후에 국내 최대 항일운동사건인 전남운동협의회 사건은 3200여명이 가담하고, 557명이 조사를 받고, 57명이 구속당한 사건이 있었고, 그 후 재건운동사건도 있었다.

특히, 1943년 대동아전쟁 당시, 일본군이 최후의 발악을 할 때, 공출과 징용, 정신대 착출 시, 선생의 주위에는 전담 감시경찰이 있었다고 한다.

당시, 완도의 대표적 생산 물품이 일본인이 제일 좋아하는 기호식품인 해태(김)였다.

이때 "우리 완도는 해태를 생산하려면 일손이 모자란다. 온 가족이 새벽부터 일어나 김을 뜨는 실정이므로 일손이 부족하다"라고 일본에 항변하자,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당신이 면장을 하시오!"라고 주민들이 설득해 오자, 임시로 수락하여 잠시나마 면장을 하면서, 공출과 징용을 최대한 억제 시키고, 정신대 차출은 한 사람도 없게 하였다고 한다.

또한, 당시 전담 경찰의 눈을 피해, 소중한 우리나라 역사책과 완도군의 보물인 가리포첨사선생안(역대 첨사 기록물)을 가지고 고마도 은신처 집 마루 밑 땅속에 숨겼다가, 8.15 광복 후에 학생들을 가르치는 자료로 사용했다.

그리고, 일제가 군수물자로 쓰기위해 철비인 가리포첨사 명선욱의 공적비를 철거하여 배로 실어 가기위해 원동리 선착장에 쌓아둔 것을, 선생이 한 밤중에 몰래 배씨 장사를 시켜 지게로 황진리 친척집에 숨겨두었다가 해방 후 완도읍 공원에 세우게 하였다(청해비사, 재발간용, 2012년).

그리고, 학교 교사와 학생들을 활용하여 주민들 교육과 항일운동 배일사상을 고취하는 마을 단위의 노농회를 완도 일대 및 해남 일부에 조직하여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관련 자료는 추후 기회가 주어지면 기고할 것을 약속한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김풍호씨는 완도문화예술협동조합 대표입니다. 이 기사는 완도신문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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