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도, 당사도 등대와 후박나무 장수도는 항일 상징

완도신문 정지승 2024. 8. 30. 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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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도신문 정지승]

ⓒ 완도신문
전남 완도군 당사도에는 우리나라 항일 역사와 관련한 명물이 많다. 그중 완도군 최남단에 있는 당사도 등대와 후박나무 군락, '완도 땅' 장수도가 항일 역사의 중요한 상징으로 재조명되고 있다. 1909년에 처음 불을 밝힌 당사도 등대는 1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완도와 제주해협을 오가는 배들의 안전을 책임져 왔다. 특히 일제강점기에는 지역민들의 울분을 달래며 항일 투쟁의 중심지로 자리 잡았다.

당사도 등대는 1930년대 우리나라 최초로 전파표지인 무선방향탐지기가 설치된 곳으로 무선 방위 측정 업무를 수행했다. 이는 일제의 남해 항로 장악을 위한 것이었으나 동시에 이 지역 의병들과 주민들의 항거의 중심지가 되기도 했다.

특히 1909년 1월, 이준화 외 5명의 의병들이 당사도 등대를 습격해 일본인 4명을 처단하고 시설물을 파괴한 사건은 민중 항쟁의 시발점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 사건 이후, 소안면민들과 의병들은 더욱 강력한 저항을 이어갔다.

광복 이후, 주민들은 일제강점기에 세워진 비석을 무너뜨리고 그 자리에 항일 의병들의 투쟁을 기리는 항일전적비를 세웠다. 이로써 당사도는 항일 역사의 현장으로서의 의미를 더욱 공고히 하게 됐다. 당사도 등대는 오늘날에도 그 항일 정신을 기리며 완도군의 소중한 역사 유산으로 남아 있다.

2024년은 신안 암태도에서 일어난 '소작쟁의' 100주년을 맞이하는 해였다. 1923년 시작된 이 운동은 조선시대부터 350여 년 동안 이어진 하의3도의 농지탈환운동 중 하나로, 일제강점기 식민수탈에 맞서 싸운 우리나라 농민운동의 중요한 역사적 사건으로 남아 있다.

당시 일제의 수탈로 인해 소작료는 기존의 4할에서 8할로 폭등했다. 이에 암태도 주민들은 소작인회를 조직하고 일본에 항거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당시 노동단체와 언론단체와도 연대하여 소작료 인하를 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이러한 성과는 1920년대 유일한 승리로 기록된 농민운동으로 전국적인 소작쟁의 운동의 도화선이 됐다.

그런데 완도군 신지도에도 소작쟁의와 관련된 중요한 항일운동 기록이 존재한다. 1927년 고금도에서 고금농민조합은 강진에 거주한 지주 김후식을 상대로 약 700명의 소작인들이 소작쟁의를 벌였다. 1928년 4월에는 해남에 거주한 지주 천선재와 강진에 거주한 김충식을 상대로 다시 소작쟁의가 일어났다.

특히 해남 출신의 천선재는 완도군에서 약 180여 두락의 토지를 소유한 지주로 6~8할의 높은 소작료를 부과하며 천재지변으로 수확이 없는 경우에도 무리하게 소작료를 징수해 주민들의 원성을 샀다. 이에 소작인들은 1927년 불예동맹을 결성해 저항했고, 농민조합에서 파견된 김병규와 지종호 교섭위원들이 천선재와의 교섭을 통해 소작료를 4할로 조정하는 성과를 거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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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안면 당사리 마을 입구에는 '김석주영세불망비'가 세워졌다. 이 비석은 1973년 8월 15일 당사도 주민들이 광복절을 기념해 세운 것으로 당사도가 해남에 거주한 천아무개씨의 개인 섬으로 변한 후 이를 되찾기 위한 김석주 옹과 주민들의 노력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졌다.

김석주 옹은 7년 동안 주민들과 함께 차근차근 돈을 모아 섬을 마을 재산으로 되찾았으며 그 과정에서 후박나무를 베어 팔아 자금을 마련하기도 했다. 마침내 1941년 8월 15일, 당사도는 완전히 주민들의 소유가 됐다. 천아무개씨의 행적을 보면 신지도 항일운동사에 기록한 해남의 천선재일 가능성이 크다.

마을 입구에 세워진 공덕비는 현재 당사리 김미화 이장의 조부였던 김석주 옹의 공적을 기리고 있다. 김 이장은 "주민들이 소작생활을 하면서 산속 깊은 곳에 작은 터만 보여도 몰래 개간해 농사를 지은 이야기를 선친에게 들었다"며 마을에 전해온 이야기를 꺼냈다. 그들은 숲속 텃밭을 웅치라고 부른다.

마을의 역사를 꿰고 있는 최민재 전 노인회장에게 장수도와 관련한 자세한 이야기를 들었다. 최씨는 어린 시절 부친이 돛배를 끌고 장수도에 가서 해초를 채취해온 일들을 모두 기억했다. 그가 20대 되면서 당사리 사람들은 소를 기르기 시작했다. 소가 큰 재산이 된 때라서 많게는 7마리를 사육한 주민도 있었다. 소를 기르는 주민이 점차 늘어나자 당사도에는 소먹이가 부족해서 수시로 장수도에 가서 풀을 베어다가 힘겹게 소를 키웠던 당시의 일을 회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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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김미화 이장과 주민들은 몇 해 전 당사도 등대 무인화를 반대했다. 관광자원화하기로 결정한 섬에 있는 등대를 무인화한다면 그나마 오던 사람들의 발길이 뚝 끊기고 말 것이라는 우려에서 비롯했다.

그것은 정말로 잘한 결정이었다. 다른 시각에서 바라 본 김미화 이장의 순간 판단력에 주민들은 모두 찬사를 보내고 있다.

주민들은 "오늘도 등대 스템프 투어에 참여한 젊은 여행객들이 당사도라는 오지 섬을 찾는 것 보면 신기할 뿐"이라고 말한다. 이제, 당사도의 상징은 등대와 후박나무, 장수도가 포함됐다. 보존 노력과 지켜야할 당위성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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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완도신문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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