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급 대가는 만성 위경련, 그녀의 '번아웃' 극복기

김상목 2024. 8. 30. 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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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예술영화 개봉신상 리뷰] <문경>

[김상목 기자]

'문경'은 문화예술 기획사에서 능력을 인정받는 직원이다. 소수 인원으로 전시회 기획을 도맡느라 인력 충원을 요청하지만, 합리적 업무 배분보다 주먹구구식 정실인사가 지배하는 국내 기업문화 덕분에 항상 고려해보겠다는 형식적인 답변만 들을 뿐이다. 그래도 책임감과 일 욕심 덕분에 늘 과중한 업무량에 시달리는 중이다. 부서 내 정규직은 자신과 후배 '하원' 뿐, 부족한 인력은 계약직으로 채워진다.

계약직이지만 열심히 일하고 실력도 괜찮은 '초월'을 '문경'은 아낀다. 신규 전시 프로젝트 책임자로 일복 터진 그는 맡은 일 척척 해내고 아이디어 샘솟는 '초월'을 상급자에게 칭찬하며 이번에는 반드시 신규채용 TO를 받아오겠다는 의지를 거듭 피력한다. 전시회는 성황을 이루고 평가도 후하다. 이제 '인력 충원' + '본인의 승진' + '초월의 정규직화' 꿈이 이뤄질 것을 기대할 만하다. 하지만 능력주의를 표방하면서도 정작 실상은 사내정치에 좌우되는 현실 탓에 그의 꿈은 배신당한다. 부려먹기만 하고 약속은 지켜지지 않는다.

본인 불이익은 참을 수 있다. 하지만 몸이 가루가 되도록 열심히 일해봐야 계약직을 전전하는 '초월'에 대한 부당한 처우는 참을 수 없다. 불만은 점점 쌓여간다. 회식 현장에서 그만 사건이 터지고, '문경'은 '초월'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정신 줄을 놓고 만다. 일어난 사고는 돌이킬 수 없다. 과로 때문에 앓던 위경련으로 병원 신세를 진 그는 며칠이라도 숨 쉴 틈을 만들고자 휴가를 신청한다. 그는 연락이 끊어진 '초월'의 고향,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경북 '문경'으로 향한다.

심신쇠약 상태에다, 회사로 돌아가도 뒷수습할 게 천지이지만, 그래도 오랜만에 휴가를 떠나니 표정은 밝아진다. 그는 우연히 길에서 차에 치여 다친 강아지 '복순'과, 강아지를 구하는 과정에서 마주친 비구니 스님 '가은'과 동행한다. 함께 '복순'을 동물병원에서 치료하고, 주인을 찾기 위해 여기저기 동네를 누비던 와중에 최근에 반려견을 잃어버린 '유랑 할매'와 갈등을 겪기도 한다. 오해가 풀리자 '유랑 할매'는 사과의 뜻으로 끼니를 제공한다. 일행은 집주인의 권유로 일박하게 된다.

일상 치유물의 왕도 구성을 선보이다
▲ "문경"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트윈플러스파트너스(주)
<문경>은 각기 상처를 품은 이들이 일상을 벗어난 여행길에서 '우연을 가장한 필연'으로 만나고 어울리며 서로를 이해하고 위로하는 과정을 다룬다. '힐링', '치유'를 주제로 한 일군의 흐름을 연상하면 '각'이 나오는 작업이다. 각박한 대도시 & 직장생활에 소진된 이들이 낯선 공간과 새로운 사람들 덕분에 재기할 기운을 차리는 과정이 치료제 같은 효용을 보인다. 그래서 세상 살기 힘들수록 이런 타입 작업은 더 환영을 받게 마련이다. 역설적인 현상이 아닐 수 없다.

도입부의 약 2할 분량은 주인공이 처한 고단함을 묘사하는데 할애된다. 직장인의 애환, 비정규직이 겪는 부당한 대접을 축으로 해당 부분은 관객에게 공감을 끌어올리는 목적으로 배치된다. 누구나 불합리하다고 여기지만 절대 바뀌지 않는 세상 원리를 전형적으로 묘사한다. 그래서 특별한 개성보다는 도구적인 느낌에 가깝다. 주인공과 계약직 후배는 더는 버티지 못할 지경까지 추락을 겪어야만 한다. 그래야 다음 이야기가 전개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8할 분량을 차지하는 낯선 세계와의 만남이 펼쳐진다. 화면이 대도시에서 다른 차원으로 전이되듯 '문경'으로 향한다. 근대적 철도와 도로가 생기기 전, 오랫동안 육로 교통에서 거쳐야 할 관문이던 '문경새재'가 위치한 그 '문경'이다. 차례로 문경의 풍광과 명소를 소개하며 화면 속 공간은 연속된다. 그리고 반지원정대 구성처럼 일행은 늘어간다. 대도시의 바쁜 일상이라면 그냥 지나칠 인연도 미지의 세계에선 허투루 지나치지 않는다. 여행을 떠나야만 가능한 체험이다.

'문경'과 '가은'은 '길순'을 구출하면서 삼각편대를 구축한다. '길순'을 구조하는 과정이 없었다면 둘은 인연을 맺지 못했을 테다. '길순'은 둘의 조력이 아니었다면 분풀이로 솥에 들어갔을지도 모른다. 주인을 찾기 위해 붙어 다녀야 하니 둘은 계속 동행해야 한다. 인연이란 그렇게 일방적인 게 아니라 상호작용하게 마련이다. 관계망은 추가로 확장된다. '유랑 할매'가 이들과 접속하면서 길 위를 떠돌던 일행은 하룻밤 안식처를 얻는다. 마치 반지원정대가 고단한 몸을 잠시나마 쉴 수 있던 영화 속 장소와 같은 역할을 떠안은 셈이다. 그곳에서 이들은 또 다른 인연과 대면하게 된다.

치욕을 견디는 우리들의 거울 반영
▲ "문경"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트윈플러스파트너스(주)
'문경'은 '번아웃'을 앓고 있다. 일 중독 상태임을 자타가 공인하는 그는 정규직 월급의 대가로 만성 위경련을 겪는 중이다. 야식 문화가 육체적 굶주림보다 정신적 허기짐 때문이라는 사회적 진단처럼, 그의 위경련 역시 업무에 대한 무한 책임감과 과중한 근로조건 탓에 겪는 스트레스가 원인으로 여겨진다. 급성 위경련으로 병원에 입원한 그를 찾아온 엄마는 휴대전화 압수라며 사람이 살아야지 하곤 역정을 낸다. 당장 때려치우고 싶은 분노와 오히려 징계를 당할 처지의 억울함에도 불구하고 그가 취한 조치는 고작 3일의 휴가신청이다.

하지만 이제 계약직 직원이 나가면서 둘만 남게 된 부서의 후배는 자기는 어떡하냐며 이기적으로 짜증을 부린다. 그야말로 든 자리는 몰라도 빈자리는 티가 확 나는 전형적인 예시다. 고작 3일 휴가를 쓰기만 해도 업무가 마비되는 부서라면 정상적으로 운영되는 게 아니다. 사람을 갈아 넣어야만 가능하다. 그 과정에서 소진되는 걸 당연시하는 구조다. 대한민국 직장인의 우울증과 공황장애는 절대적으로 그런 시스템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문경'은 부당한 현실에 분노하고 개선하려 시도하지만, 그의 도전은 상급자들에겐 '기어오르는' 행위로만 비칠 뿐이다. 그리고 본인 역시 파국을 경험하자 무력함을 인정한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듯, 그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월급만 바라보며 참고 견디기 아니라면 떠나는 것뿐이다. 영화 속에서 주인공의 선택은 소심하고 답답해 보이지만 결국 우리가 현실에서 치욕을 견디며 버티는 과정과 다를 바 없다. 오히려 화끈하게 사표를 던지지 못하기에 '문경'의 태도는 더 공감대를 얻을 수 있었다.

사회적 재난의 생존자들 연결하기
▲ "문경"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트윈플러스파트너스(주)
영화는 여기에서 더 나아가 다양한 사회적 참사의 기억을 등장인물들을 통해 접목하려 시도한다. '초월'은 이름과는 정반대로 한국 사회에서 비정규직이 갖는 설움과 한계를 '초월'하지 못한다. 그는 자신의 재능을 발휘하고 열심히 노력하면 인정받을 수 있다고 믿었지만, 도입부에서 '초월'이 겪는 차별은 이미 신분제 계급사회로 치닫는 우리 사회의 병폐를 적나라하게 증명할 뿐이다. 보고 있으면 치가 떨리고 울화통이 나지만, 극장 밖 일상에서 내가 정규직에 속한다면 세상 이치라 어쩔 수 없다며 팔이 안으로 굽을 수밖에 없다.

비구니 스님으로 나온 '가은'은 사회적 참사의 생존자다. 세상은 그 사건을 망각했지만, 그와 유가족은 영원히 '림보'에 갇히듯 서로를 힘겨워한다. 관객은 한국 사회가 수십 년째 도돌이표처럼 반복하는 사회적 참사의 기억을 환기할 기회를 얻는다. 하지만 이 대목에서 영화는 공적 기억 환기와 문제 제기보다는 유가족 사이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는 구별 짓기와 개인이 감당해야 할 죄의식의 무게감을 묘사하는 데 주력하고자 한다.

사회적 모순 때문에 영화 속 주인공들은 상처를 입었지만, 누구도 그들의 슬픔을 해결해주진 않는다. 공적 시스템이 책임지지 않으니 살아남으려면 자력갱생해야 한다. 이 전제 자체에 부당함을 느끼는 관객이 있을 테다. 사회구조의 희생자들이 살아남기 위해 서로를 의지해야만 하는 묘사가 너무 한계가 뚜렷하게 보이는 탓이다. 하지만 영화는 공분을 확산하기보다는 생존자들의 이해와 연대에 초점을 맞춘다. 그런 방향성에서 작품에 대한 평판이 나눠질 테다.

치유의 공간으로 변신한 경북 문경의 거부할 수 없는 매력
▲ "문경"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트윈플러스파트너스(주)
'유랑 할매'의 역할은 고단한 여행자들에게 절실한 도움을 제공하며 그들이 확장될 수 있도록 안내하는 가이드이다. 그가 지내는 고택은 현실과 분리된 작은 우주다. '문경'과 '가은'이 이 집에 들어서는 순간과 떠나야 할 순간에 문경 지역의 밝고 화사한 풍경은 단 두 번 흑백으로 변한다. 대개 과거 회상 플래시백이나 생과 사의 경계를 표현할 때 즐겨 쓰이는 처리방법이다. 이 영화에선 고택에 들어선 주인공들의 숙제를 풀이하는 과정이 시작되고 끝난다는 일단락의 구분 선으로 활용된다.

그 직후에 인물들이 끌어안고 어찌할 줄 모르던 응어리들이 다시 '우연을 가장한 필연'으로 해소되는 카타르시스가 깃든다. 논리적 개연성이 아니라 초월적 상징성이 폭발하듯 '결정적 찰나'에 분출한다. 이 순간 주인을 잃고 버림받은 존재는 '변장한 천사'로 그 진정한 실체를 드러낸다.

작품 배경과 제작 의도를 살펴보면 좀 더 <문경>의 설정과 방향을 이해하기 좋지만, 굳이 사전정보 없이 봐도 동시대 한국 사회를 살고 있다면 영화가 선보이는 태도와 시각을 소화하는 데 문제가 없다. 영화는 세상을 바꾸자는 결연한 의지와 피아식별보다는 식물의 지혜와 인내를 눌러 담아 관객을 위로하고 견딜 수 있도록 응원하려 한다.

그런 취지가 담긴 영화에서 자신을 돌아보게 해줄 소소한 마법 공간으로 감독은 고향 문경의 (젊은 시절엔 눈여겨보지 않던) 아름다운 풍경을 넘치게 활용한다. 과유불급으로 보이는 순간도 간혹 있지만, 눈요기로는 충분히 흐뭇한 장면들이다. '문경'은 고작 3일간 마법 같은 시공간을 경험한 후 다시 과로와 징계가 기다리는 서울로 귀환해야 한다. 그의 처지가 쉽게 개선될 리 없다. 하지만 사람 '문경'에게 장소 '문경'은 견딜 힘을 넘치게 선물해준다. 이 영화가 의도한 사용법을 숙지한다면 관객 역시 필요한 도움을 얻게 될 테다.

<작품정보>

문경
Mungyeong: More than Roads
2024 한국 드라마
2024.08.28. 개봉 111분 12세 관람가
감독 신동일
출연 류아벨(문경 역), 조재경(가은 역), 최수민(유랑 할매 역),
채서안(초월 역), 김주아(유랑 역), 복순(길순 역)
제작 비아신픽처스
배급 트윈플러스파트너스(주)

2024 25회 전주국제영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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