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女의사 강간·살해' 인도 발칵, 3주째 시위…제2의 델리사건 되나 [세계한잔]

박형수 2024. 8. 30.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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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어사전 > 세계 한잔

[세계 한잔]은 우리 삶과 맞닿은 세계 곳곳의 뉴스를 에스프레소 한잔처럼, 진하게 우려내 한잔에 담는 중앙일보 국제부의 온라인 연재물입니다.

인도의 한 수련의가 자신이 일하던 병원에서 성폭행 당한 뒤 살해된 사건으로 촉발된 인도 전역의 시위가 3주째 격화되고 있다. 경찰은 시위대를 향해 최루탄과 물대포를 쏘고 곤봉을 휘두르는 등 강경 진압에 나섰다. 시위대와 경찰 간 강대강 대치가 이어지면서 이번 사건이 2012년 23세 여성 버스 집단강간 살해 사건으로 사회이슈화된 ‘델리 사건’ 이후 ‘제2의 델리 사건’으로 번질 수 있단 우려도 제기되고 있다.

인도 콜카타 경찰이 27일 하우라에서 서벵골 주총리 마마타 바네르지의 해임을 요구하는 시위대를 해산시키기 위해 물대포와 최루가스를 발포하고 있다. EPA=연합뉴스


28일(현지시간) 인디안익스프레스·타임스오브인디아·힌두스탄타임스 등에 따르면 전날 서뱅골주(州)의 콜카타와 하우라의 여러 지역에서 거리 시위에 나선 수천 명의 시민들이 경찰이 쌓아둔 바리케이트를 돌파하자 경찰이 시위대를 향해 곤봉을 휘두르며 돌격했다. 시위대의 행진이 계속되자 경찰은 최루탄과 물대포를 쏘며 저지했다. 이 과정에서 경찰을 포함해 16명이 다쳤고 최대 126명의 시위대가 체포됐다.

이날 시위대는 인도 국기를 흔들며 콜카타에 위치한 서벵골 주정부 청사로 향하며 마마타 바네르지 서벵골 주총리의 사퇴를 요구했다. 경찰 고위 관계자는 이날 서벵골 전역에서 시위를 진압하는 데 5000명의 경찰이 투입됐다고 전했다.

27일 인도 콜카타에서 시위대를 해산하기 위해 경찰이 최루탄을 발사하고 있다. AP=연합뉴스

병원 등 사건 은폐 정황에 인도 사회 발칵


이번 시위는 지난 9일 콜카타의 RG카르 의대병원 세미나실에서 강간·살해된 31세 여성 수련의 사건으로 촉발됐다. 로이터통신은 해당 수련의가 8일 36시간 연속 근무를 마친 뒤, 잠시 휴식을 취하러 세미나실에 들어가 카펫 위에서 쪽잠을 자던 중 변을 당했다고 전했다. 시신 발견 당시 그는 옷이 반쯤 벗겨진 상태였다. 눈과 입에선 큰 출혈 흔적과 함께 전신에 광범위한 손상이 발견됐다. 생식기에는 잔혹한 성적 고문 흔적도 남아 있었다.

그는 살해되기 불과 몇 시간 전,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고혈압을 앓고 있는 아버지가 제때 약을 복용하는지 잘 확인해달라고 당부한 것으로 알려졌다. 인도 카스트 중하위 계급 출신인 그는 가난한 부모의 외동딸로 태어나 의사가 되기 위해 열정적으로 공부했고, 가정의 재정적 어려움을 해결하는 게 꿈이었다고 BBC는 전했다. 62세 재단사인 아버지는 “주변에서 ‘너는 결코 딸을 의사로 만들 수 없다’고 조롱했지만 딸은 의대에 합격해 그 말이 틀렸다는 걸 증명해냈다”면서 “(살인 사건으로) 모든 게 산산조각났다”고 망연자실했다.

인도의 한 도로변 벽에 수련의 강간 살인 사건을 비난하는 내용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AFP=연합뉴스


충격적인 사건 이후 병원과 경찰·주정부 등이 사건을 은폐·축소하기 위해 증거를 조작한다는 의혹이 증폭되면서 인도 사회는 발칵 뒤집혔다. 실제로 수련의 시신 발견 직후 당시 병원장이었던 샌딥 고쉬 교수가 경찰에 신고하지 않고 시간을 끈 사실이 알려졌다. 고쉬 교수는 이번 사건의 책임을 지고 사임했지만 곧바로 다른 병원에 재취업한 상태다.

또 콜카타 경찰은 딸의 죽음을 전해 듣고 병원을 찾아온 부모에게 “자살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통보하며 사건을 무마하려 했다고 미국 CNBC 등은 전했다. 이후 사망한 수련의의 몸에서 150㎎의 정액이 발견되자 피해자 가족은 “이는 집단 강간의 증거”라며 “더 많은 범인이 연루됐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고 AP통신은 전했다.

용의자는 이 병원에서 자원봉사자로 일하던 33세 남성 산자이 로이로 현재 검거된 상태다. 로이는 포르노 중독자에 전처를 구타하고 고문한 전력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경찰과 친분이 두터워 전처가 수차례 그를 폭행으로 신고했을 때도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았다. 미심쩍은 정황이 겹치면서 “사건에 연루된 누군가를 보호하려는 것”이라는 주장도 제기됐다. 콜카타 고등법원은 각종 의혹이 증폭되자 사건 관할을 콜카타 경찰에서 중앙수사국(CBI)으로 이관한 상태다.

콜카타의 한 병원에서 강간 살해된 여의사의 사건 이후, 정의를 요구하는 시위에서 의사들이 들고 있는 현수막. 로이터=연합뉴스

‘제2 델리 사건’으로 주목


당초 이번 사건은 여성 의료인의 안전과 인권, 인도 내에 만연한 성폭력 문제 등에 초점 맞춰지면서 ‘제2의 델리 사건’으로 주목받았다. 델리 사건이란 2012년 인도 델리의 한 버스에서 23세 여대생이 집단 강간당하고 살해된 엽기적인 사건으로 인도 전역에서 시위가 들끓었다. 결국 중앙정부와 주정부는 여성 치안을 보장하기 위한 다양한 대책을 내놓았다.

하지만 여성을 겨냥한 성폭력 사건은 크게 개선되지 못했다. 2022년 기준 신고된 성폭행 사건은 3만1516건으로, 매일 86건의 성폭행 사건이 발생한 셈이다. 하지만 성폭력 사건 중 유죄로 처벌받는 비율은 매우 낮다. 인도 국가범죄기록국(NCRB)에 따르면 2018~22년 성폭행으로 유죄 판결을 받은 비율은 27~28%에 불과하다.

이번 사건은 피해자가 의사라는 점에서도 놀라움을 안겼다. 미국 매체 NPR은 인도에서 의사는 신에 버금가는 직업이지만, 여성 의사의 4분의 3이 직장에서 폭력을 경험한다(2015년 조사)고 전했다. 한 여성 의사는 “응급실에 실려온 환자가 목숨을 잃자, 환자의 친구들이 나를 구석에 끌고가 물리적으로 공격했다”며 “매일 이런 압박에 시달리는 건 힘든 일”이라고 알자지라에 전했다. 매체는 “인도 병원에는 여성 의료인을 위한 시설이 사실상 전무하다”면서 “일부 여의사들은 근무실조차 제공받지 못해 병동에서 잠을 잔다”고도 했다. 이번 사건이 벌어진 RG카르 의대병원에도 여성 의료인용 기숙사나 휴게실은 없었다.

의사들이 인도 하이데라바드의 한 거리에서 콜카타 출신 수련의의 강간 살인을 비난하는 시위에서 플래카드를 들고 있다. AFP=연합뉴스

주·연방정부 격돌, 정치적 비화 가능성


이번 사건은 정치 이슈로도 비화되는 분위기다. 27일 대규모 시위에 대해 서벵골 주정부는 “인도인민당(BJP)이 배후”라며 시위대를 “정치적 목적에 따른 폭도”라고 주장했다. 현재 서벵골 주총리인 바네르지는 인도 트리나물콩그레스(TMC)의 대표로, BJP 소속의 나렌드라 모디 총리의 최대 정적 중 한 명이다.

특히 주정부는 이번 시위 현장에 BJP 당원이 여러 명 포착됐다면서 “(시위대가) 정치적 목적을 위해 반정부 구호를 외치며 법과 질서를 장악하려는 불법적 시도를 했고, 경찰은 폭도 해산을 위해 무력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고 강조했다.

마마타 바네르지 인도 서벵골 주총리이자 트리나물콩그레스당(TMC) 대표. AFP=연합뉴스


이에 대해 연방정부 교육부 장관인 수칸타 마줌다르는 “이번 수련의 강간·살인 사건의 잘못된 처리와 관련해 바네르지 주총리를 권좌에서 몰아내 갠지스강에 담가야 할 것”이라며 “BJP는 사회 정의를 요구하는 대학생들의 목소리를 경청하고 그들과 함께 하겠다”고 말했다.

박형수 기자 hspark97@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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