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할아버지 기억에 담긴 그동안 몰랐던 산 역사 이야기
이동해 지음
푸른역사, 268쪽, 1만7900원
“한 개인의 경험과 기억은 어떻게, 거대한 역사의 줄기와 연결되는가.”
책은 저자의 이런 고민이 담겨 있다. 2016년 대학 2학년 때 저자는 역사의 두 갈래 개념을 접했다. 하나는 이름 모를 누군가도 역사의 연구 대상이 될 수 있다는 ‘미시사(微視史)’, 다른 하나는 경험한 것 자체도 사료로 사용할 수 있다는 ‘구술사(口述史)’였다. ‘역사’라고 하면 중요한 인물이나 사건, 공문서 더미를 떠올리던 그에게 충격적이었다. 그리고 누군가 뇌리에 스쳤다. 바로 외할아버지 허홍무였다. 1935년생인 허홍무는 일제강점기와 해방정국, 6·25 등 격변의 시기를 거쳤고, 친지로부터 외할아버지는 집안이 부자였다더라, 광산을 했다더라 등의 얘기를 들어왔던 터였다. 그렇게 그해 외할아버지에게 허락을 받고 4시간 분량의 구술 인터뷰를 마치고 녹취록을 작성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대학생으로서는 그 이후의 작업에 엄두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7년이 흘렀다. 그 사이 저자는 한국 근현대사로 석사학위를 받고 현재는 박사과정에 재학 중이다. 용기를 냈다. 우선 허홍무가 소장한 족보, 집안 인물들의 인적사항이 담긴 호적부, 허홍무의 국민학교 생활기록부, 허홍무의 군 생활이 내력이 담긴 거주표 등 개인과 관련된 자료를 찾아 헤맸다. 또한 조선총독부 관보 등 사료도 뒤졌다. 그리고 다루는 시기는 허홍무의 탄생부터 1959년 결혼까지로 정했다.
책은 허홍무의 구술을 짤막하게 시대순으로 제시하고 그에 대한 분석을 덧붙이는 식으로 정리됐다. 허홍무의 생생한 개인사는 씨줄이 되고 각종 사료를 바탕으로 한 역사학의 성과들은 날줄이 되어 촘촘하게 엮인 새로운 역사책이 만들어졌다. 그 과정에서 강제가 아니라 선택 사항이었던 창씨개명의 본질을 설명하기도 하고, 전쟁 전후 이념 대결 속 학살의 현장을 드러내기도 한다. 쌀을 세는 단위인 ‘가마니’나, 아직도 남아 있는 ‘몸뻬’ 바지가 나온 흥미진진한 사연도 곁들여 있다.
개인의 구술에는 분명 한계가 있다. 자신의 경험이 어떤 역사적 배경을 갖고 있는 것인지 알기 어렵고, 기억도 정확하지 않을 수 있다. 그 빈칸을 채우는 것은 저자의 몫이었다. 허홍무는 어린 시절 일제 관원이 집으로 ‘술 조사’를 나왔다고 기억했다. 허홍무 집에선 단속을 피하기 위해 술항아리를 땅속에 묻기까지 했다고 한다. 어떤 역사적 맥락 속에서 이런 사건이 발생했는지 찾기 위해 저자는 일제의 주조(酒造) 정책을 다른 논문을 파헤쳤다. 일제는 식민지를 운영할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술에도 세금을 매기기로 결정한다. 우선 ‘주세법’을 통해 술 제조를 위해서는 면허를 받게 만들면서 식민지 조선의 주조업 상황을 파악한 뒤 이후 ‘주세령’을 통해 집에서 마실 용도로 만드는 ‘자가용주’에 세금을 매기기 시작한다. 결국 술 제조는 대규모 자본을 갖춘 소수만 가능해졌다. 그 결과 1934년 주세액은 전체 조세액의 29.5%를 차지한다. 그렇더라도 가정에서 술을 빚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허가받지 않은 술, ‘밀주’가 성행했고 일제의 관원들은 밀주 단속에 나선 것이다.
구술사가 지닌 맹점 중 하나는 구술자가 불리한 일은 얼버무리거나 유리한 방향으로 왜곡할 수 있다는 점이다. 검증이 필요한 이유다. 허홍무도 군대 시절을 얘기할 때 처음엔 입대시기를 6·25 전쟁 중인지 정전 이후인지를 얘기하지 않다가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배치돼 반공포로와 공산포로의 잔인한 싸움의 현장을 목격했다고 증언했다. 사실이라면 전쟁 후 입대한 것이 맞다. 하지만 사실이 아니었다. 저자가 허홍무의 ‘병적 증명서’와 ‘거주표’를 발급받아 확인하니 입대일은 54년 7월로 전쟁이 끝난 지 1년이 다 된 때였다. 허홍무의 ‘거짓 증언’에는 사연이 있었다. 전쟁 후 한국 정부는 군사력 증강을 위해 병력 수는 유지해야 하고 한편에서는 전쟁 기간 중 장기 복무한 장병들을 제대시켜야 하는 딜레마에 처했다. 결국 정부는 54년 1월 기존 만 19~28세였던 징소집 연령을 위아래로 한 살씩 늘려 18~29세로 확대했다. 징소집 연령 확대로 허홍무는 하루아침에 입대 대상자가 됐다. 하지만 당시 먹고 살 방편을 마련하기 위해 서울에서 운전을 배우던 그는 그 사실을 몰랐다. 결국 병역기피자가 된 그는 거리에서 붙잡혀 기차 화물칸에 실려 논산훈련소로 향한다. 그에게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과거였다.
허홍무의 개인사를 돋보기로 활용해 그가 살았던 시대를 구석구석 조망한 저자는 가족의 이야기와 뿌리가 궁금한 사람들에게 구술사 쓰기에 도전해 볼 것을 권한다. 자신이 외할아버지의 구술생애사를 정리하면서 가족 간에 공감과 치유의 감격을 느꼈기 때문이다. 이런 소망을 담아 책 뒤에는 일반인들이 구술사를 쓰기 위한 간단한 팁을 소개했다. 조선 후기에 태어난 조상의 기록까지 나와 있는 ‘호적부’ 발급받는 방법부터 ‘한국사데이터베이스’와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등 인터넷으로 편리하게 확인할 수 있는 각종 역사 관련 데이터베이스 활용법까지 담았다.
⊙ 세·줄·평★ ★ ★
·무명(無名)의 역사가 오히려 더 흥미진진하다
·35년생 할아버지와 94년생 손자의 공감을 읽을 수 있다
·구술사에 도전하려는 사람에게 훌륭한 교재가 될 듯하다
맹경환 선임기자 khmae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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