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사업화 ‘아픈 손가락’, 혁신 드론 창업으로 탈바꿈 [연중 기획 혁신창업의 길]
혁신창업의 길 71. 나르마 권기정 대표
스마트 무인기 ‘TR-100’. 한국항공우주연구원(KARI, 이하 항우연)의 ‘아픈 손가락’이다. 2002년 과학기술부의 항공 분야 ‘21세기 프론티어 기술개발 사업’으로 선정돼 10년간 1000억원의 국비 지원을 받았다. 길이 5m, 폭 7m, 무게 1t의 스마트 무인기 ‘TR-100’은 2011년 2월 전남 고흥 항우연 비행장에서 초도비행에 성공했다. 당시 항우연은 ‘헬기와 프로펠러 비행기의 장점을 결합, 수직 이착륙과 고속 비행이 가능한 틸트로터형 신개념 무인항공기'라며, 한국이 V-22 오스프리를 개발한 미국 벨사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틸트로터 항공기 기술 보유국이 됐다고 자평했다. TR-100은 한국공학한림원이 2011년 ’한국을 빛낸 과학기술 및 산업성과 25‘에 선정하기도 했다. 항우연은 상용화 촉진을 위해 2010년부터 추가로 400억원을 투자, 길이 3m, 무게 250㎏급으로 체급을 줄인 TR-60을 개발, 대한항공에 기술을 이전했다. 하지만 스마트무인기 시제기는 이후 전남 고흥의 창고에서 먼지만 쌓여갔다. 수요처를 찾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2012년 TR-60이 국방부 사업 선정에서 탈락하고, 이후 예비타당성 조사에서도 사업성을 인정받지 못했다.
실패 아픔 딛고 태어난 창업
항우연 1호 연구소기업 나르마는 이런 아픔을 딛고 태어났다. 포항공대와 KAIST에서 공기역학을 전공하고 TR-100 개발 초기에도 참여했던 권기정(55) 책임연구원이 그 주인공이다. 그는 TR-100의 틸트로터 기술을 이용해 운송용 드론을 개발하는 스타트업 ’나르마‘를 2018년 10월 창업했다. 권 대표는 “2015~2016년 안식년 시절 미국 매릴랜드대에서 머물렀는데 학교 자체가 온통 혁신과 창업·스타트업과 같은 단어로 도배돼 있었다” 며 “그렇게 1년을 지내다 보니 과학기술에서 혁신이란 연구만이 아니라 상용화까지 이어져야 한다는 생각을 분명히 하게 됐다”고 말했다. 권 대표는 ”항우연의 스마트 무인기 개발은 뛰어난 성과임에도 불구하고 상용화를 하지 못해 연구원 전체의 고민이었다“며 ”마침 한국은 물론 전 세계적으로 드론 붐이 불기 시작한 시점이어서 항우연이 개발해놓은 스마트 무인기 기술로 틸트로터 드론을 만들어 보자는 생각이 들어 직접 창업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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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용화 실패 스마트무인기 사업
연구원이 배송용 드론으로 창업
실증 성공하니 투자금 몰려들어
“배송 드론 넘어 에어택시까지”
」
지난 16일 중앙일보 취재진이 대전 대덕의 옛 대덕경찰서 건물에 자리 잡은 나르마의 연구개발실 겸 공장을 찾았다. 2층 제품개발부에는 길이 1m에 무게 7㎏(AF-100), 길이 2m에 무게 20㎏(AF-200)의 틸트로터 드론 2종 30대가 가득 차 있었다. 스마트무인기 TR-100의 항공기 엔진(PWC-206) 대신 배터리와 전기모터를 달고, 크기도 줄었다는 점이 다르긴 하지만, ’세계에서 두 번째 틸트로터 항공기 개발‘이라는 항우연의 성과는 그대로 이어받았다. 날개 끝에 두 개의 프로펠러를 단 틸트로터는 이륙할 때는 헬리콥터처럼 프로펠러를 위로 올리지만, 날아갈 때는 수직으로 방향을 바꿀 수 있다. 덕분에 드론이지만, 최대 시속 100㎞로 순항할 수 있다. 비행 속도는 물론, 항속 시간도 일반 드론의 배 이상인 45분까지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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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드론보다 빠르고 오래가고
성능은 지난 수년간의 실증을 통해 인정받았다. 2021년 10월 경남 통영 해변에서 12㎞ 이상 떨어진 사량도까지 총 110번의 배송 실증 비행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지난해 8~10월에는 국토교통부 드론실증도시사업의 일환으로 제주도 상모리에서 가파도 선착장까지 4.5㎞ 거리의 택배 배송을 했다. 올 2월에는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3월에는 케냐에서 의료용품 배송을 위한 시범비행을 했다. 지금껏 국내 네 곳에 총 300회의 택배 배송을, 해외는 6개국에서 총 160회 데모 비행을 했다. 권 대표는 ”세계 최초 틸트로터 방식의 드론인 만큼 미국은 물론 유럽과 아프리카 등지에서 데모 비행 요청이 몰려들고 있다“고 말했다.
실증 성과가 좋으니, 불황 속에서도 투자유치는 어렵지 않았다. 2022년 11월 15억원 규모의 프리A 투자를, 2023년 9월에는 50억원 규모의 시리즈A 투자유치를 끝냈다. 권 대표는 “투자하겠다는 돈이 150억원 수준까지 몰렸지만, 자금 계획에 따라 3분의 1수준으로 끝냈다”며 “투자 시장이 얼어붙었다고 하지만 혁신적인 기술력을 가진 스타트업에는 오히려 지금이 더 기회”라고 말했다.
'드론 본산‘ 미국 시장에 도전
기술력을 인정받고, 투자도 받았으니 꽃길이 펼쳐질까. 그렇진 않았다. 국내 드론 시장에선 한계가 뚜렷했다. 국내 드론 수요는 레저나 촬영용이 대부분인데, 이미 중국 DJI가 석권하고 있기 때문이다. 빨리, 멀리 가는 드론은 물건 배송에 유리하지만, 번잡한 도심이 대부분인 국내에서 특수 목적이 아니고선 드론이 굳이 필요 없다는 게 문제였다. 그래서 선택한 게 미국을 중심으로 한 해외시장 개척이다. 시장조사기관 포춘 비즈니스 인사이트에 따르면 지난해 전 세계 드론 패키지 배송 시장 규모는 3억 1440만 달러(약 4188억원)에 달했다. 올해는 4억 7220만 달러로, 2032년까지 57억 6450만 달러까지 성장할 것으로 예측된다. 이 때문에 나르마는 지난 7월 미국 연방항공청(FAA)의 테스트 사이트가 있는 텍사스 코퍼스 크리스티에 미국법인을 설립했다. 남아프리카공화국 등 미국 외 해외 네 곳엔 현지 파트너를 통해 영업망을 구축하는 전략을 세웠다. 권 대표는 “나르마는 한국에서 만든 비행체 중 최초로 미국 FAA로부터 인증을 받는 기업이 될 것”이라며 “독보적인 틸트로터 기술을 바탕으로 북미 시장에서 글로벌 기업들과 경쟁할 것”이라고 말했다.
나르마는 수소연료전지 기반 드론도 개발하고 있다. 이미 지난 5월 첫 비행에 성공했고, 내년까지 20㎏의 화물을 싣고 200㎞ 거리를 이동할 수 있는 드론을 개발할 계획이다. 장기적으로는 무인 배송 드론을 넘어, 사람을 실어나르는 ’에어 택시‘까지 진화한다는 비전도 있다. 권 대표는 “길이 5m, 무게 1t의 항우연 스마트 무인기 TR-100의 유전자를 가지고 있는 만큼 기술력은 이미 어느 정도 확보돼 있다”며 “5인승 이상의 에어택시 기체를 개발해 2030년경 도심항공모빌리티(UAM) 사업에도 도전할 것”이라고 말했다. 국가 R&D 예산 1400억원을 쏟아붓고도, 상용화에 실패했던 항공우주연구원의 스마트무인기가 연구원 창업으로 부활하고 있는 셈이다.
■ 배희진 항공우주연구원 기술사업화실장
「
" 나르마는 한국항공우주연구원의 1호 연구소기업이다. 연구자들이 창업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던 시절, 상용화에 어려움을 겪고 있던 스마트무인기 기술로 과감하게 창업을 했다. 연구소기업에 대한 연구원 내 제도가 제대로 정비되지 않은 시점이었는데, 나르마 설립을 계기로 항우연의 기술도 사업화가 가능하다는 인식이 내부에서도 확산됐다. "
」
■ 이강훈 하나벤처스 수석심사역
「
" 멀티콥터 드론은 중국 업체들이 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레드오션이다. 하지만, 헬리콥터와 비행기의 장점을 모두 갖춘 틸트로터 드론의 경우 나르마가 세계 최초이자 유일한 전동식 듀얼 틸트로터 드론 개발 및 상용화 업체다. 나르마는 고속·장거리 비행에 제약이 큰 기존 드론의 한계를 극복하고, 배송, 원거리 감시, 방산 등 다양한 분야에 응용할 수 있다. "
」
◆‘혁신창업의 길’에서 소개하는 스타트업은 ‘혁신창업 대한민국(SNK) 포럼’의 추천위원회를 통해 선정합니다. SNK포럼은 중앙일보ㆍ서울대ㆍKAIST를 중심으로, 혁신 딥테크(deep-tech) 창업 생태계 구성원들이 함께 참여하는 단체입니다. 대한민국이 ‘R&D 패러독스’를 극복하고, 퍼스트 무버 국가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연구개발(R&D)에 기반한 기술사업화(창업 또는 기술 이전)가 활성화되어야 한다는 취지입니다.
대전=최준호 과학전문기자, 논설위원 joonh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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