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 인헌고 농구부의 버저비터
최강팀 상대 결승전 대역전승
승리 비결은 수많은 패배 경험
지고도 일어나 최선 다해 연습
선수육성·생활체육확장 떠나
더 많은 운동부가 필요한 이유
시합 끝을 알리는 버저가 울린다. 그 순간 골대 안으로 들어가는 공. 버저비터(buzzer beater). 농구의 백미. 최강팀과 맞붙은 약팀이 버저비터로 역전하는, 드라마 같은 장면이 지난 14일 강원도 양구 문화체육관에서 열린 한국중고농구연맹 주최 주말리그 왕중왕 결승전에서 벌어졌다.
주인공은 서울 인헌고 농구부. 2010년 학교 동아리로 시작한 팀이다. 상대는 96년의 역사를 가진 농구 명문이자 현재 초고교급으로 평가받는 경복고. 인헌고는 1쿼터를 제외하고 시합 내내 뒤지다 막판 3점슛과 버저비터로 67대 65, 대역전승을 거뒀다. 일본 고교야구 고시엔 대회에서 한국계 교토국제고가 우승한 것보다 더 극적인 스토리였다.
만화 같은 우승의 주인공을 만나기 위해 지난 21일 서울 관악구 인헌동의 인헌고를 찾아갔다. 늦여름 관악산 자락 짙은 숲에서 매미가 축하 팡파르를 연주하는 듯 요란하게 울었다. 기자를 맞은 김현 교장의 첫마디. “3년 전 처음 학교에 왔을 때 여러 사람이 저에게 찾아와 농구부를 없애야 한다고 했어요.”
인헌고는 평범한 공립고등학교다. 운동부를 넉넉하게 후원해줄 선배도, 좋은 선수를 끌어올 만한 명성도 부족했다. 운동부 육성보다는 입시에 힘을 쏟자는 의견이 여러모로 합리적이었다. 그러나 김 교장은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코트에서 뛰는 아이들 얼굴을 보세요. 자기가 좋아하는 운동을 하니까,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웃잖아요. 지금도 고등학교 교실에는 자기가 좋아하는 걸 찾지 못해서 책상에 엎드린 채 시간을 허비하는 아이들도 있는데, 가슴 뛰는 일을 찾아 최선을 다하는 아이들을 응원하는 게 학교가 할 일 아닐까요.”
농구를 좋아하는 보통의 학생들이 모여 만든 농구부였지만 클럽팀이 뛰는 대회보다는 엘리트 선수들이 참가하는 큰 대회에 도전했다. 인헌고 농구부를 맡고 있는 신종석 코치는 이렇게 말했다.
“사실 제가 다른 학교에서 코치를 할 때 인헌고는 가장 만만한 상대였어요. 1승 제물이라고 그랬죠. 제가 부임해 오니 선수들 사이에 패배 의식이 강하더라고요.”
신 코치는 두 가지를 강조했다. 연습경기에서도 최선을 다할 것, 자신 있게 플레이할 것.
“명지대와 첫 연습경기를 하는데 학부모님들이 많이 오셨어요. 연습경기인데 부모님이 이렇게 열심히 오시느냐고 물었더니, 외부 팀과 연습경기가 1년 만에 처음이라고 하더라고요. 이게 약체팀의 현실인가 싶어서 속으로 놀랐죠. 제가 아는 모든 농구 인연을 동원해서 연습경기를 했어요. 선수들에게 강조했죠. 연습경기라도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래야 저 팀들이 우리를 또 불러주고, 시합을 계속할 수 있다. 져도 괜찮다. 다만 최선을 다해라. 너희 플레이에 자신감을 가져라.”
지난해 처음 전국 16강에 올랐다. 올해 목표 8강 진출은 3월 협회장기 대회에서 달성했다. 이번 대회는 결승 진출이 목표였다. 고교 최강팀 경복고와 결승전을 앞두고 주장 김민국은 선수들과 이렇게 다짐했다. “애초에 준우승이 목표였지만 당연히 질 것처럼 뛰어서 준우승하는 건 의미가 없다. 털리려면 왜 여기까지 왔나.”
결승전에서는 한때 14점 차까지 뒤졌다. 응원하던 학부모들조차 여기서 만족하자고 하던 순간, 인헌고 선수들은 3점슛을 연이어 성공시키더니 버저비터로 이겼다. 승리의 비결? 김 교장은 수많은 패배의 경험을 꼽았다.
“우리 선수들이 수많은 연습경기를 통해 언제든 이길 수도 있고 질 수도 있다는 경험을 했잖아요. 승패를 연습한다는 건 대단한 단련이에요. 우리 학교 농구부 선수들은 앞으로 농구를 하든 안 하든 행복할 가능성이 크다고 봅니다. 불황기일수록 어디서든 운동선수 출신들이 더 돋보이잖아요. 운동을 하면서 수없이 지고도 다시 일어나 최선을 다하는 연습을 했기 때문이죠. 보세요, 우리 아이들 표정을. 이렇게 열심히 행복하게 사는 젊은이들입니다.”
한국의 학원 스포츠가 일본보다 열악하다고 한다. 야구 축구 농구 배구팀이 얼마나 많고 적은지 비교한다. 그보다 우리의 아이들이 패배를 경험할 기회를 얻지 못한 것이 더 큰 문제가 아닐까. 엘리트 선수 육성이냐 생활체육 확장이냐 하는 이분법 이전에 우리의 학교에 더 많은 운동부가 필요한 이유는 여기에 있지 않을까.
김지방 디지털뉴스센터장 fatty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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