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지원의 마음상담소] 그게 바로 당신이니까
문득 돌아보면 나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곳에 내가 서 있다고 느껴지는 순간이 있습니다. 그렇게 절망이 찾아옵니다. 그 사람은 지금 이런 일을 한다던데, 이런 삶을 살고, 이런 사람들과 지낸다던데 하는 소식들에 거대한 슬픔이 몰려오고, 내가 했던 선택이 대체 어디에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그 기원을 거슬러 올라갑니다.
이미 지난 이야기들을 무대 위에 올려놓고 시작되는 머릿속 퀴즈쇼 ‘왜?’는 나를 고통에 빠뜨리기 위해 고안된 것만 같습니다. 왜 그때 미루기만 하고 시도해 보지 않았어? 왜 더 참지 않았어? 왜 그 직업을 택했어? 왜 그런 선택을 했어? 다른 선택을 했다면 지금과는 다른 삶을 살고 있을 텐데.
■
「 현실이 기대 못 미친다 느낄 때
과거 선택에 회한 갖지 말아야
자신만의 가치 소중히 했을 뿐
후회 의식해 결정 미루지 말기를
」
실제로 많은 내담자는, 지금 돌아보면 한참은 잘못되어 보이는 선택을 합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일의 우선순위를 바꾸었어야 했고, 당신이나 주위 사람들을 더 못살게 굴었어야 했습니다. 조금 더 약았어야 했고, 남들보다 한발 빠르게 움직였어야 했습니다. 전혀 다른 선택을, 더 이기적이고 영리한 선택을 했어야만 했습니다. 지금에 와서 돌아보면 말입니다.
그러나 그 순간, 당신은 누구보다 옳았을 것입니다. 충분한 정보를 미리 알 수 없었고 나를 도와줄 사람이 없었던 상황. 아마 그 순간 가능했던, 가장 최선의 선택이었을 것입니다. 이 선택으로 인해 원치 않는 결과가 일어날 수 있다는 것도 이미 헤아려 보았을 것입니다. 생각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 일은 그때 가서 생각해보기로, 그 선택에 따르는 결과는 그때 가서 감당해보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당신이 서 있는 곳은 과거의 틀린 선택으로 인한 형벌이 아닙니다. 당신이 선택한 삶의 방향은, 이쪽이 맞습니다.
지금 당신이 서 있는 곳을 다시 보세요. 뒤처졌다거나 실패했다거나 하는 세속적인 말로 눈을 가리지 마세요. 그때 그 선택의 기로들에서 자기 신념을 모르는 척하고 탐욕스럽게 살아왔다면, 지금 당신이 서 있는 곳은 달라졌을 것입니다. 더 나은 상황, 더 높은 지위에서 순진하고 미련한 사람들을 내려다볼 수도 있었겠죠. 그러나 당신은 왜 그러지 않았나요. 대체 왜 이기적으로 탐욕스럽게 살지 않았나요. 지금은 왜 그러지 않나요. 당신이 비겁하고 부도덕하기로 결심한다면, 당신의 자리는 뒤바뀝니다. 왜 사람들에게 아부하고 입의 혀처럼 굴지 않나요. 입바른 소리는 넣어두고 쓸개는 내어놓고 살지를 않나요. 당신이 ‘그러지 않겠다’고 선언했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지키고자 했던 생의 가치가 있습니다. 당신의 삶 안으로 들인 사람들, 당신이 사용하는 다정한 말들과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지켜온 원칙들이 있습니다. 당신이 무례하고 불의하고 착취적인 사람들에게 걷잡을 수 없이 화가 나고 환멸감이 치미는 것도 이런 이유입니다. 유독 예민하거나 우울해서 이 세상에 화를 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은 더 중요하고 귀하게 여겨져야 하는 가치와 원칙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입니다. 나라면 절대 하지 않을 행동들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사람들을 보면, 걷잡을 수 없이 화가 나는 것이 당연합니다. 다른 이들 누구 하나 눈치채지 못할 결심이었대도 자신에게는 천둥처럼 들릴 소리였겠죠. 그렇게 당신은 세상과 타협하지 않기로 선택했고, 가치에 반하는 일을 하지 않기로 선택했습니다. 다른 사람을 해치거나 차별하지 않기로 선택했고, 다른 사람의 삶을 빼앗지 않기로 선택했습니다. 그게 바로 당신이니까.
의지가 없었던 것도 아니고, 남들보다 부족했던 것도, 세상 물정을 몰랐던 것만도 아니었을 것입니다. 실패를 거듭해 어떤 형벌로 이곳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일단 당신의 삶은 애초에 실패한 적이 없고, 그리고 두 번째로 그런 형벌이라든가 하는 미신적인 기복신앙 따위도 이제 그만 두세요. 그런 게 아닙니다. 당신은 그저 원칙을 지키려 했던 사람, 늘 자신에게 옳은 결정을 하려 했고 책임지려 했던 사람, 당신 마음이 말하는 바를 잘 들어주었던 사람. 그게 다였습니다.
수없이 많은 평행 우주 어딘가에는 인간으로서 하지 말았어야 할 선택들의 연속으로, 남들이 참도 부러워하는 삶을 사는 나 자신이 있을지도 모르죠. 그러나 이번 생은 아닙니다. 이곳의 당신은 다시 돌아가도 같은 선택을, 같은 행동을 할 것입니다. 스스로를 보호하고 당신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했던 최선의 선택입니다. 그렇게 아무도, 그 누구도 당신의 존엄성과 인간성을 해치지 못하는, 당신의 세계가 옵니다. 자신의 선택을 계속해서 의심하느라 과거에 묶여 있지 마세요. 또다시 후회할까 싶어 미래의 결정들을 미루고 있지 말아요. 당신은 늘 고통스러울 정도로 고민했고 단 한 번도 무신경하게 결심한 적이 없었으며 늘 책임지려 했습니다. 그렇게 당신 모든 순간의 선택은 옳았습니다. 더할 나위 없이.
허지원 고려대 심리학부 교수
Copyright © 중앙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아내 패고 버린 우산 아깝다’ 시인 스스로 고백한 죄와 벌 [백년의 사랑] | 중앙일보
- 덜 익은 삼겹살 이래서 위험…몸 속 '쌀알' 가득, 충격의 CT | 중앙일보
- 양궁 김우진, 도쿄서 8점 쏘자…정의선에 걸려온 전화 1통 | 중앙일보
- 강남 유명 척추병원 회장 고소당했다…"친족 여성 상습 성폭행" | 중앙일보
- 완전 나체로 생방송 나온 가수…올림픽 땐 '파란 망사' 입고 공연 | 중앙일보
- 서세원 딸 서동주, 내년 비연예인과 재혼…"좋은 소식 축복해달라" | 중앙일보
- '한마리 50만원' 민어 반값됐다…손님 북적여도 어민들 한숨, 왜 | 중앙일보
- "30초면 마법 펼쳐진다, 돈 내면 고화질"…딥페이크봇 수천개 활개 | 중앙일보
- "트로트 안 좋아해, 나훈아와 비교불가"…데뷔 60년차 남진 고백 | 중앙일보
- 불륜 이혼후 여배우 3명과 동거…그 배우, 놀라운 소식을 발표했다 | 중앙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