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재 “기후위기 대응 구체화는 입법자 책무” 명시했다
국가 노력 미흡 경우 ‘침해’로 이어져
온실가스 감축, 수준 높은 합의 필요”
헌법재판소가 29일 탄소중립기본법에 내린 헌법불합치 결정은 ‘입법자에 더 구체적인 기후위기 대응 입법 의무와 책임이 있다’는 점을 아시아권 최초로 명시했다는 데 의의가 있다. 헌재는 기후위기라는 ‘위험 상황’에 국가 대응이 부족하면 건강하고 쾌적한 환경에서 생활할 국민의 헌법적 권리가 침해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 헌재는 특히 “중장기적 온실가스 감축목표와 경로 계획에 매우 높은 수준의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국내 기후위기 소송은 2020년 3월 청소년 환경단체 ‘청소년기후행동’이 헌법소원을 내면서 처음 시작됐다. 2022년 6월 당시 태명이 ‘딱따구리’인 20주차 태아 등 아기 39명과 어린이 22명도 헌법소원을 청구했다. 헌재는 지난 4월 관련 소송 4건을 병합했고 두 차례 공개변론을 열었다. 김형두 헌법재판관은 지난해 11월 경기도 고양 사법연수원에서 열린 국제콘퍼런스에서 “청구 당시 태아였던 딱따구리가 지금은 세상에 태어났다”며 “그만큼 시간이 빠르게 흘러 지구온난화 문제도 시급히 해결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헌재가 전향적 결정을 내릴 수 있다는 관측도 나왔다.
헌재는 정부가 2031~2049년 국가 온실가스 감축목표(NDC)를 설정하지 않은 것에 대해 “과소보호금지원칙 위배”라고 지적했다. 국민기본권 보호에 필요한 최소한의 수준에 미치지 못했다는 것이다. 헌재는 “미래세대는 기후위기 영향에 더 크게 노출될 것임에도 현재의 민주적 정치 과정에 참여하는 것은 제약돼 있다”며 “입법자에게는 중장기적 온실가스 감축 계획에 대한 구체적인 입법 의무와 책임이 있다”고 강조했다. 헌재는 온실가스 감축 실행은 국민 기본권을 광범위하게 제한하게 돼 법률로 정해야 하는데, 2031년 이후는 규정되지 않아 법률유보 원칙을 어겼다고도 지적했다. 법률유보 원칙은 행정 작용은 법률에 근거해야 한다는 원칙이다.
다만 헌재는 2030년까지 온실가스 배출량을 2018년 대비 40% 감축토록 한 것은 정부 재량권이 인정된다고 봤다. 구체적 감축 수단, 경제·외교 상황 등을 고려해 정부가 수치를 설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청구인들은 정부가 지난해 발간한 ‘국가탄소중립·녹색성장기본계획’도 문제 삼았다. 정부가 세운 목표는 2023년 880만t, 2024년 750만t에서 2028년 3110만t, 2029년 9290만t 등 후반부로 갈수록 감축 부담이 늘어난다. 청구인들은 이 같은 계획도 미래세대 부담을 가중시킨다고 주장했지만 헌재는 “감축경로의 형태만으로 미래에 과중한 부담을 이전한 것으로 단정할 수 없다”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헌재는 “감축의 구체적 형태는 정부 권한과 책임으로 결정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초반부터 감축량을 높게 잡으면 에너지 공급 체계와 산업 구조를 전면적으로 바꿔야 해 에너지 비용 급상승 등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헌재가 NDC 40% 숫자 자체는 문제삼지 않아 정부로서는 대폭 수정 등 부담은 덜게 됐다는 평가도 나온다. 파리협정에 따라 내년까지 2035년까지의 NDC를 제출해야 해 관련 논의가 함께 진행될 것으로 관측된다. 선고 후 청구인 측은 40% 감축의 부당성이 받아들여지지 않은 점에 아쉬움을 표하면서도 “끝이 아닌 기후대응의 시작”이라고 평가했다. 청구인 측 관계자는 “소극적 판단이 이뤄진 부분은 아쉽지만 국가의 적극적 입법 책임을 인정하는 결정이 나왔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고 말했다.
파리 협정=2015년 채택된 기후변화 대응 국제 협약. 2020년 만료된 교토의정서와 달리 선진국뿐 아니라 195개 당사국에 온실가스 감축 의무를 부과하고 5년마다 상향된 감축 목표를 제출토록 했다. 산업화 이전 대비 지구 평균 기온 상승을 2도보다 낮게 유지하고, 이를 1.5도 이하로 제한하기 위해 노력해야 함을 최초로 명시했다.
국가 온실가스 감축 목표(NDC)=파리 협정에 따라 각국이 자발적으로 세운 온실가스 감축 목표. 유엔기후변화협약은 당사국이 NDC 계획을 세우고 이행 현황을 보고할 의무를 부과했다. 한국 정부는 2021년 11월 유엔 당사국총회에서 2030년 온실가스 배출량을 2018년 대비 40% 줄이겠다는 NDC를 발표했다.
이형민 기자 gilel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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