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형철의 리믹싱 셰익스피어] 그대 편들기 위해 나까지 더럽혔네, 딱한 이 사랑

2024. 8. 30. 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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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셰익스피어의 소네트는 10음절짜리 행 14개(4-4-4-2 구조)가 규칙적 라임(각운)과 함께 움직이는 정형시다. 총 154편 중 빼어난 것을 고르고, 동시대적 사운드를 입혀 새로 번역하면서, 지금-여기의 맥락 속에서 읽는다

당신이 저지른 일을 더는 애통해하지 말기를

장미도 가시가 있고, 은빛 샘도 진흙이 있지
구름이, 또 월식과 일식이 달과 해를 가리고
가장 예쁜 봉오리에도 징그러운 해충 사니까
잘못은 누구나 하는 것, 나조차 그러고 있네
자연의 일들과 비교해 그대를 정당화하면서
나를 타락시키고 있잖아, 그대 가책 덜어주고
그 잘못에 필요한 것보다 더한 변명을 해주고
그대 욕망의 과실에 나는 이유를 부여해 주네
그대를 기소해야 할 내가 그대의 변호인 되고
나 자신을 상대로 그댈 위한 변론을 시작하지
내 애정과 증오 사이에 내전이 벌어졌다는 뜻
그래서 나는 그대의 공범이 될 수밖에 없는 것
쓰리도록 나를 터는, 저 다정한 도둑의 공범.
소네트 35 (신형철 옮김)

김지윤 기자

“당신 달콤한 사랑 생각하면 나는 부자가 돼, 내 처지를 왕과 바꿀 생각마저 멸시하게 돼.” 지난번에 읽은 29번 소네트의 끝에서 시인은 얼마나 벅찼던가. 당신의 사랑은 내 정신의 재산을 증식시켜 왕처럼 느껴지게 했다. 그런데 35번에 와서는 상황이 역전돼서 당신이라는 도둑이 나를 털고 있고, 심지어 나를 향한 그 도둑질에 나 자신이 공범이 되게 만든다. 29번과 35번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가. 나의 그대가 부정을 저질렀다. 33번부터 다루어지는 그 사건은, 좁게는 36번까지, 넓게는 42번까지 걸쳐져 있다. 이 그룹에 속하는 시들을 “불화 소네트(estrangement sonnets)”라고 부르는 학자도 있다.

예쁜 꽃에도 해충은 살아
화자가 “당신이 저지른 일”에 대해 할 만한 것은 분노와 질타일 것이다. 그러나 반대의 길을 간다는 게 셰익스피어다운 변칙이다. 그 일로 더는 슬퍼하지 말라고 상대방을 위로하고 있으니 말이다. 자연계가 원래 그렇다는 것, 모든 깨끗하고 아름다운 것에는 오점이 있다는 것. 그런데 이 위로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여야 할까? 이 대목의 자연 비유들은 한눈에 봐도 진부하고 무성의하지 않은가. 이 위로에 반어적인 뉘앙스가 있다는 것도 눈치채야 한다는 뜻이다. 당신을 받아들이며 위로하고 있는 건 사실이지만, “해충”으로 썩어 문드러지고 있는 건 바로 나라는 행간의 메시지도 절반은 담겨 있다는 것이다.

여기 4행까지는 예열이고, 남은 여덟 행은 직진이다. “잘못은 누구나 하는 것, 나조차 그러고 있네.” 상대방의 잘못을 용납하기 위해 자연 전체를 용납할 수밖에 없었던 화자는 이제 그 자신까지 죄인으로 만들어서 나와 당신의 경계마저 지우려고 한다. 나는 그대를 정당화하고(6행), 가책을 덜어주고(7행), 필요 이상으로 대신 변명하고(8행), 그럴듯한 이유를 부여해서 합리화한다(9행). 화자는 네 손에 묻은 피를 제 온몸에 옮겨 바르고 있다. 죄인을 위해, 죄인의 피를, 죄인이 되기 위해. 그리고 거기 중요한 말 하나를 끼워 넣었다. 이것이 진정으로 죄인 이유는 자기 자신을 타락시키는(corrupting) 일이기 때문이라는 것.

10~11행에서 법률 용어를 표나게 사용한 것도 셰익스피어다운 선택이다. “그대를 기소해야 할 내가 그대의 변호인 되고”로 옮긴 10행의 원문은 “Thy adverse party is thy advocate”이다. 여기서 “adverse party”는 소송 중 ‘상대측’을 가리킨다. 이어지는 11행은 원문 자체가 모호하다. “a lawful plea commence”에서 ‘plea’가 소를 제기하는 쪽이나 맞서야 하는 쪽 모두에 쓰일 수 있는 용어여서 영어권 연구자들의 주석도 갈린다. 한국어판도 ‘소를 제기한다’와 ‘변론을 시작한다’로 나눠져 있다. 나는 후자를 택했다. 바로 앞 10행에서 화자가 이미 ‘변호인’이 되었으니 11행에선 ‘변론’이 행해져야 옳다고 봤다.

물론 ‘셰익스피어와 법’이라는 과목이 개설될 수 있을 정도로 이 주제가 중요한 것은 그가 단지 법률 용어를 작품에 사용했기 때문이 아니라 작품 곳곳에서 법에 대한 깊은 통찰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관련 연구들이 대체로 희곡을 향할 뿐 소네트를 대상으로 하진 않는데 드물게도 제프리 셔먼(Jeffrey G. Sherman) 같은 법학자는 이 시에 주목했다. 이를테면 상대방의 “욕망의 과실”만이 아니라 그것에 “이유를 부여해” 합리화하는 자신의 행위 역시 죄로 보는 화자의 판단은, 정념보다는 지성에 의해 추진되는 죄를 그 고의성이 더 크다고 보아 무겁게 다루는 법의 기준과 통하는 데가 있다는 지적은 흥미롭다.

나를 터는 도둑질에 동참
시는 끝에 이르렀다. 시 전반에 걸쳐 화자가 고백한 것은 사랑하는 사람의 잘못을 변호하고 싶은 마음이지만, 그 반대의 마음을 굳이 적지 않은 것은 그런 게 없어서가 아니라 너무 당연하게 있기 때문이다. ‘애정과 증오의 내전’보다 더 정확한 표현이 없을 정도로 말이다. 그러나 시의 마지막 두 줄은 다시 한번 한쪽 마음을 쓸쓸하게 편든다. 이제는 “변호인”(advocate)이 아니라 “공범”(accessary)이 되기까지 했다. 정신이 입는 타격을 “탈탈 털린다”라고 표현하는 한국어 그대로, 화자는 상대방에게 다 털렸다. 그런데도 그는, 진짜 죄는 자신을 망가뜨리는 것임을 알면서도(7행), 자신을 대상으로 한 도둑질에 동참한다. 지독한 을의 사랑이다.

「 No more be grieved at that which thou hast done:
Roses have thorns, and silver fountains mud:

Clouds and eclipses stain both moon and sun,

And loathsome canker lives in sweetest bud.

All men make faults, and even I in this,

Authorizing thy trespass with compare,

Myself corrupting, salving thy amiss,

Excusing thy sins more than thy sins are;

For to thy sensual fault I bring in sense,

Thy adverse party is thy advocate,

And ‘gainst myself a lawful plea commence:

Such civil war is in my love and hate,

That I an accessary needs must be,

To that sweet thief which sourly robs from me.

신형철 문학평론가

신형철=2005년 계간 문학동네에 글을 쓰며 비평활동을 시작했다. 『인생의 역사』 『몰락의 에티카』 등을 썼다. 2022년 가을부터 서울대 영어영문학과(비교문학 협동과정)에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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