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 남기고 간 '79세' 소총이 전한 현대사
[강지영 기자]
연극 <빵야>의 무대는 갖가지 물건을 '독립적'으로 늘어놓았다. 그곳은 영화나 드라마 촬영을 위한 소품을 모아놓은 창고다. 각각의 소품은 아무 관련성이 없어 보인다. 피아노 책상 선반 주전자 양은그릇 그리고 벽에 걸려있는 액자는 서로 무관한 듯 보인다.
액자에는 대도무문(大道無門)이 쓰여있다. 대도무문, 큰 길에는 문이 없다는 뜻이다. 정해진 문이 없으므로 자기가 길을 내면 된다. 내가 간 길이 문이 된다. 바른 길로 나아가려면 꾸준히 노력해야 한다. 요행을 바라거나 지름길을 찾을 것이 아니라 스스로 정진하고 수련할 것을 강조한다. 이 한자성어를 생각하며 객석에 앉아 공연을 기다렸다.
▲ 연극 <빵야> 공연사진 |
ⓒ 엠비제트컴퍼니 |
'이야기 하나를 힘들게 쓰면 힘든 사람 하나가 잠시 쉬게 될지도 모르는 글, 이야기 하나를 아프게 쓰면 아픈 사람 하나가 조금은 나아질지도 모르는 글'
나나는 그런 글을 쓰고자 한다. 과연 나나의 꿈은 이루어질까.
무엇을 쓸지 고민하던 차에 나나에게 다가온 건 소품 창고에 놓여있던 '장총'이다.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에 일본군이 주력으로 쓰던 총이다. 나나는 그 총에 대하여 드라마를 쓰려고 한다. 장총에게 이름도 붙여주었다. '빵야'라는 애칭이다. 우리가 세상 물정 모르던 어린 시절에 장난감 총으로 전쟁놀이를 하면서 뱉어냈던 말이 '빵야, 빵야'다. 또는 엄지와 검지로 총 쏘는 흉내를 내면서 소리 낸 것이 '빵야'이지 않은가.
장총에 담긴 묵직한 역사성에 비하여 이름이 경쾌한 느낌을 준다. '빵야'가 나나와 함께 연극을 주도해 나간다. 빵야가 겪어온 통한의 역사가 펼쳐지고 나나와 함께 대사와 해설을 이어간다. 그러면서도 여러 배우가 시시각각 출연해 장총과 관련된 역사적 사실을 재연한다. 일제강점기와 전쟁을 겪어야 했던 군인과 일반 민중으로 출연한다. 관객은 때로는 화가 나고 때로는 눈물짓고 때로는 설렘으로 가슴 뛴다.
▲ 연극 <빵야> 공연사진 |
ⓒ 엠비제트컴퍼니 |
일본이 남기고 간 총으로 우리는 동족끼리 총부리를 겨누게 된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낡고 낡아 영화 촬영을 위한 소품으로 전락하여 창고에 머물러 있다. 소품 목록에 등재되지도 못하고 존재감 없이 상자 속에 갇히는 신세가 됐다. 총이라는 그의 본질을 잃고 비참한 '노년'을 살고 있다.
빵야는 원래 나무였다. 백두산 압록강 졸참나무였다. 악기가 되고 싶었다. 예술이 되고 싶었다. 슬프게도 그 꿈은 무참히 짓밟혔다. 졸참나무는 총의 몸체가 되었을 것이다. 어느 집의 가마솥이나 대문의 쇠붙이는 빵야의 총열이나 총알이 되었을 터이다. 바로 일제강점의 야욕에서 기인한 것이다. 자신의 꿈과는 너무나 먼 살상 무기가 되었으니 사람으로 치면 비운의 인물이다. 자신의 꿈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삶을 살게 되었으나 그래도 망가지지 않고 꿈을 간직하고 있다. 연극의 끝부분에서 죽었던 사람들이 살아나서 갖가지 악기를 들고나와 오케스트라를 만든다. 빵야도 합류한다.
빵야가 악기가 된다. 빵야의 '쾅' 총소리가 음악이 된다. 오케스트라의 악기가 되어 무대를 가득 채우던 총소리. 묻어두었던 빵야의 꿈이 이루어지고, 나나의 꿈도 실현된다. 좌고우면하지 않고 자기가 쓰고 싶은 글을 써서 대중에 내놓았다. 드라마 제작자의 요청이나 대중의 입맛에 맞는 글을 쓰면 쉬웠을 텐데, 그런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다. 연극 속 나나는 글이 써지지 않을 때면 해장국집에서 기도하는 마음으로 술잔을 기울인다. 빗방울이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들으면서 나나는 고뇌했다. 창작의 열기를 불태운다. 그렇게 해서 세상에 나온 게 드라마 트리트먼트(제작과정에 필요한 상당히 풍부하고 방대한 서술 - 기자 말)이고, 연극으로 이어졌다.
▲ 김은성의 희곡 <빵야> |
ⓒ (주)알마 |
"나는 이야기를 쓰기 위해 이야기를 쓰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는 진심으로 함께 아파하고 있는 걸까?
이야기의 완성을 위해 그들의 고통을 내 마음대로 편집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김은성의 희곡 <빵야> p. 160)
마침내 나나는 글쓰기에 대한 의미 부여를 끝내고 확신한다.
"저는 쓰고 싶습니다. 성공하고 싶은 욕심 때문입니다. 돈을 벌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쓰는 일이 마냥 좋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역사를 살아가는 그들과 지금을 살아가는 내가 만나는 일입니다.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는 착각이 들 때 진심으로 행복합니다. 계속 쓰고 싶습니다. 일단 거짓말에 의지하기로 마음을 정리합니다. 기억하고 기록하고 증언하는 의미가 있다. 그런 의미 있는 작업을 하는 중이라고 스스로와 타협을 봅니다." (김은성의 희곡 <빵야>pp. 161~162)
연극 <빵야>는 나나가 쓰는 드라마의 트리트먼트로써 전개된다. 시놉시스가 작품의 기획 단계에서 쓰이는 짤막한 분량의 작품 의도나 줄거리라면, 트리트먼트는 제작과정에 필요한 상당히 풍부하고 방대한 서술이다. 연극에서는 나나의 '해설'로 연출된다. 나나의 글로써 나무 상자 속에 갇혀 있던 빵야에게 꿈을 실현할 수 있게 한다. 더불어 나나는 좋은 작품을 쓴 작가로 평가받게 된다. 나아가서 이 연극을 보는 사람에게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통한의 역사를 떠올리게 한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겐 미래가 없다고 한다. 우리는 앞서간 이의 증언을 듣고,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연극을 본다. 그러면서 기억하고 기록하고 되새긴다.
어떤 이는 '꿈은 이루어진다'라는 말조차 희망 고문 아니냐고 비관한다. 그만큼 많은 사람이 팍팍한 현실을 살고 있다. 그렇다고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다. 언제 우리의 꿈이 이루어질지는 아무도 모른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견뎌내고 버텨내는 일이다. 준비하는 자만이 기회를 잡을 수 있다고 했다. 꿈을 간직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간절한 꿈은 언젠가는 이룰 수 있다는 희망을 줄 수 있다는 것까지 느끼게 해주는 연극이다. 장총 한 자루에 얽힌 사연으로 연극이 탄생했듯이 우리의 삶이 부족하고 힘들어도 아름다운 예술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는 희망을 지녀 보자. 예술은 삶으로부터 나온다.
누구나 가슴속에 꿈이 있다. 작은 꿈이든 큰 꿈이든, 우리의 삶을 지탱해 주는 것이 꿈이다. 좀 더 멋진 옷, 좀 더 맛난 음식, 좀 더 넓은 집, 좀 더 좋은 차, 좀 더 좋은 직장, 좀 더 좋은 작품, 좀 더 높은 명예. 세상의 숱한 꿈들이 있을 터이다. 꿈의 다른 이름을 욕망으로 볼 수 있을까. 인간의 욕망은 본능이다. 욕망이 지나치면 탐욕이 되고, 탈법과 불법을 저지르면 범죄가 된다.
요즘 우리나라는 때아닌 이념 논쟁, 친일 논쟁으로 시끄럽다. 뉴스의 정치면과 사회면을 장식하는 사람들. 역사를 잊은 그들도 이 연극을 봤으면 좋겠다. 잊힌 우리나라 역사가 떠오를 것이다. 고통받았던 선조들이 기억되고 민초의 아픔이 다가올 것이다. 고난 속에서 꿈을 이루는 '아름다운 사람'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잠을 자면 꿈을 꾸지만 깨어 있으면 꿈을 이룬다고 했다. 역사에 깨어 있으되 '대도무문'의 참뜻을 새기고 탐욕이 아닌 올바른 꿈을 향해 정진함이 어떠한가.
▲ 연극 <빵야> 포스터. |
ⓒ (주)쇼노트, (주)엠비제트컴퍼니 |
덧붙이는 글 | 브런치 스토리에 게재할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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