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격의 거인' 시리즈로 보는 일본사
[김성호 기자]
평범한 인간이 거인이 된다. 인간 육체의 한계를 넘는 괴력의 소유자가 되어 세상을 집어삼킬 듯 포효한다. 거인이라는 무기를 얻은 이상 벽 안에 움츠려 있던 인류는 멈출 필요가 없다. 백 년 간 넘지 못했던 벽 밖으로 나아간다. 인류의 역습이다. 첫 공세다.
<진격의 거인>은 2010년대 일본 TV애니메이션 업계의 대표작이다. 26조원 규모라는 거대한 산업분야에서 매 순간 전력으로 맞붙는 여러 방송국과 제작사, 작화부터 연출과 음악, 성우, 마케팅 등 다양한 분과의 치열한 격전이 매순간 펼쳐진다. 그와 같은 경쟁 가운데서 전 세계로 뻗쳐나가는 일본 애니의 위용이 빚어진다. 그토록 치열한 경쟁 가운데 독보적 위치를 점한 작품이니 <진격의 거인>을 그리 간단히 이해할 수는 없는 일이다.
한국에서도 드물게 큰 인기를 누린 시리즈다. 커뮤니티 등 온라인상에선 이 시리즈와 관련한 온갖 밈(meme)과 대사, 우스갯소리가 나돌았을 정도다. 바다 건너 다른 문화권에도 영향을 미친 이 시리즈의 힘이 어디에서 기인하는지를 두고 설왕설래, 갑론을박이 오가기도 했다. 1기부터 4기까지의 정주행, 다시 원작 만화의 역주행까지 이뤄진 뒤에도 OTT 서비스 애니메이션 항목의 확고부동한 강자로 <진격의 거인>이 왕성히 소비되는 게 사실이다.
▲ 진격의 거인 2기 포스터 |
ⓒ MBS |
<진격의 거인> 2기는 1기의 폭발적 인기 뒤 4년 만에 제작된 후속 시리즈다. 파격적 설정으로 큰 관심을 모은 1기의 이야기에 비해 원작이 다루는 2기의 줄거리가 다소 지루하고 뻔한 내용이란 우려가 없지 않았으나 이를 불식시키는 연출이 높은 평가를 받았다. 주말 심야시간에 편성된 성인용 애니란 제약에도 2017년 초여름을 달군 화제작이 되었다. 한국도 발빠르게 수입해 애니 전문채널인 애니플러스가 역시 심야시간 방영했다. 이후 OTT 배급까지 곧장 이어지며 흥행가도를 달렸다.
1기는 거인이 인간을 잡아먹는 무법천지의 세상 가운데서 평화를 누리는 벽 안 문명을 비춘다. 50미터는 족히 되는 높은 삼중장벽 안에서 백 년 째 평화를 이어온 인류다. 그러던 어느날 갑자기 60미터쯤 돼 보이는 초대형 거인이 나타나 벽 안을 위협한다. 시간시나라는 외곽 도시의 정문을 깨부수고 침입해온 거인들이 도시를 휘젓고 사람들을 해한다. 시리즈의 주인공이라 해도 좋을 앨런과 미카사, 아르민은 겨우 안쪽 장벽 안으로 도피해 살아남는다. 앨런은 눈앞에서 어머니가 잡아먹히는 모습을 보고 거인에 대한 증오를 키운다.
그로부터 거인에 대항하는 인류의 군대, 그중에서도 장벽 바깥으로 나아가 인류의 영역을 넓히는 조사병단에 입단한 주인공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1기는 인류가 겪은 위기와 역습을 중심으로 하며, 거인화에 성공한 앨런을 중심으로 병단이 잃은 땅을 되찾는 이야기로 흘러간다.
▲ 진격의 거인 2기 스틸컷 |
ⓒ MBS |
충분한 시간을 두고 공 들여 만든 2기다. 원작의 구성상 시리즈 가운데 가장 약한 지점이 되리란 평가에 따라 재능 있는 연출가를 다수 투입해 심혈을 기울여 연출했다. 작화, 특히 박진감 넘치는 액션연출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총감독 아라키 테츠로의 숙련된 통솔에 더하여 제 재능을 터뜨린 히라오 타카유키의 활약에 힘입어 시리즈 전체가 박진감 있게 흘러간다.
당하기만 하던 인류가 거인에게 역습하는 광경은 여러모로 인류사의 여러 지점을 떠올리게 한다. 한때 인류는 얻어터지기만 하던 호구였다. 질병에 대해서도 그러했다. 14세기 이후 전 세계 곳곳에서 수많은 이를 위협한 전염병을 떠올려보자. 페스트, 흑사병, 역병 등으로 불린 어느 병은, 발병하면 수일 만에 인간을 죽음으로 몰고 갔다. 기록에 따라 중세 유럽인의 삼분지 일이 이 병으로 사망했단 보고가 나올 정도다. 도시 하나가 사람 사는 이 없는 폐허로 뒤바뀌기도 하고, 바다 위에선 산 사람 없는 유령선이 떠돌았다.
▲ 진격의 거인 2기 스틸컷 |
ⓒ MBS |
일본사 또한 수세에서 공세로의 전환, 그 자체로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15세기 대항해시대가 열린 뒤 세계사를 주도한 서양 문화권의 공세로부터 아시아는 언제나 수세적 입장이었다. 산업혁명과 서구열강의 식민지 약탈은 그 정점이라 할 만했다. 부당한 조약이 곳곳에서 체결됐고, 그나마 빨리 문호를 개방한 일본조차 서구로부터 자원이며 이익을 빼앗겨야 했다.
그러나 동아시아 판도만 놓고 보자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청나라와 대월, 조선 등 타국에 비해 그 존재감이 미미했던 일본국은 서구와의 교류 이후 공세적 입장으로 올라선다. 조총과 화약 등 신무기를 확보한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세력이 일본 전토에서 가장 막강하다 평가받았고, 그를 바탕으로 전국시대의 패권을 잡는다. 그들이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일으켜 조선 전토를 전화에 휩싸이게 하고 명나라의 국력 또한 소실케 한 역사가 있었다.
▲ 진격의 거인 2기 스틸컷 |
ⓒ MBS |
일본의 입장에서 신기술의 확보를 통한 대전환은 빼놓을 수 없는 역사적 변곡점이다. <진격의 거인> 가운데 앨런의 거인화, 즉 인간도 거인이 될 수 있음을 발견한 사실이 꼭 그와 같다. 그로부터 인간은 오랜 수세에서 적극적 공세로 대전략을 전환하기에 이른다.
미약한 인간이 거인이 되고, 작은 섬나라가 대륙을 위협한다. <진격의 거인>에 담긴 배경적 함의, 일본인이 환호할 밖에 없는 설정이란 바로 이것이다. 역전을 가능케 하는 전에 없던 힘, 그를 통한 대공세, 이것이야말로 그들이 밟아온 길이며 피를 끓게 하는 소재인 것이다.
<진격의 거인>은 여러모로 오늘의 한국 창작자들에게 의미심장한 시사점을 던진다. 지역성과 개별적 역사성은 더는 콘텐츠 시장의 제약조건이 되지 못한다. 저만의 역사적 해석과 감성이 그와 다른 시각을 가진 이들에게 신선함을 준다. 그렇다면 한국 또한 하지 못하리란 법이 없다. 한국의 역사와 사회를 배우고 겪어낸 이의 감성과 사고로써 새 시대의 이야기를 써내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 그게 그대로 한국 콘텐츠시장의 경쟁력이 되리란 걸 나는 굳게 믿는 것이다.
덧붙이는 글 |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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